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요 廣州窯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요*(官窯). 조선시대 초기에는 전국의 도자소(陶磁所)에서 제작된 상품의 도자기를 공물(貢物)로 수납하여 왕실용으로 사용하였다. 1468년(세조13년)에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司饔院)으로 개칭되던 무렵에 관영백자제조장(官營白磁製造場)으로서 사옹원의 분원(分院)이 경기도 광주 한강지류의 경안천慶安川에 설치되었다. 즉, 1470년대를 전후한 조선 세조 연간에 왕실 및 관청용의 백자*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관요로서 380명의 사기장(沙器匠)이 소속된 광주요가 성립된 것이다. 이렇게 체제가 변하면서 백자가 매우 발달하였다. 또한 분청사기*粉靑沙器는 백자화되었으며 관에서 쓰던 그릇에서 일반민간용으로도 쓰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1)과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해마다 사옹원 관리가 화원(畵員)과 서리(書吏)를 거느리고 어용의 그릇을 제작, 감독했다는 기록을 살필 수 있어, 광주요 백자에 그림을 그린 것은 화원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광주 분원은 서울에서 가깝고 땔감인 나무가 풍부하며, 양질의 백토(白土)가 인근에서 산출되고 수운(水運)이 편리한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분원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는데, 그것은 땔감조달을 위해 수목이 울창한 곳을 택하여 10년에 한번씩 광주 내에서 번소(燔所)를 이동하여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요에서는 주로 양질의 백자와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제작되었는데, 시기별 주된 요지로는 초기 1480~1490년대에는 도마리道馬里, 무갑리武甲里 요지 등이 있으며, 이후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이란 명문*(銘文)의 백자가 출토되는 우산리牛山里, 번천리樊川里 등이 있고, 임진왜란 이후 정지리亭支里, 탄벌리炭筏里, 학동리鶴東里 등에서 담청회백색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이후 18세기 전반 유백색 바탕에 간결한 추초문(秋草文)이 있는 청화백자로 유명한 금사리요(金沙里窯), 1752년부터는 금사리요의 백자와 유사하면서 청백색이 특징적인 분원리요(分院里窯)로 옮겨져 왔다. 이윽고 1883년에 광주분원은 도서원(都署員)이 운영하고 경시인(京市人)이 판매하는 민간경영체제로 바뀌었다가 1900년대에 문을 닫게 되어 사기장(沙器匠)들은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