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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 아트

옵 아트 Op Art(영)

옵아트는 ‘옵티컬 아트Optical Art’를 줄여서 부르는 용어이다. 즉, ‘시각적인 미술’의 약칭이라 할 수 있다. 이 양식은 ‘망막의 미술(retinal art)’과 ‘지각적 추상(perceptual abstraction)’이라는 다른 명칭으로도 불린다. 이 용어는 1964년에 조각가인 리키George Ricky가 당시 뉴욕의 근대미술관 큐레이터였던 젤츠Peter Selz, 사이츠William Seitz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름지어졌다. 옵 아트는 사실은 옵 페인팅이며 모두 추상적이다. 옵티컬이란 ‘시각적 착각’을 의미하는데 옵 아트의 작품은 실제로 화면이 움직이는 듯한 환각을 일으킨다.
예를 들면, 구불거리는 하얀 배경 위에 검은 평행선들이 놓인 브리지드 라일리Bridget Riley(1931~ )의 생명감 있는 작품은 운동감과 깊이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당시 미국 화단에서 강력한 뿌리를 가지고 인기를 끌던 팝 아트*의 상업주의나 상징성에 대한 반동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옵 아트는 미술품의 관념적인 향수를 거부하고,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으며, 다이내믹한 빛, 색, 움직임의 가능성을 추구했다.
옵 아트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계열이 있다. 즉 움직이는 빛의 형태 및 빛의 공간을 추구하는 키네틱*한 옵 아트와 평면상에서 구성하는 회화적인 옵 아트가 그것이다. 옵 아트는 팝 아트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옵 아트는 팝 아트와 같은 시사적인 자극이라든가 정서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더러, 과도하게 지적이고 조직적이어서 차가운 느낌을 주는 예술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인문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자연과학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옵 아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가능한 방법으로 시각적 착각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비재현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유사 이래의 모든 재현적 예술이 어떠한 의미에서건 시각적 착시를 내포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옵 아트의 선구는 앨버스Joseph Albers(1888~1976)가 색채 이론과 시각적 실험을 지도하던 1920년대 말 독일의 바우하우스* 강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옵 아트가 대단히 유명해진 때는 1965년으로,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응답하는 눈*>이라는 전시회가 계기가 되었다. 이 전시회에서는 여러가지의 표현 방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출품되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시각적인 착각에 따라 일어나는 색채상의 또는 조형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회화작품과 시점의 이동 또는 작품의 변동에 따라 일어나는 조형상의 변화를 추구한 조각적인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옵 아트는 작품과 실재 장식 디자인에 이용되고 그 자체가 장식적인 양식으로의 변화를 추구하게 되면서부터 곧바로 미술계의 주류에서 사라져 버렸다.
옵 아트는 유행하는 양식적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1980년대 말에 필립 타피philip Taaffe와 로스 블렉크너Ross Bleckner와 같은 차용 미술가들이 모더니즘 미술의 양식 변화과정을 탐구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옵 아트의 독창적인 실천가이자 주요 이론가인 바자레리Victor Vasarely(1908~ )의 작품이 대표적이며, 아감Jacob Agam(1928~ ), 라일리 등이 유명하다.

옹성

옹성 甕城

문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의 외부에 설치한 이중성벽. 서울의 남대문이나 개성의 남대문이 대표적이며, 그렇다고 모든 성에 옹성이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옹성은 평면형태에 따라 사각형, 반원형, 기타 특수형 옹성 등으로 구분된다.

와당

와당 瓦當 wa-dang(중)

지붕에 기와를 얹어 내려온 끝에 암키와는 호형(弧形), 수키와는 원형으로 막는데 이것을 평와당(平瓦當), 원와당(圓瓦當)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암막새기와, 수막새기와라고 부른다. 와당에는 적당한 문양을 조각하며 시대에 따라 특징이 있다. 기와는 중국에서 비롯되었고 전국(戰國)시대의 연燕과 제齊의 도읍터에서 와당을 비롯하여 많은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도철문*, 동물문, 수목문(樹木文) 등으로 장식된 것이었다. 한대(漢代)에는 일반가옥에까지 원형의 수막새기와가 널리 사용되고 길상(吉祥)문자, 고사리, 사엽(四葉), 동물 등 문양이 다양해졌다. 남북조(南北朝)시대가 되면서 연화문*(蓮花文)이 크게 유행하고 당대(唐代)에까지도 지속되며 당대 이후에는 수막새 주연에 연주문*(聯珠文)이 가미된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와당이 나타나 고구려의 장군총, 신라의 황룡사지, 백제의 미륵사지 등에서 발견되었다. 암막새기와는 주로 삼국시대 이후에 유행한 것으로 보이고 신라시대에 들어 암막새기와가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주로 당초문*, 인동문*, 포도문, 보상화문* 등의 식물계나 용, 기린, 앵무, 비천*(飛天) 등의 동물계 문양을 대칭으로 배치한다. 수막새기와의 무늬는 주로 연화문*이 주류를 이루는데, 고구려의 것은 한漢의 영향으로 면을 몇 개의 선으로 구획하고 배치했으며 백제의 것에는 중국 남조(南朝)의 부드럽고 우아한 형식이 나타난다. 통일신라의 와당은 보상화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고려시대의 것은 햇무리 무늬와 범자문(梵字文) 등이 나타나고 귀면문*이 유행된다.

와상

와상 臥像 gisant(프)

‘gisant’은 ‘무력하게’ 또는 ‘죽어서 누워 있다’는 뜻의 프랑스어이다. 기념적 묘소 가운데 가로 누워 있는 조상에 대해서 15세기부터 사용된 용어이다. 와상은 일반적으로 죽은 사람을 재현한 것이다. 와상의 자세는 예배상(orant)과 대조적으로 놓여 있다. 예배상의 자세는 무릎을 꿇고 있거나 기도하는 자세로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재현되어 있다. 르네상스*시대의 기념적 묘소에서는 와상이 흔히 예배소 내부에 마치 시신처럼 재현되어 있는 반면에, 묘소의 상부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예배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재현되어 있다. 15세기에는 이러한 와상이 흔히 섬뜩한 이미지로 재현되었다.

왜곡

왜곡 歪曲 distortion(영)

예술에서 원형과 그 표상 간의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으로 나타나는 차이를 가리키는 용어. 모든 예술 작품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삼차원적 복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변형 혹은 왜곡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각은 모델이 없는 경우일지라도 인체특정학의 법칙에 의거해서 왜곡된 비례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는 원근법에 의해 부득이하게 왜곡된다. 또한 카메라를 향하여 손을 들면 부자연스럽게 크게 보이는데, 이때 사진도 왜곡되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외관상의 왜곡은 우리 마음이 변화를 극소화시킴으로써 지각체계에 안정성을 보전하려는 항상성(恒常性)에 의한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을 볼 때, 우리는 망막에 던져진 상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다고 알고 있는 크기를 본다.
사진사와 마찬가지로 자연주의 화가들은 대개 이런 경향으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극단적인 왜곡을 피한다. 반면에, 바로크* 시대의 일루저니스트 화가들은 작품을 단지 한 면에 구상하므로, 모든 면에서 왜곡되어 보인다. 왜곡이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왜곡이 감정이입*의 기법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개념적 모호성으로부터 왜곡의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예컨대, 인간의 형과 산맥의 양상들을 결합한 헨리 무어Henry Moore(1898~1986)의 조각이 바로 그것이다. 왜곡은 때로 보다 특수한 표현적 목적 때문에 사용되는데, 이미 알고 있는 대상에 불쾌하거나 우아한 형태 및 비례를 부여한다는, 동시적 인식에 의한 정서 반응을 감상자에게 유발시키는 데 있기도 하다.

왜곡 원근법

왜곡 원근법 歪曲遠近法
perspective tordue(프)

선사시대의 회화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묘사법. 동물의 신체를 측면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뿔과 발굽은 정면이거나, 4분의 3정도 정면으로 보이도록 앞쪽으로 휘어서 굽어지게 하는 표현 기법.

왜회

왜회 倭繪

→ 야마토에

외광파

외광파 外光派
Pleinairisme(프)

넓은 의미로는 19세기 프랑스 회화사에 등장하는 호칭으로서 아틀리에의 인공 조명을 거부하고 실외의 직접적인 빛을 받으며 습작뿐만 아니라 유화까지도 제작하려는 태도, 또는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화가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주제는 필연적으로 풍경화가 많다. 특정의 유파를 가리키는 경우엔 인상주의*가 이에 해당한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는 실외의 공기와 자연광선에 의한 회화적 효과를 표현하기 위하여 야외에서 그리는 화가들을 가리킨다. 19세기 중기까지 풍경화는 야외에서 모티브*를 취하여 화실에서 마지막 손질을 가해 완성하는 것이 통례였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다갈색을 기초로 한 어두운 화면을 지니고 있다.
19세기의 영국 화가 콘스터블John Constable(1776~1837), 터너William Turner(1775~1851)는 아틀리에*에서 야외로 나와 자연 광선에 의한 풍경의 변화하는 양태를 밝은 색채를 써서 직접 그리기 시작하여 외광파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역시 19세기 중반 마키아파(Macchiaioli)의 화가들, 프랑스에서는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 선행하여 퐁텐블로파*의 화가들, 즉 드비니나 네덜란드의 용킨트가 이 부류에 해당한다. 드비니는 수면에서 교차하는 빛을 잡기 위하여 강에 띄운 배 위에서 제작했는데, 이러한 제작 태도가 후에 마네Édouard Manet(1832~1883), 피사로Camille Pissaro(1830~1903),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 모네Claude Monet(1840~1926) 등 인상주의의 화가들에 의해 채용되었다. 인상주의와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던 관전파官展派의 아카데믹한 화가들 중에서도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야외에서 제작한 화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인상주의의 아류라는 의미에서 외광파라고 부른 적도 있다.

외수화

외수화 畏獸畵
wei-shou-hua(중)

재앙이나 악귀를 쫓을 목적으로 괴수(怪獸)의 형상을 몸체까지 모두 표현한 그림을 일컫는다. 진晋의 곽박郭璞이 《산해경山海經》 〈북산경北山經〉에서 맹괴孟槐를 설명하기를, 벽사(辟邪)를 위한 외수화(畏獸畵)로 그려졌다고 하였고 이외에도 《산해경》중의 박駁, 효囂, 강량彊良이 외수화로 묘사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또한 당唐의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애위앤, 815~875경)이 찬(贊)한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권5 중에 진의 명화가인 왕이王廙(우앙 이)가 외수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서 비롯된 말이다. 외수화는 전국말(戰國末)~한대(漢代)에 걸쳐 성행했던 귀신숭배와 귀신제사에 기인한 것으로,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와 《초사楚辭》 <천문天問> 등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 궁(宮)과 사당에 각종각양의 여러 귀신그림이 그려져 신앙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귀신의 형상은 전설 속의 전쟁신인 치우신(蚩尤神)에 대한 신앙이 대두됨에 따라 후한대(後漢代)에 치우신의 형상으로 정리통합되었다. 즉 입을 크게 벌린 맹수의 얼굴과 3~4개의 발가락을 지니고 갈기를 날리며 직립한 괴수의 형상으로 전형화되어 귀면문*(鬼面文)처럼 벽사 목적으로 ‘외수화’라는 일정한 회화장르를 형성했고 고분벽화나 공예품, 공현(鞏縣)석굴*과 같은 불교석굴에도 조각되었다.
외수화가 표현된 현존유물로는 후한後漢 말의 기남沂南 화상석묘, 무량사武梁祠 등의 여러 화상석*, 화상전*묘와 523년의 북위北魏 풍옹처원씨馮邕妻元氏 묘지(墓誌)와 524년의 북위 원소元昭 묘지*, 526년경의 소굉蕭宏의 묘지석을 비롯한 남북조(南北朝) 석각예술, 돈황*敦煌 249, 285굴 등의 벽화, 공현석굴* 1굴 등에 남아 있다. 한국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과 오회분五盔墳 4, 5호묘, 신라의 식리총飾履塚 출토 금동식리(金銅飾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요 窯

→ 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