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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반

화반 花盤

한국 전통 목조건축물에서 창방 위의 포벽 중간에 얹어서 주심도리밑 장여*를 받치기 위해 화분, 연꽃, 사자 등을 그려 끼우는 널조각. 복화반은 화반의 모양이 아래쪽이 넓고 위쪽이 좁은 것을 일컫는다.

화보

화보 畵譜

중국화의 각종 기법을 종류별, 계통별로 편집한 책. 중국의 판본기술이 확립된 송대(宋代)부터 화가나 문인이 그림을 배우는 입문서로서 생겨났다. 화보라는 말은 북송北宋 선화 연간(宣和)에 나온 《선화화보*》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보는 《선화화보》와 같이 그림을 곁들이지 않고 문자로만 설명한 것과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와 같이 그림을 곁들여 설명한 것 등 두 종류로 나뉘어진다.
일반적으로는 화법에 대한 도해가 있고 문자로 된 간단한 설명이 덧붙여진다. 그림이 곁들여진 화보로는 남송南宋 송백인宋伯仁(쏭 보르언)의 《매화희신보梅花喜神譜》(1238)가 가장 오래되었다. 북송 이후 사군자* 등이 유행함에 따라 원대(元代)에는 이간李衎(리 칸, 약1260~1310)이 대나무의 생태와 묵죽*(墨竹)에 대한 화법(畵法)을 상세히 도설한 《죽보상록竹譜詳錄》을 발간하여 명성을 얻었다.
명明, 청淸 이래의 화보는 위의 두 화보를 계승한 것으로, 《역대명공화보歷代名公畵譜》 《만소당화전晩笑堂畵傳》 《당시화보唐詩畵譜》 《시여당보詩餘堂譜》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 등이 있고, 화법도해로는 《도회종이圖繪宗彛》 《고송죽보高松竹譜》 《설호매보雪湖梅譜》 《개자원화전*》 등이 있다. 또한 회화이론서이면서도 화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있다. 즉 명대(明代) 당인唐寅(탕 인)의 이름을 따서 편찬한 《당육여화보唐六如畵譜》, 청나라 강희 연간(康熙, 1662~1722)에 편찬된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畵譜》 등이다.

화불

화불 化佛

변화한 부처. ‘응신블(應身佛)’ 또는 ‘변화불(變化佛)’이라고도 한다. 불,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것으로, 작은 여래형(如來形)으로 표현된다. 보통 관음보살과 대일여래는 보관(寶冠)에 화불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광배*에 작은 화불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다.

화사

화사 畵史

중국 북송北宋의 화가 미불米芾(미 후, 1051~1107)이 펴낸 화론서. 그림에 대한 품평서로 《미해악화사米海岳畵史》 《양양화학襄陽畵學》이라고도 한다. 진晉, 육조(六朝), 수隋, 당唐, 오대(五代), 북송北宋에 걸쳐 명화의 우열을 평하였다. 나아가 진위(眞僞)를 평하고 잘못된 점까지 교정하였다. 또 표장(表裝), 인장(印章), 복제(服制), 종이로부터 회화감
상, 수장(收藏)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술하였다. 미불의 자(字)는 원장元章이며 별호(別號)로 해악외사海岳外史, 양양만사襄陽漫士 등이 있다. 송宋 휘종徽宗 숭녕 2년(崇寧, 1103)에 상경하여 궁정에서 수장하고 있는 글씨와 그림에 대한 감정작업을 맡았다.
시, 서, 화(詩書畵)에 능하고 감상에도 뛰어났으며 송대(宋代) 문인화론(文人畵論)의 완성에도 일조하였다. 따라서 이 화론서는 뛰어난 서화가이자 감식자인 미불의 개성있는 미술평론서임에도 불구하고, 문인화가로서의 미불의 심미안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고아하고 청아한 문인들의 작품을 숭상하고, 궁정화가와 같은 직업화가들의 작품은 배척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 밖에 미불의 저서로는 《서사書史》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 시문집(詩文集) 등이 있다. 이중 《서사》는 《화사》와 쌍벽을 이루는 서론서(書論書)로 유명하다.

화사회요

화사회요 畵史會要

5권으로 된 중국 회화화론. 명明 숭정 4년(崇禎, 1631)에 주모인朱謨垔(주 모우인)이 펴냈다. 주모인의 자(字)는 은지隱之, 호(號)는 염원산인厭原山人으로 명나라의 종실(宗室) 출신이다. 이 책의 체제는 도종의陶宗義(타오 쫑이)의 《서사회요書史會要》를 본떠 구성되었다. 주로 《역대명화기*》 《도화견문지*》 《도회보감圖繪寶鑒》 등에서 뽑아 편집하였으며 증보는 매우 적다. 채집한 서책은 화사나 화론서뿐만 아니라 정사(正史), 지방지(地方誌), 별집(別集)에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명대(明代)의 것은 모두 수집하여 후대 고록(考錄)의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송宋, 금金, 원元, 명明의 유명하지 않은 많은 화가들에 대해서도 수록했다. 내용을 보면 제1~4권에는 상고로부터 명대(明代)에 이르는 화가들의 전기를 싣고, 제5권에는 역대의 화론과 화법을 기술하였다.

화산도

화산도 華山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화산은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화음현의 남쪽 진령산맥秦嶺山脈 중에 가장 높은 산으로, ‘태화(太華, 泰華)’라고도 한다.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역대의 천자(天子)가 순행하여 제사를 올린 오악(五岳;泰山 華山 衡山 恒山 嵩山)의 서악(西岳)에 해당한다.
원말명초(元末明初)에 활약했던 왕리王履(우앙 리)는 홍무 16년(洪武, 1383) 가을에 화산을 여행하면서 대자연의 웅장한 풍경에 감동되어, 옛사람의 성법(成法)을 벗어나 자연을 스승으로 삼았다 한다. 이 때 그린 <화산도> 40폭 및 기(記), 시(詩), 서(序), 서(叙) 등 1책이 현존하는데, 일찍이 육치陸治(루 즈)도 이 화책을 임모*(臨摹)하였다고 한다. 명대(明代)의 사시신謝時臣(시에 스츠언)의 <화산선장도華山仙掌圖>(개인소장)와 왕리의 40폭 연작(북경 고궁박물원과 상해박물관에 분장)이 유명하다.

화상

화상 畵商 art dealer(영)

주로 회화를 취급하는 미술상(美術商). 유럽에서 특정한 후원자와 화가 간의 주문생산과 더불어 미술품에 대한 수요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17~18세기경부터 급속히 발달하였다. 19세기 시민사회에서는 예술가와 시민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화상은 때로는 새로운 유파*, 젊고 유능한 작가를 위한 후원자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화상석

화상석 畵像石 hua-xiang-shi(중)

석재에 여러 가지 그림을 선각하거나 얕은 부조*로 조각한 것으로, 주로 중국고대의 묘실(墓室)과 묘 앞의 사당(祠堂), 석궐(石闕) 등의 분묘건축에 장식되었다. 서한西漢 중엽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동한東漢 초에는 하남, 산동, 호북에서 주로 발견된다. 후한後漢 중엽부터 후한 말까지는 산동山東과 남양南陽의 화상석 수량이 급증하는데 기타지역에 영향을 미쳐 지방색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말(漢末) 혼란기에 존재기반이 없어지면서 쇠퇴했다.
화상석에 다양하고 풍부하게 표현된 내용은 대략 몇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①농경, 수렵, 유목(遊牧), 채상(採桑), 방직, 채염(採鹽) 등의 장원경제(莊園經濟)의 생산활동. ②묘주(墓主)의 공적인 사회활동으로 거기출행(車騎出行), 사렵(射獵), 알현(謁見), 속리(屬吏;지위가 낮은 관리), 수조(收租), 강학(講學) 등. ③묘주의 일상생활. 한거(閑居), 연음(宴飮), 빈객(賓客), 포주(庖廚), 백희(百戱), 박혁(博弈;장기와 바둑, 노름) 등의 내용. ④역사고사와 역사인물상으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한 이야기,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공자와 그 제자, 열녀, 효자 등의 이야기 등. ⑤신화고사(神話故事)와 상서로운 물상 및 천상도(天象圖)로서 서왕모(西王母), 후예사일(后羿射日), 복희(伏羲), 여와(女媧), 용*(龍), 우인(羽人), 옥벽(玉璧), 선초(仙草) 등 신과 신격을 가진 물상이나 인간과 천계의 사자(使者). 이는 천인합일(天人合一)하는 우주관과 신선방술사상을 보여준다. 동한대에 이르러 참위(讖緯)사상이 범람하자 이런 내용이 증가했다.
화상석은 전국시대의 목곽묘(木槨墓)가 한대 전실묘(磚實墓)로 변화하면서 생겨난 후장(厚葬) 풍속의 산물로서 사후에 영혼의 승천을 바라는 염원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묘실은 묘주생전의 환경을 축소한 일개의 우주와 동일한 공간으로 죽은 후 재생한다는 관념이 합해져서 묘 안에 화상석이 점차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 화상석의 표현방식은 평면적이고 층을 상하로 나누어 배치하며 공간감이나 화면의 깊이가 없는 개념적인 공간 속에 표현되었다. 형상은 윤곽선을 강조하고 윤곽선 안에 선조로 표현하는 예가 많으며 음각선이나 부조*(浮彫), 투조(透彫), 양각(陽刻) 등을 두루 사용하는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는 얕은 부조와 바탕면을 깎아내고 음각선을 사용했다.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부근에서 출토되는 화상석은 다른 지역의 것과 다소 양식이 다르고 낙산樂山 마호애麻浩崖의 애묘(崖墓)에서는 조기의 불상*(佛像)이 보인다. 한 이후 남북조(南北朝)시대에도 만들어져 《효자전도孝子傳圖》가 유명하며 석관에 조각한 예도 상당히 많다.

화상전

화상전 畵像磚
hua-xiang-zhuan(중)

흙으로 만든 벽돌(磚)의 표면에 형틀 등으로 선각 또는 부조풍의 그림을 찍거나 그린 전돌. 채색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 전돌무덤의 시작은 전국시대 후주後周에서부터이고 전돌 내부가 빈 대형의 공심전(空心磚)은 한대(漢代) 이전부터 만들어졌다. 공심전은 두 개의 직사각형의 틀로 뜬 후 합쳐서 굽는 것으로 한대 이전의 목곽묘를 대체한 것이다.
동한東漢 초까지의 공심전은 주로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정주鄭州 부근에 군집되어 있다. 공심전 무덤은 동한 초까지 작은 전돌로 대체되면서 중국, 한국, 만주 등으로 확산되었다. 화상전은 위진, 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 이후까지 계속 제작되었고, 장식문양은 시대별로 다르다. 한대 이전에는 주로 기하학적 문양이 주를 이루다가 한대에는 요리, 사냥, 연회, 곡예, 서수(瑞獸), 문루(門樓) 등의 다양한 장면이 찍혀지거나 그려졌다.
동진東晋 이후 당초문*과 인동문*, 연화문* 등이 4세기경 남조(南朝)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이후 남북조시대에 성행했다. 대체로 한 개의 전돌에 하나의 그림을 표현하지만 때로는 여러 전돌을 합쳐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표현법도 등장하는데 5세기 무렵 남경南京의 죽림칠현묘(竹林七賢墓)와 호교묘(胡橋墓), 서선교(西善橋)의 근교묘에서 발견된다. 또한 하남성의 등현묘(鄧縣墓)에는 상산사호商山四皓나 노래자老萊子, 곽거郭巨 등의 고사 인물 뿐만 아니라 행렬, 서수(瑞獸), 문지기, 연화문 등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이 화상전에 장식되어 있다.

화우

화우 畵牛

화조 영모화*의 한 화제(畵題). 농경사회였던 동양에서는 소가 풍요(豊饒)와 다산(多産)을 상징하여, 오랜 역사동안 중심화제로서 그려졌다. 암각화(岩刻)나 도자기 그림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회화적 가치가 풍부한 소 그림으로 이른 시기의 것은 당대(唐代) 초기 이수묘(李壽墓)의 벽화*가 있다. 당대 중기(8세기 후반)에는 대숭戴嵩(따이 충)과 같은 소그림 전문 화가가 출현하기도 했다. 대숭은 전원 풍경 속에 노니는 물소를 그렸는데, 이것은 강남지방의 풍물로서 화북의 말 그림(화마*)에 필적되는 것이었다.
남송南宋 때에는 선종화*(禪宗畵)가 성행하였는데, 다양한 선종화의 소재에는 수행자의 향상 단계를 상징한 <십우도十牛圖> 혹은 화면에 자성자목(自性自牧)의 뜻을 부여한 소 그림이 많이 있었다. 남송 화원(畵院) 화가들도 소 그림을 많이 그려 이당李唐(리 탕), 이적李迪(리 띠), 염차평閻次平(이엔 츠핑) 등이 유명하였다.
한국에서는 조선시대에 소그림이 성행해 김시金禔의 <와우臥牛> <황우黃牛> 등이 남아있다. 김시의 소그림은 남송대 선종화의 영향도 있으나, 구도나 필법 등에 특유의 한국적 정취가 잘 표현되어 있어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시의 화풍은 이경윤李慶胤, 이징李澄, 손자인 김식金埴, 윤두서尹斗緖에까지 이어져, 소를 표현하는 기본화풍으로 정착되었다.
조선시대의 화가들은 현실적인 소를 소재로 그리면서도, 소를 통해 도가적(道家的) 삶에 대한 동경심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즉 자연을 벗삼아 은일자적하기를 염원하였던 문인들은 소가 지니고 있는 자적함과 평화로운 분위기에 자신의 마음을 의탁하여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경윤이 그린 <기우취적騎牛吹笛>, 김식의 <우도牛圖> <고목우枯木牛> <수하모우樹下母牛>, 윤두서의 <와우臥牛>, 조영석趙榮祏의 <우도牛圖>(밑그림)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