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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예술

장식예술 裝飾藝術
decorative art(영)

주거 공간과 인간들의 신체 주변을 꾸미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되는 조형미술. 상징적, 표출적, 내면적 의도를 가지고 제작되는 회화나 조각 등에 대해서, 공예품 및 건축의 세부 등에다 그 기능성에 덧붙여 순수하게 시각적인 미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응용되는 조형 예술을 말한다. 복식, 장신구, 벽화* 등 거의 모든 공예품이 그 대상이 된다. 그 표현은 비재현적, 추상적, 문양적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건축, 정원 등에 부수되어 그 미술적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되는 회화나 조각도 여기에 포함된다.

장식적 양식

장식적 양식 Decorative Style(영)

영국 고딕* 건축의 중기 양식. 릭만T. Rickmann에 따르면, 그 특징은 ‘가로격자창 장식’과 ‘수직’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식적인’ 창문은 새로운 건축적 요소를 사용했으며, 창문 크기도 초기보다 넓어진 것이 특징이다. 초기와 후기의 형태는 바로 ‘기하학적’ 양식과 ‘곡선적’ 양식이라는 용어로 구분지을 수 있다. 가로격자창 장식이 영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건물은 1245년 이후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이 건물은 프랑스에서 직수입된 양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치필드의 엔젤 성가대나 런던의 옛 바울 성가대의 격자창들은 초기의 영국식 원리에 충실한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1280~1330년은 중세 영국의 건축사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세가지 점으로 요약해 보면, 첫째 이전 세대의 엄격한 직사각형 설계에서 탈피하여 창문을 비스듬히 보일 수 있게 하는 다변적 형태를 사용하고 있고, 둘째 둥근 천장 상부에 중심 서까래의 두께를 얇게 하고 작은 서까래를 사용함으로써 격자창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식으로 둥근 천장의 형태를 변형했다. 셋째, 가장 평범하면서 진보적인 것으로, 석조 형태를 격자 양식으로 바꿈으로써 벽과 창문 간의 대립을 없앴다.

장여

장여 長欐

도리*밑에서 도리를 받치고 있는 가로 보조재. 일반적으로 폭보다 높이가 긴 장방형(長方形)의 단면을 지니고 있으며, 모양과 부위에 따라 긴장여(通長欐), 뜬장여(別長欐)로 구별된다. ‘장혀(長舌)’로 부르기도 한다.

→ ‘초익공’ 도판 참조

장초

장초 章草

서체의 명칭으로, 전한前漢의 원제元帝(재위 기원전 49~34) 때에 사유史遊(스 위)가 《급취장急就章》을 쓰는 데 사용했다고 하며, 또 후한後漢의 장제章帝(재위 75~87) 때에 두도杜度(뚜 뚜)가 임금에게 올리는 장주(章奏, 上表文)에 사용한 것이 최초라고 한다.
초서*가 필법의 하나인 파책(波磔)을 수반하는 기법을 갖추어 장초의 체를 이루는 것은, 목간(木簡)의 실례를 통해서 볼 때, 전한의 후반기에 행해졌다고 판단되지만 장초가 서체로서 인정되는 것은 후한에 이르러서일 것이다. 오吳의 황상皇象(후앙 상), 진晋의 색정索靖(쑤어징),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 왕헌지王獻之(우앙 시앤즈) 등의 장초체 법첩*이 전해지고 있다.

장혀

장혀 長舌

→ 장여

재동경미술협회

재동경미술협회 在東京美術協會

→ 백우회

재현

재현 再現 representation(영)

미술에서 ‘재현’이란 사람이나 장소 또는 사물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 재현의 형용사형인 ‘representational(재현적)’이라는 단어는 주제를 알아볼 수 있는 미술 작품을 가리키는 용어로, ‘추상적’이라는 용어와 반대된다.
재현된 주제를 해석하는 연구는 이미지와 상징에 관한 연구인 도상학(iconography)과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재현된 주제에 관한 연구는 도상학의 영역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포함하기도 하여, 과거에는 미술사학자의 영역 밖에 있었던 대중매체나 광고 같은 대중문화의 단면들도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분석 방법은 여러 분야를 총괄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노인의 재현에 관한 연구에는 뉴스 매체, 영화, 광고, 여러 문화권의 미술 작품 등에 나타난 이미지와 텍스트 모두 연구 대상으로 포함될 수 있다.

재현예술

재현예술 再現藝術
representational art(영)

눈에 보이는 세계를 묘사하는 예술, 물체의 모양을 재현하는 예술. 추상예술과 대립되고 있으나 양자를 뚜렷이 구분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추상적인 그림 또는 추상에 가까운 그림이라도 어느 정도 재현적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추상미술*조차 예술가의 상상의 재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통 재현예술이란 자연의 외관을 재현하는 예술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이 점에서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로 분류된다.

재흥일본미술원

재흥일본미술원 在興日本美術院

→ 도쿄화단

적벽도

적벽도 赤壁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북송北宋의 문인 소식蘇軾(쑤 스, 1036~1101)이 지은 전후 두 편의 《적벽부赤壁賦》를 그린 것이다. 원풍 5년(元豊, 1082) 7월 16일, 소식은 무도산武道山의 도사 양세창楊世昌과 함께 황강성黃崗城 밖의 적벽에서 배를 띄우고 노닐었다. 이때의 감회를 서술한 것이 《전 적벽부前赤壁賦》이다. 이후 같은 해 10월 15일에 두번째로 이곳에서 노닐며 《후 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적벽부》라고 한다. 《적벽부》는 중국 부문학(賦文學)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데, 훌륭한 화제로 환영받았다. 즉 북송 말 교중상喬仲常(콰오 종창)에 의해서 <후 적벽부도>가 그려진 이후에 적벽도는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회화의 주제가 되었다.
<적벽도>는 주로 문인화가들에 의해서 그려졌으며 특히 16세기 중반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9~1559)과 그의 영향을 받았던 오파*吳派 화가들에 의해서 많이 그려졌다. 적벽도의 형식이 종합정리된 것은 오파에 이르러서인데 표현방법에 의해서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형식은 《후 적벽부》의 내용을 8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서술적으로 그린 것이고, 두번째 형식은 일반 산수화*처럼 한 장면으로 그리되, 수권(手卷)과 축(軸)으로 나누어진다. 세번째 형식은 혼합식으로 여러 장면으로 표현한 것과 한 장면으로 표현한 것에서 각각 한 요소씩 가져와 함께 표현한 것이다. 적벽도에는 소식과 친구들이 탄 배, 적벽과 같은 황강성 풍경 등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데, 문인화*의 시(時), 서(書), 화(畵) 일치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교중상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후 적벽부도>(뉴욕 개인소장)와 금金의 무원직武元直(우 위앤즈)이 그린 <적벽도>(대북 고궁박물원 소장) 등이 알려져 있으며, 송宋 원元 이후로 제화(題畵)의 시문도 많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는 조선 초기에 안견安堅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적벽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