엘레강스
엘레강스 élégance(프)
우아함, 고상한 것, 주로 인간의 외면적인 양태, 특히 그 움직임에 있어 정신성과 감각성이 알맞게 조화된 상태를 말하며 형태상의 뚜렷한 특색을 갖는다. 고전주의*미학에서는 숭고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엘레강스 élégance(프)
우아함, 고상한 것, 주로 인간의 외면적인 양태, 특히 그 움직임에 있어 정신성과 감각성이 알맞게 조화된 상태를 말하며 형태상의 뚜렷한 특색을 갖는다. 고전주의*미학에서는 숭고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백 餘白
화면에서 묘사된 대상 이외의 부분. 특히 동양화에서는 예부터 여백을 화면에 두루 퍼져 있는 기(氣)의 표상으로 여겼다. 중국의 초기(10세기)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기상(山水氣象)’을 묘사하고자 여백을 두었다. 여백은 광(光)과 기를 의미한다. 북송北宋의 사대부들이 시화일치론(詩畵一致論)을 제창하였는데, 그림 가운데 여백은 시정과 여운을 양성하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남송南宋의 마원馬遠(마 위앤), 하규夏珪(시안 꾸에이)는 이를 과장되게 사용하여 ‘일각구도*’에 의한 화면의 주요 부분을 공백으로 처리하여 정형화했다.
여백으로 광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수법은 송, 원(宋元)시대의 선종 화가들에게 종교이념을 표명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고 명대(明代)의 절파*화풍으로 계승되었다. 여백은 필선을 최소화한 감필과 함께 표현을 억제하는 데 의의를 두며 많은 걸작을 만들어냈다. 또한 묵죽*, 화조화*, 인물화*에서 여백은 대상의 포치에 대한 구성상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여백은 종종 장식적,조형적 효과를 내기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여사잠도 女史箴圖
중국 동진東晋의 화가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가 그렸다는 인물화*. 서진西晋의 장화張華(즈앙 화, 232~300)가 지은 《여사잠》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사잠》은 혜제惠帝의 황후 가씨(賈氏)의 방종을 걱정한 장화가 여사(후궁에서 황후의 범절을 맡는 여자. 양가 집안의 부녀로서 글과 교양을 갖추었던 여인이 뽑혔다)의 직책을 훈계하고, 황후 일족을 풍자할 의도로 지었다고 한다.
<여사잠도>는 황실 규방 여인들의 품행 문제를 다룬 일종의 권계화(勸戒畵)이다. 이 그림에서 고개지가 사용했던 선(線)의 기법을 춘잠토사식(春蠶吐絲式) 또는 유사묘법(遊絲描法)이라 한다. 이는 필선이 명주실처럼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생동감이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농담(濃淡)의 색채를 희미한 점철로 처리하는 등 특이한 도칠(塗漆) 방법을 구사하고 있다. 고개지의 <여사잠도>(런던 대영박물관)가 가장 유명하고, 그 밖에 이보다 후대에 제작된 모사본(북경 고궁박물원)이 있다. 모두가 육조(六朝)시대의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여산도 廬山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여산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성자현星子縣의 서쪽, 구강현九江縣의 남쪽에 있는 유명한 산으로 ‘광산匡山’ ‘광려匡慮’라고도 한다. 경치가 빼어나고, 예부터 은일고사(隱逸高士)들이 숨어 사는 곳으로 이름이 높아 시인 화가들이 자주 찾았다. 북송北宋의 문인화가 소식蘇軾(쑤 스, 1036~1101)은 여산에 올라 자연경물을 관찰할 때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면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게 된다”고 하며 산을 앞뒤 좌우로 두루 보면 원근 고저가 하나도 같지 않다는 산에 대한 관찰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여산이 이름을 떨치면서 여산도는 산수화의 주요 화제로 다루어졌다.
주요 작품으로는 이백李白(리 바이)의 시에 나오는 향로봉이나 폭포를 그린 남송南宋 옥간玉澗(위 지앤)의 작품(도쿄, 개인소장), 송대(宋代) 문인인 구양수歐陽修(어우 이앙서우)의 시 〈여산고〉를 본떠 명明의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가 그린 <여산고도廬山高圖>(대북 고궁박물원 소장), 청淸나라의 석도石濤(스 타오, 1641~1717)의 <여산관폭도廬山觀瀑圖>(교토, 개인소장) 등이 있다.
여의두문 如意頭紋
뿔이나 대나무, 쇠붙이 등으로 전자(篆字)의 심(心)자를 나타내는 고사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문양화한 것. 승려가 설법할 때 지니는 도구로 ‘모든 것이 뜻과 같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불교 전래시에 인도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전한다. 여의두문의 머리형식은 보상화문*에서 본 뜬 것이며 구름무늬에서도 유사한 형상이 보인다.
여장 女墻
성벽 위에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방패의 역할을 하면서 활이나 총을 쏘기 위해 구멍이나 사이를 띄어서 쌓은 작은 성벽으로,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져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여장의 형태는 삼각형, 사각형, 반원형, 사다리형 등 다양하며 여장의 중간에 총안까지 갖추어 방어력을 높였다.
역대명화기 歷代名畵記
당唐의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 815~875께)이 847년에 쓴 중국의 화론서 10권. 앞의 2권은 화학(畵學)에 관한 통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3권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두 수도와 외주外州의 사관(寺觀;불교 도교 사찰에 대한 총칭)의 벽화, 고서화의 발미압서(跋尾押署), 궁정과 개인의 수장인기(收藏印記) 등을 기록하였다. 뒤의 7권은 헌원軒轅 시대에서부터 당의 회창 원년(會昌, 841)에 이르기까지의 화가 373명에 대한 간략한 전기와 품평으로 구성되었다. 회화*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인식이 유심론적이나, 회화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바라보고 교화와 같은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점 등이 돋보인다.
또 회화의 감식과 수장에 대한 기본 이론을 정립하여 주목된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견문을 기술한 것이 매우 널리 갖추어졌다”고 평가한 바 있다. 장언원은 전대 사람들의 평가를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견해도 참고하였는데, 화가의 사승관계 시대와 출신지 그림의 품격과 품평 등에 대한 논조가 매우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인증(引證)의 출처도 명확하고 그 가운데 몇몇 화가들의 화론(畵論)을 수록하고 있어 더욱 귀중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자료를 모으는 과정에서 민간의 화공(畵工)을 경시한 부분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비슷한 종류의 저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역사화 歷史畵
historical painting(영)
역사상의 사건을 주제로 한 회화*. 넓은 의미에서는 신화나 전설 중의 사건을 그린 것도 포함되며 또 작가와 같은 시대의 사건을 그린 그림도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제재가 되는 사건은 한 민족이 광범위하게 주지하고 있는 내용이 등장하는 게 일반적이며, 대체로 사건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는 민족적 영웅이 이상화되어 등장한다.
그러므로 역사화의 의의는 사실의 충실한 서술에 있기보다 사건의 역사적인 중대성이나 장면의 극적 구성에 있다.
역사화는 모든 시대에 그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로마 시대의 대표적 예로는 폼페이 출토의 유명한 <알렉산더 모자이크>가 있고, 중세에는 잉게르하임의 카롤링거 왕성 내의 벽화*등이 있다. 중세에 역사화는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14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다시 그려져 널리 퍼지게 되었고, 17~19세기 초에는 유럽의 아카데미에서 회화의 가장 고귀한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대적인 사건을 정확히 재현하고자 하는 기록적 역사화는, 서양에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시작되었고, 이러한 경향도 인상주의 이후엔 급격히 쇠퇴하고 말았다.
연등천장
목조건축의 내부에서 서까래 바닥면을 보이게 한 천장으로, 삿갓천장이라고도 한다. 가장 오래된 천장형태로 움집, 귀틀집, 토담집 등에서 사용되는 원초적인 천장이다. 연등천장의 특색은 서까래 사이로 산자를 엮은 부분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이지만 산자가 보이지 않게 널빤지로 서까래 사이를 덮어 정리하기도 한다. 이러한 천장은 주심포* 계통 양식의 집에 주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