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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회화적 추상

후기회화적 추상 後期繪畵的抽象
Post-Painterly Abstraction(영)

‘회화적 추상 이후의 추상’으로도 불린다. 1964년 미국의 평론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스스로 기획한 전시회에 붙인 이름이 일반화된 것. 여기에서 회화적*이란 독일의 미술사학자 뵐플린Heinrich Wölfflin(1864~1945)의 개념을 원용한 것이다. 뵐플린은 ‘회화적’이라는 개념을 바로크 미술*에 대해서 쓰고 있으나, 그린버그는 이 개념을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등의 추상표현주의*에 대해서 쓰고 있다.
탈회화적이란 색채의 명암의 대조*가 강하고, 터치*나 페인트가 뜨겁게 교차하는 추상표현주의의 다음에 일어난, 차가운 추상 계열의 작품을 가리킨다. 즉 ‘회화적’이었던 추상표현주의를 정리하고 초월하는 새로운 회화란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폴록이나 드 쿠닝을 무조건 비판의 목표로 삼거나, 추상표현주의의 중핵을 차지하고 있는 액션 페인팅*을 부정적으로 승계하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액션 페인팅이 지니고 있는 우연성을 미학적으로 순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다.
따라서 루이스Morris Louis,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 젠킨스Paul Jenkins, 올리츠키Jules Olitski, 놀랜드Kenneth Noland, 켈리Ellsworth Kelly, 스텔라Frank Stella, 영거맨Jack Youngerman, 핼드Al Held, 푼즈Larry Poons 등으로 대표되는 이 계열의 추상은 명확한 형태를 지니고, 명도 높은 맑은 색면에 의해 구성되며, 작가의 개성적 표현은 가능한 한 억제시킨 것이 특징으로 주로 하드엣지* 계열의 표현 경향이다.

후소회

후소회 後素會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문하생들이 1936년에 발족한 동양화 그룹. 후소회는 공자孔子의 《논어論語》 중에 나오는 ‘회사후소(繪事後素)’에서 유래하였다. 주로 김은호의 화숙에서 수학한 백윤문白潤文, 김기창金基昶, 장우성張遇聖, 이유태李惟台, 조중묵趙重顯, 한유동韓維東에 의해 정기적인 동문전 개최로 친목을 도모한 1930년대의 의욕적인 청년화가의 모임으로, 1943년까지 총 6회의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해방된 뒤에도 1950년과 1971년, 그리고 1984년에 총 3회의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후스마에

후스마에 襖繪(일)

→ 장벽화

후지와라시대 미술

후지와라시대 미술 藤原時代美術

→ 헤이안 후기 미술

후진

후진 後陣 chevet(프)

고딕* 양식의 건축에 있어서 내진*, 애프스*, 회랑*과 함께 흔히 방사형 예배당을 갖고 있는 성당의 돌출한 동쪽 끝 부분을 말한다.

훼룡문

훼룡문 虺龍文 hui-long-wen(중)

중국 은殷, 주周 시대의 청동기에 장식된 용문(龍文)의 일종. 구불구불한 몸체와 말린 꼬리로 서로 얽힌 뱀같은 형상으로 표현되거나 조합되어 기하학적인 문양을 이루기도 하며, 기물(器物)의 몸체에 가득 시문되는 경우도 많다. 대체로 C자형의 곡선이 연속되거나 반전된 모습의 체구에 유절(瘤節)의 돌출부가 덧붙은 형태가 특징적인 훼룡문은 중국고대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시적인 동물문이다. 이러한 훼룡문은 전국시대에 외부에서 유입된 당초문*(唐草文)의 영향으로 유연하게 연결된 파상(波狀)의 용문(龍文) 내지 운기문*(雲氣文)으로 변화했다는 견해가 있다.

휴머니스트 아트

휴머니스트 아트 Humanist Art(영)

미국에서의 휴머니스트 아트 주창자인 슈와르츠Barry Schwarts는 기술과 인간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모든 예술을, 인간 존재와 환경의 점증하는 기계화에 동조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비휴머니즘적 예술과 휴머니즘적 예술로 구분한다.
그는 휴머니스트 아트를 형이상학적인 것, 실존적인 것, 부조리한 것, 정치적인 것의 네 가지로 구별한다. 형이상학적 휴머니스트는 상징적인 효력을 가지는 작품을 창작한다. 그는 관람자를 작품에 대한 해석으로 끌어들인다(바스킨Leonard Baskin, 에버굿Philip Evergood, 시걸George Segal). 실존적 휴머니스트는 반응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관람자와 마주서는 이미지를 창출한다(핸슨Duane Hanson, 베이컨Francis Bacon, 브래트비John Bratby). 부조리주의자들은 혐오-호기심의 메커니즘을 채용한다(크럼Robert Crumb, 너트Jim Nutt, 닐슨Gladys Nilsson). 정치적인 휴머니스트는 관람자가 가지는 억압과 투쟁의 감정과 접촉하고자 한다(벤 샨Ben Shahn, 핸슨Duane Hanson, 키엔홀츠Edward Kienholz, 스티븐스May Stevens).
모든 구상예술이 휴머니스트 아트는 아니지만, 휴머니스트 아트는 추상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구상적이다. 슈와르츠는 사회에 대한 절망이나 환멸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에 대한 체험이 관람자의 사회적 의식을 개선할 것이라는 자신의 가정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낙관주의는 거짓’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그는 예술의 변혁적 잠재력에 대한 뚜렷한 낙관적 믿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기술이 실제의 힘으로 간주되는 구소련에서는, 예술에 있어 휴머니즘의 사도는 지멘코Vladislav Zimenko이다.
그는 예술의 휴머니즘적 본질-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묘사하는 것-을, 동굴 벽화에서 시작되는 휴머니스트 아트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공식적인 소비에트 미학 원칙과 동일시한다. 지멘코가 예찬하는 작가들은 데이네카A. Deyneka, 플라스토프A. Plastov, 이오간손B.Ioganson, 이바노프V. Ivanov, 질린스키D. Zhilinsky 등이다.

흉상

흉상 胸像 bust(영)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상반신을 다룬 조상(彫像). 흉상의 역사는 초상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후 세계를 믿었던 이집트 인들은 여러 선명한 색을 사용해 죽은 사람의 흉상을 만들었지만 예술 작품을 유기체로 본 고대 그리스 인에게는 인체를 절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신체의 일부를 나타내는 흉상은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그러다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흉상이 다시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흉상은 눈먼 ‘호머’의 초상에서와 같이 이상화된 형태와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 미술에서와 같이 사실적인 형태가 공존한다. 로마 시대에 흉상은 최전성기를 맞아 공화정 초기부터 정교하고 다양한 창의적인 흉상이 많이 제작되었다. 초상 미술을 금기시한 중세에는 흉상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유골함에 값비싼 금속으로 성자들의 모습을 조각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르네상스*, 특히 15세기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매우 사실적인 것에서부터 형식에 치우친 이상화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전의 흉상을 부활시켰다. 16세기에는 로마 제정 후기의 정교한 흉상을 모방했으며, 바로크* 시대에는 새롭고 화려한 형태로 발전했다. 그 후로는 형태상의 변화는 거의 없으나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흉상같이 단순한 형태로 되돌아갔다.
19세기와 20세기에 와서 로댕Auguste Rodin(1840~1917), 데스피오Charles Despiau(1874~1946)와 엡스타인Jacob Epstein(1880~1959) 같은 미술가들이 흉상을 제작했으나, 인물의 성격 묘사에 치중해 전통적 형태에서 멀어졌다. 현대에는 학구적인 조각가들에 의해 흉상은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흉중구학

흉중구학 胸中丘壑

‘마음 속에 언덕과 골짜기의 심상(心象)이 있다’는 동양회화 용어. 여기서 구학, 즉 언덕과 골짜기는 속세를 떠난 이상향이라는 의미이다. 산수를 심상으로 구상하고 파악함으로써 참다운 산수화*를 그려낼 수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곽희郭熙(구어 시)는 《임천고치*》에서 “임천(林泉)을 동경하는 마음이나 연하(烟霞)와 벗삼으려는 생각은 꿈 속에서나 있을 뿐이요, 생생한 현실에서는 단절되어 있다. 이제 묘수를 얻어서 생생하게 이를 표현하면 집과 뜰을 벗어나지 않고서도 임천과 골짜기를 오르내릴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그림 속의 산수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의 본의라 하겠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반드시 자연을 접하면서 의(意)를 널리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즉 마음껏 즐기고 본 산수는 모두 ‘흉중에 역력히 늘어서게 될’ 뿐만 아니라, ‘산수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과 마음속에 저절로 떠올라서 그림으로 그려지게 된 경지’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산수화라는 것이다. 곽희가 살았던 송대(宋代)에는 자연의 형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보다는 자기의 예술관에 입각해 자연을 미화시키는 이상화를 중요시했다.
산수화 제작시 사의성(寫意性)의 기초인 ‘흉중구학’을 통해 산수의 이상적 경지를 추구하였다. 실제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경험하고 터득한 산수자연을 소재로 한 후 그림의 의취를 살려 표현해야 한다는 이론은 산수화를 사의*적 개념과 형사*적 개념으로 조화시켜 이상화시키는 데 공헌한 것이다. 이러한 이론은 곽희를 필두로 하여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의 산수화론 등에 계승되었다.

흑도

흑도 黑陶 bei-tao(중)

중국 신석기시대에 채도에 이어 나타난 토기*로, 용산문화*(龍山文化)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고운 태토를 사용하고 물레로 성형하며 구울 때 통풍이 안되는 환원염으로 번조하므로 태토의 철분이 환원되어 회색이 되고 마지막에 연기를 내어 그을리게 하여 탄소의 미립자를 태토에 스며들게 한 후 문지르면 검은 광택이 나는 표면이 만들어진다. 그릇형태는 변화가 많으며 얇게 성형된 것은 특히 ‘난각(卵殼)토기’라고 부른다.
이러한 예는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양자강 도작(稻作)문화에 널리 파급되었고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나 후기의 양저문화(良渚文化)에는 두꺼운 흑도가 있다. 춘추전국(春秋戰國)~진한(秦漢)시대까지 존속하고 감숙성甘肅省의 제가문화(齊家文化)나 하남河南, 섬서성陝西省에 흑도의 용*(俑)이나 기물(器物)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