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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고

일몽고 一夢稿

조선후기 문인 이규상李圭象(1727~1799)의 만록(漫錄) 형식의 문집. 《일몽고》 중 <서가록書家錄> <화주록畵廚錄>에는 영, 정조시대의 화가들에 대한 열전(列傳) 형식의 서화비평이 실려 있다. <서가록>은 서예가에 대한 기록인데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의 글씨에 대해 비평하고 있다. 아울러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의 글씨와 그림에 대한 간략한 평이 실려 있다.
<화주록>에는 조영석趙榮祏, 정선鄭敾, 심사정沈師正, 유덕장柳德章, 이인상, 강세황 등 12명의 사대부 화가와 변상벽卞尙璧, 김홍도金弘道 등 9명에 대한 그림평이 제기되어 있다. 이규상은 화가들을 비평하면서 “그림의 세계에는 사대부 화가와 화원 화가가 있다. 이들의 그림과 기법은 각기 유화(儒畵)와 원화(院畵), 유법(儒法)과 원법(院法)으로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대개 화가는 두 파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세속에서 원법이라 일컫는 것으로, 곧 화원(畵員)이 나라에 이바지 하는 그림의 화법이다. 또 하나는 유법으로 신운(神韻)을 위주로 하여 필획의 가지런함과 성김을 돌보지 아니하고 화원(畵院)에서 그리는 그림과 다른 것이 대체로 유화에 해당한다.
원화의 폐단은 신채(神彩)의 드러남 없이 진흙으로 빚어놓은 것 같다는 점이며, 유화의 폐단은 모호하고 거칠고 난잡하며 간혹 먹의 운용이 서툰 탓으로 필획이 두터우며 지면이 온통 새까맣게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주장은 의장(意匠)을 기초로 한 신운의 획득을 중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규상은 동시대 사대부 화가 중 조영석을 당대의 최고화가로 평가하였는데, 그 이유는 “원법을 갖고 유화의 정채함을 제대로 펴낼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일본 고분시대 미술

일본 고분시대 미술 日本古墳時代美術

→ 일본 선사시대 미술

일본 선사시대 미술

일본 선사시대 미술 日本先史時代美術

선사시대라는 말은 일본에서 조형적 유품이 최초로 모습을 보이는 조몽繩文시대부터 야요이彌生시대를 거쳐 고분시대까지를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조몽시대의 연대는 불분명하나 기원전 3~2세기에서 그 이전의 수천 년에 이르는 시기로 보고 있다. 조몽시대인들은 수렵을 중심으로 어로나 식물의 채집으로 생활했고, 도구로는 자연석을 쪼아 다듬은 석부(石斧) 등을 사용하였다. 용기로는 승문(繩文)이나 자라 무늬가 있는 승문토기(繩文土器)를 사용하였다. 한편 주거에는 수혈주거(竪穴住居), 평지주거(平地住居)가 있었고 동굴도 이용되었다. 고분이 발생하는 서기 4세기까지의 500~600년간을 야요이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사회생활이 진보하였다. 야요이 시대의 토기*는 조몽시대에 비하여 장식도 간단하고 실재적인 형태로 만든 것이 많다. 기라코(唐古)라는 촌락에서는 선각문양이 새겨진 토기들이 발굴되었는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는 동물들이다. 그리고 팔을 번쩍 들거나 배를 젓는 인간들도 표현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화면 구성이라는 개념이 없는 즉흥적으로 구성된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금속 공예의 기술이 발전하여 동검(銅劍), 동경(銅鏡), 동탁(銅鐸) 등이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야요이 문화기의 촌락에서 권력은 점차 가장 힘센 사람들에게로 집중되었는데,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보여주는 예는 사자(死者)를 묻은 거대한 고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연대가 이른 것은 서기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니와’라는 토우들이 이 분묘를 에워싸도록 배열되었다. 하니와 중에는 무인(武人), 악인(樂人), 농부 등을 표현한 것들이 있는데, 표정이 매우 풍부하다. 5, 6세기 분묘들은 벽화들로 장식되었는데, 이러한 벽화고분들은 한반도와 가까운 규슈九州 지방에만 한정되었다. 지금까지 72개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었으며 벽화*는 대개 현실(玄室)과 전실(前室)의 돌벽에 그려졌다. 고분의 벽화는 적(赤), 흑(黑), 황(黃), 녹(綠) 등의 광물성 안료로 사람이나 말, 개 등의 동물, 큰 칼, 배 등의 물건들, 그리고 원, 삼각형, 고사리문과 같은 추상적 도형을 그렸다. 가장 대표적인 벽화고분은 오쓰카王塚와 다케하라竹原촌의 다케하라 고분들이다. 고분출토 공예품에는 관옥(菅玉), 소옥(小玉) 등의 옥공예품과 관모冠帽, 금동 신발, 귀고리 등의 금속공예품들이 있다.

일본미술원

일본미술원 日本美術院

→ ‘도쿄화단’ 참조

일필서

일필서 一筆書
i-pi-shu(중)

서체*의 일종. 후한後漢 장지張芝(즈앙 즈)가 창시했다는 서체로, 문자를 한 붓으로 연결해서 쓴 것. 양梁의 소자량蕭子良(샤오 쯔리앙)이 쓴 《전예문체 篆隸文體》에서 실례를 볼 수 있다. 양의 유원위庾元威(위 위앤웨이)가 쓴 《논서論書》의 <십첩백체병풍十牒百體屛風> 가운데 일필전(一筆篆), 일필예(一筆隸)가 있다. 육조(六朝)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유희적으로 행해졌다. 동진東晋 왕헌지王獻之(우앙 시앤즈)의 《십이월첩十二月帖》 《중추첩中秋帖》, 당唐 장욱張旭(즈앙 쉬)의 《추심첩秋深帖》, 북송北宋 미불米芾(미 후, 1051~1107)의 《장계명첩張季明帖》 등에 일행일필(一行一筆)로 쓰여진 부분이 일필서의 풍습을 전한다.

임모

임모 臨摹

서화 모사(模寫)의 한 방법. 서(書)의 경우, 임서(臨書)라고 한다. ‘임’은 원작을 대조하는 것을 가리키고, ‘모’는 투명한 종이를 사용하여 윤곽을 본뜨는 것을 말한다. 넓게는 원작을 보면서 그 필법에 따라 충실히 베끼는 것을 의미한다. 남제南齊의 사혁謝赫(시에 허)이 주장한 ‘육법*’중 ‘전이모사(傳移模寫)’가 이에 해당된다. 임모의 목적은 앞시대 사람들의 창작규율, 필묵기교 등 경험을 배우는 고전연구에 있다. 형체만이 아닌 화의(畵意)를 베끼는 것이 요체(要體)가 된다. 한편 투명한 종이를 위에 대고 베끼는 것을 ‘탑화(搨畵)’라고도 한다. 탑화는 당대(唐代)에 성행하여 궁중에도 수장(守藏)되었다고 하며 그 후에도 그림을 익히는 제1단계로 중요시되었다.

임천고치

임천고치 林泉高致

중국 북송北宋의 산수화론서. 곽희郭熙(구어 시)의 소설(所說)을 아들 곽사郭思(구어 쓰)가 편집 증보한 것으로, 북송 정화 7년(1117)경 완성되었다. 청淸의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여섯 편으로 나뉘어 실려 있는데, 〈산수훈山水訓〉 〈화의畵意〉 〈화결畵訣〉 〈화제畵題〉 〈화격습유畵格拾遺〉 〈화기畵記〉로 구성되었다. 앞의 네 편은 곽희가 지었고 뒤의 두편은 곽사가 편찬하였다. 이 중 〈산수훈〉이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산수훈〉에서는 산수화*의 본의(本意)가 “임천(산림과 샘, 또는 은거지를 뜻함)의 뜻, 즉 세속을 초월한 고답(高踏)의 경지를 펼침으로써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산수화가는 모름지기 몸소 산천으로 나아가 그것을 취해야 가슴 속에 뚜렷이 펼쳐지며, ‘멀리 바라봄으로써 그 기세를 얻고, 가까이 살핌으로써 그 바탕(質)을 얻어’ 대상의 특징을 파악하고 제련 개괄해야 가행(可行) 가망(可望) 가유(可遊) 가거(可居)의 산수화의 경지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계절의 변화에 따른 음청조모(陰晴朝暮) 등의 경치와 변화를 구별하고, 평원 고원 심원을 삼원*이라 하면서 산수화의 취경법(取景法)을 총괄하였다. 아울러 화학(畵學)을 개인적인 것으로 국한시키는 것에 반대하면서 두루 배우고 널리 고찰함으로써 스스로 일가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화격습유〉는 곽희의 진적(眞迹)을 기록한 것이고, 〈화기〉는 곽희가 신종神宗(재위 1068~1085)의 총애를 받았던 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임천고치는 종병宗炳(쫑 빙), 왕미王微(우앙 웨이), 형호荊浩(싱 하오) 이후에 나온 산수화론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저술이다. 이것은 곽희의 평생동안의 창작경험을 총괄한 것으로, 그 중에서도 자연경물에 대한 관찰방법과 태도, 창작에 있어서의 소재선택의 전형화(典型化), 투시법에 있어서의 삼원의 주장 등이 뛰어나다. 이후 산수화 이론과 창작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임파스토

임파스토 impasto(이)

‘반죽된’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말. 그 어원이 암시하듯 유화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붓이나 팔레트 나이프, 또는 손가락을 사용해 색을 칠하거나, 직접 튜브에서 물감을 짜 바르는 방식으로, 붓자국 등을 그대로 남겨 표면과 질감에 다양한 변화를 주려할 때 이 기법을 사용한다.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 넬러Sir Godfrey Kneller(1646~1723),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의 그림을 보면 보통 중요한 부분이나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에 임파스토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임파스토 기법을 애용한 유명한 화가로 할스Franz Hals,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a Y Velasquez(1599~1660), 마네Eduard Manet(1832~1883),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 반 고흐van Gogh(1853~1890)등이 있다. 안료가 갖는 성질상 수성 물감이나 템페라* 화법으로는 불가능한 기법이며 유약칠이나 바림칠과 대조되는 효과를 낸다.

입사

입사 入絲

주조된 금속기의 표면에 홈을 파고 다른 금속을 두드려 박는 기법. 표면을 파고 다른 재료를 넣어 문양을 장식하는 방법은 도자기의 상감*기법과 목공예의 나전칠기*와 유사하다.
금속의 입사는 중국 은殷, 주周시대에 송록석(松綠石)을 감입한 예가 있고 동(銅), 금(金), 은(銀) 입사는 전국(戰國)시대부터 생겨났다.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 중, 말기는 철제공구의 발달에 힘입어 청동기의 주조 후 표면에 금사(金絲)나 금편(金片)을 박아 넣는 ‘금착(金錯)’ 또는 ‘착금(錯金)’이라고도 불리는 입사공예가 발달했다. 착금과정은 청동기를 미리 홈을 판 형태로 주조하거나 섬세하게는 주조 후에 정으로 홈을 파서 금사를 박아넣기도 하였다. 청동기에 파진 홈은 다시 정으로 쳐서 홈의 바닥을 넓혀 금사가 박힐 때 단단히 고정되도록 한다. 금사나 금편은 불에 쬐어 데운 다음 파진 홈에 두드려 박는다. 입사 후에는 고르지 않은 표면을 숫돌로 문질러 갈아 평평하고 반짝이게 한다.
한국에서는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樂浪의 유적에서 처음으로 금, 은입사 공예품이 다수 출토되었고, 현존 유물 중 최고(最古)의 예는 태화泰和 4년(369)의 〈백제 칠지도七支刀〉이다. 삼국시대에는 선(線) 입사만 이루어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얇은 금속판 입사도 함께 사용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에 불교공예품인 향완*(香垸), 정병*(淨甁) 등에서 매우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조선시대 중기가 되면 정으로 미세하게 쪼은 후 박아넣는 쪼음입사기법이 도입되고 땀입사, 도금입사 등 다양한 기법과 함께 발전되었다.

입체주의

입체주의 立體主義
Cubisme(프)

1900~1914년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 운동.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의 하나. 유럽 회화를 르네상스 이래의 사실주의적 전통에서 해방시킨 회화 혁명으로 지칭되고 있다. 1908년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가,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가 그린 <에스타크 풍경>이라는 연작을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큐브)의 덩어리’라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가 <아비뇽의 여인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풍의 입체주의(1907~1909), 분석적 입체주의(1910~1912), 종합적 입체주의(1913~1914) 등 3단계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자연을 원추, 원통, 구에 따라 취급한다’는 세잔느의 말은 입체주의의 계시가 되었고, 그의 예술과 흑인 조각은 이 운동의 초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입체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주의*의 주정적(主情的)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視點)을 복수화하여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構築的)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할되어 나타난다. 그 후 트롱프뢰유*나 파피에 콜레*의 수법을 채용하게 되고, 이것을 과도기로, 입체주의운동은 후기에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풍부한 색채가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換氣力)있는 요소와 결합, 융화된다.
몽마르트르의 세탁선*에 거주했던 피카소, 브라크, 그리Juan Gris 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 밖에 몽파르나스에서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내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레제Fernand Léger(1881~1955)와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가 있고, 또 퓌토 그룹*으로 화면의 구성원리를 추구하여 추상예술에의 길을 열었던 쿠프카František Kupka(1871~1957)와 비용Jacques Villon(1875~1963), 뒤샹Marcel Duchamp(1887~1968), 뒤샹-비용Raymond Duchamp-Villon(1876~1886)의 삼형제 등이 있다. 1911년 그들은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했고, 이듬해 색시옹 도르*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 앙드레 살몽André Salmon, 모리스 레이날Maurice Raynal 등이 비평가로서 이 운동을 지원했다.
입체주의는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