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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미술

파르티아 미술 Parthian Art(영)

파르티아는 이란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한 뒤인 기원전 247년(혹은 239년) 이란에서 등장한 새로운 왕조로 224년 사산* 왕조에 정복당했다. 기원전후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중국을 연결하는 무역로인 실크로드*가 완비되었는데 그 중간에 위치한 파르티아는 중계 무역을 독점하였다. 중국 문헌에서는 파르티아를 ‘안식국(安息國)’이라고 하였다. 파르티아 미술의 성격은 복합적이다. 그리스* 문화를 애호하여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측면도 있지만 그리스와 이란 미술을 절충한 그레코-이란 양식이나 이란 고유의 양식을 보여주는 면도 있다.
파르티아의 주요 도시 유적으로는 크테시폰Ctesiphon, 하트라Hatra, 니사Nisa 등이 알려져 있다. 평면이 직사각형인 헬레니즘의 도시들과는 달리 원형인 파르티아의 도시들은 요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하트라 신전에서는 파르티아의 특징적인 건물 형식인 둥근 천장의 이완(iwan)을 볼 수 있다.
파르티아의 조각*은 하트라, 아수르Assur, 팔미라Palmyra, 두라-유로포스Dura-Europos 등에서 다수 출토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처럼 마애부조를 많이 제작했으며 헬레니즘의 영향임을 알 수 있는 조각상들도 상당수 제작되었다. 아케메네스 미술에서는 인물을 측면관으로 표현했지만 파르티아 미술에서는 정면관을 엄수하고 있어 이 점은 그리스 미술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왕의 초상을 각인한 화폐도 제작되었고 무덤에서는 테라코타* 소상(小像)이 다수 출토되었다.
공예품으로는 금으로 된 귀고리, 은제각배(銀製角杯), 유리기(瑠璃器) 등이 있다.

파묵

파묵 破墨

수묵화*의 한 용묵법(用墨法). 먹을 깨뜨린다는 뜻으로 ‘담묵(淡墨)을 사용하여 농묵(濃墨)을 깨뜨린다’(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 《사산수결寫山水訣》)든가, ‘농묵을 사용하여 담묵을 깨뜨린다’는 식으로 사용된다. 먹의 농담으로 대상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먹면 외에 붓에 의한 윤곽선을 병용하기도 한다.
황빈홍黃賓虹(후앙 빈홍, 1864~1955)은 “파묵법이란 옅은 것은 짙은 것으로 깨뜨리고, 젖은 것은 마른 것으로 깨뜨리는 방법이다”라고 했고, 반천수潘天壽(탄 티앤서우)는 용묵에 대해 “먹이 마른 후에 다시 겹쳐 그리는 것을 적(積)이라 했고, 먹이 마르지 않은 축축한 상태에서 겹쳐 그리는 것은 파(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데에 파묵법을 사용하는 것은 먹빛의 농담이 서로 침투하여 매끄럽고 생기있는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성당(盛唐)시기인 8세기초에 나타났으며, 처음에는 산수수석화(山水樹石畵)에만 사용되었다. 정창원正倉院의 〈조모립녀도鳥毛立女圖〉에 나오는 바위에 그 예가 보인다. 발묵*보다 앞서 나타난 용묵법으로, 후세의 예로는 부벽준*이 전형적이다.

파비용

파비용 pavillon(프) pavilion(영)

본체의 건물에서 세분되어 나온 부분적 건조물. 본체의 중앙부 또는 양쪽 끝과 한쪽 구석부분에 약간 높은 블록으로 되어있고, 장식이 더 많아서 본체와 구별된다. 정자(亭子) 또는 작은 정원건축(庭園建築)처럼, 간단한 부속 건물이나 여흥을 위한 건물. 박람회나 전시회 등의 회장에 설립한 진열관.

파사드

파사드 façade(프)

거리 또는 트인 공간 쪽을 향해 있는 건물의 주된 정문으로 주 현관을 포함하고 있다. 흔히 조각으로 장식되는 건물의 익랑* 끝과 서쪽 끝의 외부면을 가리킨다. 건물의 정면, 건축 요소들과 벽면 위의 그 조직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파스텔화

파스텔화 pastel painting(영)

파스텔로 그린 그림. 파스텔은 빛이 있는 가루 원료를 반죽하여 굳힌 것으로, 옛날에는 석고 또는 백점토를 원료로 써왔으나 지금은 물에 거른 탈산석회(脫酸石灰)로 만든다. 아무런 매체*나 도구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스텔화를 그리는 방법은 다른 그림과 구분된다.
예를 들어 유화는 그려진 색채가 그려지기 전의 건조한 색채와 차이를 보이지만 파스텔화에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파스텔 화가는 사용하는 색채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파스텔화는 착색이 안정적이지 못한 단점이 있으며 가벼운 접촉이나 변화에 의해서도 손상되기 쉽다.
정착제를 써서 이런 단점을 극복할 수도 있지만 파스텔화의 특질인 표면의 질감을 훼손시키고 색깔의 광채를 감소시킬 우려가 있다. 유리를 씌우고 조심스럽게 다루는 것이 최선의 보호책이다. 일반적인 바탕 재료는 무색지가 쓰인다. 파스텔의 색조는 프레스코*나 과슈*에 가깝지만, 광채를 발하는 분말 표면은 파스텔 특유의 속성이다.
파스텔화는 15세기말부터 분필 그림의 활용에서 유래하였다. 모든 색깔을 사용하는 파스텔화는 풍경화가인 동시에 동판화가였던 티일러Fohann Alexander Thieler와 마담 베르네렝Mme. Vernerin 등이 18세기 전반에 발명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18세기말의 랑타라Simon Mathurin Lantara는 파스텔을 풍경화*에 최초로 사용했던 미술가의 한 사람이었다.
19세기 전반에 파스텔화는 퇴조하였으나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와 더불어 부활하여 대중화되었고, 오늘날에는 파스텔화의 다양한 기법이 개발되고 있다. 그어진 한 획마다 나타나는 효과와 밋밋한 색깔의 부위를 감싸는 윤곽, 그리고 색깔들이 뒤섞이지 않고 나란히 병치되는 개방적인 기법의 가치는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파인 아트

파인 아트 fine art(영)

응용미술* 혹은 장식미술*에 반대되는 의미로 ‘보다 고급스럽고’ 비실용적인 예술을 지칭하는 용어. 일반적으로는 회화*, 조각*, 건축 분야를 말하나 시나 음악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파인 아트란 용어는 18세기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다. 바토Charles Batteaux는 <동일 원리로 환원된 순수 예술Les Beaux Arts réduits â un même principe>(1746)에서 예술을 유용한 예술과 아름다운 예술(조각, 회화, 음악, 시) 그리고 미와 유용성이 결합된 예술(건축, 웅변술)로 구분하였다. 뒤이어 디드로Diderot(1713~1784)의 <앙시클로페디아Encyclopédia>에서 다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는 파인 아트를 회화, 조각, 건축, 시, 음악으로 나누었다. 이 목록으로 파인 아트의 개념이 확정되었으며 영국에서는 ‘5예술(five arts)’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파크튀르

파크튀르 facture(프)

구조, 골조, 짜임새 등의 뜻이 있다. 각종 표현 수단을 조작한 결과, 작가의 발상이 작품에 정착되면서 그에 따라 나타나는 작품의 물질적, 감각적인 양상을 가리킨다. 즉 제작의 과정보다 그 결과에 대해 말해지며, 유화 작품인 경우에는 터치*, 마티에르*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파트롱

파트롱 patron(프)

보호자라는 의미. 미술에서는 예술의 보호자, 후원자를 가리킨다. 17세기 이전에는 미술작품이 단지 쓸모있다거나 소유자의 명예를 돋보이게 하는 부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유명한 미술가를 후원하고 기릴 만하다고 믿었던 최초의 증거는 1334년 피렌체 시정부가 지오토Giotto(1266~1337)를 고용한 법령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피렌체에서 지오토란 존재가 그 도시의 명성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1401년 피렌체의 세례당을 위해 치러진 시험 역시 이를 반증한다.
15세기 피렌체의 상인 루첼라이Rucellai는 자신에게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 같은 화가를 고용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신에게 감사했다. 미술가들이 문필가들이 받는 대접과 대등한 후원을 받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메디치 가*에 거액을 요구한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1430~1506)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편 15세기와 16세기초에 로마 교황청이 벌인 미술 진흥사업이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교황청의 권력과 힘을 과시하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증거는 많다. 역대 교황 중 가장 두드러진 후원자였던 율리우스 2세는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를 부흥시키려 했고,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1444~1514),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의 도움을 얻어 제국적 위엄을 회복하려고 계획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권력자들이 만든 이러한 유형은 알프스 산맥 너머의 북쪽 나라에까지 이어졌다. 프란시스Francis 1세는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1500~1570)를, 막시밀리안Maximillian왕은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를, 헨리Henry 8세는 홀바인Hans Holbein(1497~1543)과 토리지아노Pietro Torrigiano(1472~1528)를 고용했다.
이때부터 통치자들은 그들의 통치기간 중 미술이 번성했다고 얘기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했다. 국가 권력의 후원과 성격이 다른 상업적 가치를 위한 후원은 콜베르Jean-Baptiste Colbert(1619~1683)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수출을 증대하기 위해 프랑스의 디자인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그때부터 공적 후원의 이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게 되었다.
19세기 이전 영국은 이러한 경향을 등한시해 호가드William Hogarth(1697~1764)의 격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영국 미술가들이 당한 불이익을 한탄한 최초의 미술가였다. 프랑스의 제도를 모방, 왕실의 후원을 받아 아카데미*를 설립한 목적 속에는 후원자의 안목으로 영국 미술의 지위를 상승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19세기에 대중과 미술가의 소외현상이 심화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가 소외되고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이 자살한 것은 바로 예술가들이 평범한 사람의 기호에 영합하기를 거부한다는 표시였다.
그 당시 화가들은 우정으로 그의 작품을 매입할 중류계급의 적절한 사람을 찾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대체로 표현주의 미술가들이 법률가나 의사 등의 몇 명되지 않는 친구들에게서 받은 후원이 이런 종류였다.
후원자로서 안목을 갖춘 화상이 등장한 것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뒤레Théodore Duret와 볼라르Ambroise Vollard 같은 화상은 젊은 미술가나 새로운 미술운동에 명성과 돈을 걸었고, 심지어 화가가 작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파티오

파티오 patio(스)

스페인 주택의 중정(中庭). 근대 건축에도 응용되어 실내의 연장으로서 거실 또는 식당이 되도록 설계된 중정을 일컫는다.

파피루스

파피루스 papyrus(영)

이집트, 근동에서 널리 자라는 습지 식물(학명 Cyperus Papyrus L.), 또는 그 가지에서 채취된 필기 재료(종이의 일종). 고대 이집트에서는 3000년 전부터 사용되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에서도 표준적인 필기 재료였는데 이것에 글씨를 쓴 문서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4세기부터 양피지로 대체되면서도 10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잉크뿐만 아니라 페인트로도 기록되었다. 삽화가 곁들여진 파피루스로서는 이집트의 중왕조와 신왕조 시대의 것들이 남아 있으며 직조 무늬로 짠 것뿐만 아니라 고전을 해석한 서적 형태의 것들도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