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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요

관요 官窯 guan-yao(중)

궁정용 도자기만을 굽는 관영(官營)의 가마*. 관요에서 생산된 정교한 도자기들은 황제의 어기(御器), 궁중의 제기(祭器), 일상용기, 혹은 신하나 외국사신에게 주는 하사품 등으로 쓰였으며, 주로 명관(名款, 年號名)이 표시되어서 시대와 제작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요로는 북송北宋 때 하남성河南省 보풍현寶豊縣 청량사淸凉寺 부근의 여관요(汝官窯, 汝窯), 휘종황제가 개봉開封에 설치한 북송관요(卞京官窯), 남송南宋 때 항주杭州에 설치된 남송관요(修內司窯, 郊壇窯)가 있고 원대(元代)의 추부요(樞府窯), 명대(明代)의 경덕진요*(景德鎭窯) 등을 들 수 있다. 청대(淸代)에까지 이 제도가 이어져 경덕진 어기창은 더욱 정비되어 강희, 옹정, 건륭대 무렵(1662~1795)에 기술이 매우 향상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관요로는 조선시대의 경기도 광주요*(廣州窯)를 들 수 있다.

관음보살

관음보살 觀音菩薩
Avalokitesvara(범)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관세음자재보살’ 이라고도 한다. 당대(唐代)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리 스민)의 휘자(諱字)를 피하여 ‘세’자를 생략하고 ‘관음’이라고 불렀다.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서원한 보살로서,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 속에 거의 들어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신앙되었다. 《법화경法華經》 〈보문품普門品〉에는 위난(危難)을 당한 중생이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관음이 즉시 33종류의 화신으로 변해 그들을 구해준다고 되어 있으며, 현령(顯靈)하여 불법을 강연하던 도량(道場)이 절강성浙江省 보타산普陀山에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법화경法華經》외에 《화엄경華嚴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능엄경楞嚴經》을 중심으로 관음신앙이 전개되었다.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을 대세지보살과 지장보살*과 함께 협시*하는 경우가 많고, 아미타를 협시하는 8대 보살로서도 많이 표현된다. 형상은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새기고 손에 보병이나 연꽃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절에서 초기에는 남자상이 많았으나, 당대(唐代)이후로는 여자상으로 바뀌었다. 밀교의 관음은 백의관음白衣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羂索觀音 등이 있는데, 이는 중생의 제도를 위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안서安西 유림굴楡林窟 당대 벽화 속에 있는 수월관음*水月觀音과 대족심신거굴大足心神車窟의 오른쪽 벽에 있는 일월관음日月觀音, 산서성山西省 평요현平遙縣 쌍림사雙林寺에 있는 명대(明代)의 니조자재관음泥造自在觀音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말기부터 관음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십일면관음과 수월관음, 천수관음 신앙이 가장 많이 신앙되었고, 관음보살화로는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가 많다. 관음보살은 관음전 또는 원통전에 모셔져 있다.

광림파

광림파 光琳派

→ 린파

광배

광배 光背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 부처님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장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원광(圓光), 후광(後光), 광(光), 염광(焰光) 등으로 불린다. 원래 불타(佛陀)상에 한하여 조성되었지만, 점차 보살과 여러 신들에게도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광배의 종류에는 크게 머리에서 발산하는 빛을 형상화한 두광(頭光, siras-cakra)과 전신에서 발산하는 신광(身光, vali-cakra), 거신광(擧身光)이 있다.
인도의 초기 불상 즉 간다라불상에서는 두광만 형상화하였는데, 머리 윗부분의 백호(白毫)를 중심으로 한 원륜(圓輪)이 그것이다. 초기 두광에는 무늬가 없었으나 연화문*, 화염문, 당초문* 등 여러 문양이 점차 첨가되었고 중국에 들어와서는 형태도 끝이 뾰족한 보주형이나 연판형뿐 아니라 빛의 발산을 표시하는 채색문과 선광(線光)을 형상화하는 등 다양해진다. 신광은 두광과 함께 표현되며 신광만 나타내는 경우는 없다. 거신광은 입상이나 좌상에 관계없이 몸전체를 감싸는 형태로 전신광(全身光)이라고도 한다. 형식에는 두광과 신광을 겹쳐서 표현한 이중원광(二重圓光)과 전체의 모양이 배와 같은 주형(舟形) 광배가 있다.

광선주의

광선주의 光線主義 Rayonnisme(프)

1912~1914년 곤차로바Natalya Goncharova(1881~1962)와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1881~1964) 부부를 중심으로 러시아에서 전개된 추상 또는 반(半)추상운동. 광선주의는 191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타깃 전(展)Target Exhibition>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해 라리오노프는 “광선주의는 입체주의*, 미래주의*, 오르피슴*의 종합”이라는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14년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가 파리에 이주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광선주의 양식은 인상주의*의 빛과 색채의 관계를 발전시켜 방사되는 광선 가운데서의 사물의 형태와 색채의 리듬을 파악하는 방법과 미래주의에서 강조하였던 일종의 사차원적인 시간을 회화 속에 도입하였다. 순수하게 색과 형태만의 세계, 즉 추상회화의 영역으로 몰입하였던 광선주의는 무대 미술에 특히 강한 영향을 미쳤으나, 하나의 미술운동으로서는 오래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광주요

광주요 廣州窯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요*(官窯). 조선시대 초기에는 전국의 도자소(陶磁所)에서 제작된 상품의 도자기를 공물(貢物)로 수납하여 왕실용으로 사용하였다. 1468년(세조13년)에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司饔院)으로 개칭되던 무렵에 관영백자제조장(官營白磁製造場)으로서 사옹원의 분원(分院)이 경기도 광주 한강지류의 경안천慶安川에 설치되었다. 즉, 1470년대를 전후한 조선 세조 연간에 왕실 및 관청용의 백자*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관요로서 380명의 사기장(沙器匠)이 소속된 광주요가 성립된 것이다. 이렇게 체제가 변하면서 백자가 매우 발달하였다. 또한 분청사기*粉靑沙器는 백자화되었으며 관에서 쓰던 그릇에서 일반민간용으로도 쓰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1)과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해마다 사옹원 관리가 화원(畵員)과 서리(書吏)를 거느리고 어용의 그릇을 제작, 감독했다는 기록을 살필 수 있어, 광주요 백자에 그림을 그린 것은 화원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광주 분원은 서울에서 가깝고 땔감인 나무가 풍부하며, 양질의 백토(白土)가 인근에서 산출되고 수운(水運)이 편리한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분원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는데, 그것은 땔감조달을 위해 수목이 울창한 곳을 택하여 10년에 한번씩 광주 내에서 번소(燔所)를 이동하여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요에서는 주로 양질의 백자와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제작되었는데, 시기별 주된 요지로는 초기 1480~1490년대에는 도마리道馬里, 무갑리武甲里 요지 등이 있으며, 이후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이란 명문*(銘文)의 백자가 출토되는 우산리牛山里, 번천리樊川里 등이 있고, 임진왜란 이후 정지리亭支里, 탄벌리炭筏里, 학동리鶴東里 등에서 담청회백색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이후 18세기 전반 유백색 바탕에 간결한 추초문(秋草文)이 있는 청화백자로 유명한 금사리요(金沙里窯), 1752년부터는 금사리요의 백자와 유사하면서 청백색이 특징적인 분원리요(分院里窯)로 옮겨져 왔다. 이윽고 1883년에 광주분원은 도서원(都署員)이 운영하고 경시인(京市人)이 판매하는 민간경영체제로 바뀌었다가 1900년대에 문을 닫게 되어 사기장(沙器匠)들은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광태사학

광태사학 狂態邪學

중국 명대(明代) 회화양식인 절파*浙派의 후기 화풍을 비판하는 용어. 절파는 명대 초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회화양식으로, 이당李唐(리 탕),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 등의 회화풍격을 계승한 것이다. 절파 화풍은 일종의 원체화*(院體畵)풍이어서 문인화가들로부터 비하되었다. 명말(明末)에 이르러서는 절파 후기양식을 광태사학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절파 화가들 중 주로 홍치 연간(洪治, 1488~1505) 이후의 몇 명을 가리켜 ‘미친 행동을 멋대로 하는 자’, 그림에 있어서의 ‘사학의 무리’라고 혹평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 논평은 고렴高濂(까오 리엔)의 《연간청상전燕間淸賞箋》 《준생팔전遵生八霜》, 도륭屠隆(투 롱)의 《화전畵箋》, 서심徐沁(쉬 신)의 《명화록明畵錄》, 당지계唐志契(탕 츠지)의 《회사미언繪事微言》 등에 보인다.
여러 문헌에 나오는 절파 화가의 이름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절파 화가의 극단적인 필묵의 조방함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절파에 대한 비판, 특히 절파 후기 양식에 대한 공격은 다소 편벽스럽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송대(宋代) 이후 전개되어 온 문인화론(文人畵論)이나 명말 이후 성립된 남북종론(南北宗論)의 영향이 깊다. 문인화가들의 편벽스러운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명대 중기 감상가인 이개선李開先(리 까이시앤)의 주장이 있다. 이개선은 그의 저서 《중록화품中麓畵品》에서 유일하게 절파 화가를 변호하였다.

괴석도

괴석도 怪石圖

문인화*(文人畵)의 한 화제(畵題)로, 기이한 바위를 그린 것이다. 바위는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영원불멸의 상징이며, 비바람을 가리지 않는 의연한 자태로 인해 군자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북송(北宋)시대에 많이 그려졌는데 문인화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한다. 즉 북송의 문인들은 괴석을 통해 자신의 정감을 사의*(寫意)가 풍부한 회화작품으로 형상화시켰다.
괴석만을 단독으로 그린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식물이나 동물들과 함께 그린 것도 많다. 문인들은 주로 사군자*(四君子)와 함께 그렸다. 원, 명대(元明代)에도 꾸준히 제작되었으며, 한국에서도 많은 화가들이 괴석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곤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괴석을 그려보지 않은 화가가 없다”고 할 만큼 괴석이 많이 그려졌는데, 특히 정학교丁學敎(1832~1914)의 <괴석> <괴석대련怪石對聯> <송무석수松茂石壽> 등이 유명하다. 괴석도의 한 화제로 <과석도窠石圖>가 있는데, 이는 구멍이 뚫린 기괴한 형상의 돌을 그린 그림이다. 과석은 중국 남방의 태호석(太湖石)과는 다른 화북(華北)의 괴석을 말한다. 괴석을 다투어 완상했던 북송 때에 이 화제가 많이 그려졌다. 단독의 화제 이외에도 고목(枯木), 총죽(叢竹) 인물에 붙여지기도 한다.

굉 觥

→ ‘이기’ 참조

교부

교부 敎父
fathers of the church(영)

신앙상 맺어진 사제지간을 부자 관계로 말하는 호칭. 역사적으로 기독교 초기의 교의와 교회 발달에 큰 공헌을 한 교사와 그 옹호자들을 일컫는다. 4세기의 성(聖) 제롬, 성 암브로즈,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6세기의 성 그레고리우스 등이 특히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