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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몽타주

포토몽타주 photomontage(영)

사진을 오려 그 부분을 재조립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는 합성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 포토몽타주의 영역은 조각난 사진들을 이용하는 데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진에 글씨, 색깔, 그림을 덧붙이는 것도 포함된다.
포토몽타주는 영화에서 필름을 편집할 때 사용하는 몽타주* 수법에 대해서 보통 사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정적인 필름’이라 불려왔다. 포토몽타주의 여러 예는 19세기의 스크랩 북, 영화, 엽서에서 발견되나,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인 그로츠George Grosz(1893~1959), 하트필드John Heartfield(1891~1968), 회흐Hannah Höch, 바더Johannes Baader(1876~1955), 하우스만Raoul Hausmann과 같은 순수예술가들이 진지하게 이 방법을 채택한 것은 1916~1917년부터이다.
포토몽타주의 가능성을 개발해 온 주요 예술가들에는 리씨츠키El Lissitzky(1890~1941), 모홀리 나기László Moholy-Nagy(1895~1946),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1891~1956), 바이어Herbert Bayer(1900~1985), 클루치스Gustave Klutsis,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만 레이Man Ray(1890~1977), 뒤샹Marcel Duchamp(1887~1968), 슈비터즈Kurt Schwitters(1887~1948),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 ), 존슨Ray Johnson 등이 있다.
이처럼 다다*, 초현실주의*, 구축주의*, 팝 아트* 등 서로 다른 다양한 예술사조에서 이 기법을 사용하였다. 특히 하트필드는 포토몽타주를 정치적인 선전 도구로 이용하였다. 1970년대에 포토몽타주는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다시 유행하였으나, 이 경우는 사진을 분할한 것이라기 보다 연속된 사진과 원문을 병치하고 배열한 것이다.

→ ‘몽타주’ 참조

포토저널리즘

포토저널리즘 photojournalism(영)

→ 보도사진

포토콜라주

포토콜라주 photocollage(영)

인쇄된 사진*을 오려서 대지(臺紙)에 붙여 맞추는 수법.

→ ‘포토몽타주’ 참조

포트폴리오

포트폴리오 portfolio(영)

서류 또는 자료의 보관철이나 손가방. 특히 미술에서는 작가의 작품 경향과 과거 및 현재의 작업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견본이나 사진*을 정리하여 모아둔 것을 지칭하며 공모전이나 작가 선정 및 입시 등의 초기 판단 자료로도 사용된다.

퐁타방파

퐁타방파 École de Pont-Aven(프)

퐁타방은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피니스테르에 있는 작은 마을의 이름. 1886년 이 마을에 찾아온 고갱Paul Gauguin(1904~1948)을 중심으로 일군의 젊은 미술가 그룹이 생겼는데, 이 그룹을 퐁타방파라고 부른다. 그 주요 작가로는 라발Charles Laval,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 모프라Maxim Louis Maufra, 드 샤마이야르Henri de Chamaillard 등으로, 고갱이 주장하는 종합주의*의 가르침에 끌리어 강한 윤곽선으로 대상을 평면적으로 묘사하는 구획주의 기법(cloisonnism)을 즐겨 사용하였다.
고갱은 1886년, 1888년, 1889년 3회에 걸쳐 체류하였는데, 그 중에서 퐁타방파 성립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두번째 체류였다. 세번째 방문 때는 그의 추종자들로 이미 그 작은 마을이 번잡해졌으므로 반년쯤 머문 고갱은 마을에서 더 떨어진 르푸르뒤로 옮겨 1년여를 지냈다. 그때 네덜란드에서 찾아온 아안Meyer de Haan이나 필리제Charles Filige, 세긴Arman Séguin 등은 르푸르뒤에까지 고갱을 따라가 작은 그룹을 만들었는데, 일반적으로 이 르푸르뒤 그룹까지 포함하여 퐁타방파라고 부른다.
인상주의*의 감각주의를 부정하여 사상적 내용을 지닌 주제를 회화 본래의 이차원적 표현 속에서 조형화하려 한 그 의도는 근대 회화의 선구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다.

퐁텐블로파

퐁텐블로파 École de Fontainebleau(프)

이 용어는 16세기 프랑스의 퐁텐블로 성과 관련되어 하나의 양식으로 함께 작업한 일군의 작가들을 말하며 1차와 2차로 나뉜다.
프랑수아 1세는 스스로 학문과 예술을 장려한 위대한 이탈리아의 왕들에 뒤지지 않도록 국가 차원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예술을 부흥,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퐁텐블로 궁을 전면 개축하는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는 그의 장엄한 계획을 실현할 미술적 전통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거장들을 불러왔으며, 이에 따라 1528~1558년 30여 년에 걸친 작업이 전개되었다.
퐁텐블로 궁에서 작업한 2명의 가장 탁월한 이탈리아 미술가는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와 프리마티치오Francesco Primaticcio(1505~1570)였다. 이들은 각각 1531년과 1532년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피오렌티노는 1540년 사망시까지 줄곧 종사하였다.
피오렌티노는 <프랑수아 1세의 갤러리>에서, 프리마티치오는 <대접견실>과 <에탕프 공작부인의 방>에서 자신의 양식을 프랑스 궁정의 우아하면서 세련된 취향에 맞추는 데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과 프랑스와 플랑드르 미술가들의 결합은 특별한 매너리즘* 양식을 탄생시켰고, 이는 감수성과 예민한 장식적 감각 그리고 여성적인 관능미와 창백함 우아함으로 대별된다. 많은 고부조의 스투코*들이 장식되었으나 특히 피오렌티노는 가죽이나 양피지 같은 모양으로 틀을 만드는 특이한 모티브*를 창안해냈으며, 이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대중적인 장식적 형태가 되었다.
프리마티치오의 독특한 인물, 즉 사지가 길고 얼굴이 작으며 날카롭고도 우아한 형태의 인물들은 사실상 16세기말까지 프랑스 미술에서 하나의 전형(典刑)이 되었다.
퐁텐블로에서 작업하던 다른 이탈리아 미술가들로는 아바테Niccolò dell’ Abbate(1509~1571)와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1500~1570)가 있었으나 한편 뛰어난 벽화 <사냥꾼 다이아나>(1550)에서 보듯이 알려지지 않은 미술가들에 의한 작품도 많이 있다. 신화적인 주제, 길게 늘어진 우아함, 목가적인 풍경의 배경, 복잡한 기교의 인공적인 분위기 등이 퐁텐블로파 작품의 전형적 특성들이다.
제2차 퐁텐블로파는 종교전쟁(1562~1598)으로 단절이 있은 이후, 앙리4세의 후원으로 작업한 작가들이다. 뒤부아Ambroise Dubois, 뒤브레이으Toussaint Dubreuil(1561~1602), 프레미네 Martin Fréminet를 중심으로 많은 플랑드르 미술가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은 17세기로 향하는 중개자로서 힘찬 양식으로 1620년경까지 이어갔으나 제1차 작가군들이 보여주었던 창조적인 탁월함은 지니지 못하였다.

퐁피두 센터

퐁피두 센터 Centre Georges Pompidou(프)

파리의 중심지역인 보부르에 자리잡고 있는 예술, 문화 활동의 다양한 기능이 종합된 초현대식 건물. 피아노Renzo Piano와 로저스Richard Rogers가 공동설계를 맡고 1977년에 개관한 이 건물은 설립 초기 제련소나 정유공장 같은 직선적 강철제의 구조와 청색과 적색의 울긋불긋한 설비로 충격을 주었다.
정식 명칭은 국립 조르주 퐁피두 예술 문화 센터Centre National d’Art et de Culture Georges Pompidou. 1971년에 시공하여 1977년에 완공될 때까지 문화의 중앙집권화와 정보의 자본주의적 집중의 기준점 등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문화행정의 한 고리로서 미술뿐 아니라 문화정보의 수집과 분류, 재생산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파리의 중요한 관광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표현

표현 表現 expression(영) Ausdruck(독)

예술 창작의 근본 작용으로 포화된 감정이 통일적 직관 형태를 산출하는 것. 여기엔 다음 두 가지 계기가 포함된다. ①표출(Ausdruck) 즉 주관적 감정을 객관화하는 작용 ②묘사(Darstellung) 즉 내적 표상이 지각되는 형태를, 통일적 형식* 법칙을 가진 작품으로 나타내는 것. 따라서 소재를 내면 형식에 따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리오 히른Yriö Hirn처럼 표출을 예술 활동의 본질로 보는 입장도 있으나, 본래 이는 일반 심리학적인 인간 공통적인 계기이므로 예술 특유의 동인(動因)은 오히려 묘사에서 구해야 한다. 그러나 묘사 또한 표출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단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구체적인 창작 활동에서의 표출은 묘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체험은 예술적 형식 속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현대의 미학이나 예술학에서는 우티츠Emile Utitz, 콘Jonas Cohn, 뮐러-프라이엔펠스Richard Müller-Freienfels 등과 같이 예술적 체험의 ‘표출’과 여기에 예술적 형식을 부여하는 형성*과의 통일*을 중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크로체Benedetto Croce(1866~1952)처럼 주관적인 것을 직접적인 객관화로 표출하는 것을 정신적 통일의 내면적 기초로 보는 학설에서는 이를 직관과 동일시해 예술의 본질적 계기로 삼는 입장도 있다.

표현주의

표현주의 表現主義
Expressionismus(독)

미술사*와 미술비평*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 미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며, 르네상스* 이래 유럽 미술의 전통적 규범을 떨쳐버리려 했던 20세기 미술 운동 중의 하나.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이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회화의 선, 형태, 색채 등은 그것의 표현가능성만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성(구도)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개념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무시되었으며, 왜곡*은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표현주의가 명확하게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905년경 부터이지만, 1880년대부터 그 전조가 나타났다. 표현주의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다른 나라에서도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다. 특히 독일의 경우, 1933년 나치의 탄압으로 해체되기 전까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표현주의가 발전했다.
표현주의는 야수주의*, 초기의 입체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연의 모방을 거부한 다른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비평가들이 1911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러나 이 용어를 그뤼네발트Mathis Grünewald(c.1470~1528)나 엘 그레코 El Greco(1541~1614) 같은 화가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용어 사용에 약간의 혼란을 가져왔고, 더 넓은 의미로는 낭만주의*나 바로크*와 유사한 미학, 비평 용어로 통용되기도 했다. 19세기말 이전엔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구성의 조화가 감성적인 메시지의 명료한 전달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 규범(관습)의 완전한 파괴는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는 ‘표현주의’와 20세기 예술의 한 경향으로서의 ‘표현주의’는 구별되어야 한다.
20세기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와 고갱Paul Gauguin(1904~1948)을 선구로 한다. 비록 반 고흐가 스스로 인상주의 전통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고 인상주의자의 밝은 색채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그의 감성적, 상징적 특성은 색채를 단지 빛을 표현하는 것에만 한정하지 않고 미술가가 대상에 대해 느낀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는 더 적극적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데 있다.
고갱은 엄밀한 의미에서 표현주의자는 아니지만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표현주의의 중요한 요소가 된 상징주의의 규범을 명확하게 받아들인 최초의 화가였다.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의 영향을 받은 고갱은 모든 형태를 단순화, 평면화시켰고 사실주의*와 유사성이 없는 색채를 사용했다. 또한 유럽 도시문명에 염증을 느낀 고갱은 이후 표현주의자들이 열중하게 된 원시 미술이나 민속 미술*에 관심을 기울였다.
반 고흐와 고갱을 이미 알고 있던 노르웨이 태생의 뭉크Edvard Munch(1863~1944)는 불안, 공포, 애정, 증오와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한 화가로서 표현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선구자 중 한 명이다. 자신의 강박관념을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한 뭉크의 작품은 특히 독일 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그로테스크*하고 끔찍한 가면을 이용해 인간의 본성 속에 잠재된 비열함을 그린 벨기에 태생의 앙소르James Ensor(1860~1949)와 독일 표현주의에 영향을 미친 스위스 태생의 호들러Ferdinand Hodler(1853~1918)도 표현주의 초기의 대표적 작가이다.
표현주의 그룹은 1905년 독일과 프랑스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야수주의는 반 고흐와 고갱의 이론을 그들의 회화에 결합시켰는데, 1908년 그들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추구하는 것은 표현이다. 색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표현을 도와주는 것이다. 가을 풍경을 그리기 위해 나는 어떤 색채가 그 계절에 적합한 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쓸 것이다. 나는 계절이 주는 감각에 의해서만 영감을 얻는다.”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는 이러한 생각을 인물화*에도 적용했다.
마찬가지로 드랭André Derain(1880~1954)은 풍경화*에, 루오Georges Rouault(1871~1957)는 강렬한 힘과 단순성에 의한 새로운 종교 회화에 이것을 적용했다. 그러나 1907년 이후 입체주의가 유행하면서 야수주의의 활동은 퇴색했다.
1905년 드레스덴에서 다리파*가 결성되었고, 1906년 이들의 첫 전시회가 열렸다. 구성의 조화와 장식성을 유지했던 야수주의와 달리 다리파는 형태와 색채의 왜곡을 통해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과 창작에의 열망을 표출하였다.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는 1913년 “우리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순수한 창조적 충동을 유발하는 모든 색채를 수용한다”라고 말했다.
1911년 마르크Franz Marc(1880~1916)와 러시아 출신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등은 청기사* 그룹을 조직해 같은해 뮌헨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다. 칸딘스키가 1911년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를 쓴 것을 비롯, 청기사 그룹의 미술가들은 더욱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제작했으며 후배 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칸딘스키나 클레Paul Klee(1879~1940) 같은 화가들이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제1차세계대전 후 표현주의는 독일을 풍미하게 되었다. 프랑스 표현주의는 꿈 속의 장면을 그린 마르크 샤갈Marc Chagall(1887~1985)이나 격한 감정을 표현한 수틴Chaim Soutine(1894~1943)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클림트Gustave Klimt(1862~1918)와 코코슈카Oskar Kokoshka(1886~1980), 쉴레Egon Schiele(1890~1918)도 표현주의자로 간주된다. 신즉물주의*로 알려진 독일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전개한 그로츠George Grosz(1893~1959)와 딕스Otto Dix(1891~1969)는 초기 표현주의에서 고안된, 왜곡과 과장이 심한 작품을 그렸다.
표현주의의 여러 특징은 현대 미술에서도 많이 추구되고 있다. 타시슴*과 추상표현주의*는 표현주의의 직속 후예라 할 수 있으며 많은 그룹들이 야수주의와 다리파의 방법을 지금까지도 따르고 있다.

푸라나

푸라나 Purāna(범)

‘고대의, 전설적’이라는 뜻을 가진 말로 고대의 이야기나 역사를 의미한다. 특히 신들의 계보나 고대 인도 왕조들에 관한 일들을 기록한 운문 형식의 특정한 문헌으로서 힌두교의 경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인도의 초기 역사시대를 기록하고 있으나 그 후로도 계속 내용이 첨가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초기 푸라나들은 굽타 시대*인 4~5세기경에 지금의 원형을 갖추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18개의 주요 푸라나가 있으며 세계의 주기적인 창조와 해체, 신들과 성인들의 계보, 인류의 시조인 마누Manu와 대홍수, 왕들의 계보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푸라나에는 크리슈나*를 비롯한 수많은 힌두신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기술되어 있어서 힌두교 미술*을 해석할 수 있는 도상학*적인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시바*와 비슈누*신에 대한 숭배가 푸라나를 통해 대중화하게 되었으며, 그 중 《비슈누 푸라나Visnu-purāna》와 《바가바타 푸라나Bhāgavata-purāna》는 비슈누신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