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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렛파

나자렛파 Nazarener(독) Nazarenes(영)

19세기초에 형성되었던 독일 화가의 한 파. 빈의 아카데미 학생인 오베르베크Johan Friedrich Overbeck 및 프포르Franz Pforr가 중심 화가였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예술이란 본디 창조적인 성질의 것이 아닌 종교적인 관념 표출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 일파의 화가들에 대해 이른바 ‘나자렛파’라는 별명이 붙여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은 1809년 빈에 ‘성 루카 조합Lukasbund’을 창설하였으며, 당시의 고전주의적 풍조에 반대하고 로망파 문학자들의 사조에 공감하였다. 이듬해인 1810년 오베르베크와 프포르는 활동 무대를 로마로 옮겼으며, 그 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코르넬리우스Peter von Cornelius(1783~1867), 카롤스펠트Julius Schnorr van Carolsfeld, 샤도Wilhelm von Schadow(1788~1862) 등 다수의 화가들이 이 그룹에 가입하였다.
나자렛파는 핀치오 언덕의 시드로 수도원에서 수도사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면서 새로운 종교화의 이상 실현을 지향하는 작품 제작에 전념하였다. 점차 가톨릭의 교의를 받들고 또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페루지노Pietro Perugino(1445~1523)와 안젤리코Fra Angelico(c.1395~1455) 등의 종교화에 심취하였다.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는 로마 바르톨디Casa Bartholdy의 벽화 <성요셉전>(1816~1817)과 마시모Casino Massimo의 벽화가 유명하다.

나전칠기

나전칠기 螺鈿漆器

옻칠한 그릇이나 가구의 표면 위에 광채나는 야광패(夜光貝)나 전복조개 등의 껍질을 여러가지 문양으로 박아넣어 장식한 칠기*. 제작과정은 우선 조개 껍질을 숫돌로 얇게 갈아서 줄로 썰고 무늬에 맞게 끊음질을 한 후 바탕나무에 생칠을 한다. 칠과 토분을 이겨서 표면에 고루 바르고 밑그림에 따라 활질로 자개에 구멍을 뚫고 실톱으로 무늬를 오린 후 종이본에 붙인다. 그것을 바탕나무 위에 인두로 눌러붙인 다음 종이본은 떼어내고 옻칠을 더한다. 남아 있는 칠은 긁어내고 인두로 마름질을 하고 광을 내면 완성된다. 문양을 내기 위해 나전을 잘라내는 방법은 주름질(자개를 문양 형태로 오려내는 것), 이음질(문양구도에 따라 주름대로 문양을 이어가면서 나타내는 것), 끊음질(자개를 실같이 가늘게 썰어서 문양부분에 모자이크 방법으로 붙이는 것)이 있는데 끊음질이 주로 사용되었다.
나전기법은 중국 주대(周代)부터 이미 유행했고 당대(唐代)에 성행하여 한국과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전래 초기에 주로 백색의 야광패를 사용하였으나 후대에는 청록 빛깔을 띤 복잡한 색상의 전복껍질을 많이 사용하였다. 나전칠기로 현존하는 한국의 유물은 12세기 이후의 것으로 고려시대의 경함(經函)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의함(衣函)과 문서함(文書函)부터 장롱까지 제작하였다.

→ ‘고려나전칠기’ 참조

나체화

나체화 裸體畵 nude painting(영)

인간 또는 신, 악마 등의 인간적인 모습을 나체로 표현한 회화. 자연의 대상물 중에서 가장 자아에 가까운 존재로서의 인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하여 옛날부터 그려져 왔다. 민족, 풍습, 시대 등에 따라 그 성립과 양식이 다르지만 나체의 미묘한 선이나 면, 각 부분 간의 비례, 피부의 색조 변화, 육체의 양감 등의 미적 요소를 통일하여 유기적 생명을 표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고대에서는 그리스 시대나 르네상스 시대에 나체 표현이 존중되었으며, 특히 인상주의* 이후 나체를 다룬 회화들이 많이 그려졌다.

나치미술

나치미술 Nazi Art(영)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초상화들로 히틀러의 권력과 권위를 확고하게 한 나치 시대의 미술경향. 감수성, 독일 병정의 영웅주의, 땅과 소작인, 아리안 남녀의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나체를 찬양하였다. 문화적 무기로서 예술의 중요성을 이해한 나치 지도자들은 예술가들을 고무시켰으나,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예술은 억압하였다. 따라서 표현주의*와 추상미술* 작가들은 ‘타락한 유태인이자 볼셰비키’로 여겨져 추방되었다. 조각과 건축에서는 신고전주의*가, 회화에서는 사회적 리얼리즘*의 형태를 띤 양식이 용인되었다. 호르매츠Bess Hormats는 ‘1930년대와 1940년대 독일 예술에서 나치 미술이 차지하는 비율은 적었고, 보수적이고 아카데믹한 예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적인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예술을 통해 나치즘을 반대하지도 않았고, 나치들이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예술을 억압함으로써 오히려 혜택을 누렸다. 나치즘에 동조했던 표현주의 작가 놀데Emil Nolde(1867~1956)가 나치에 의해 제작을 금지당했던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주요 나치 미술가로는 스피어Albert Speer, 트루스트Rudwig Troost, 살리거Ivo Saliger, 파두아Paul M.Padua, 슐트Johannes Schult, 파이너Werner Peiner, 치글러Adolf Ziegler 등이 있다.

나타라자

나타라자 Natarāja(범)

춤의 제왕인 시바*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힌두교의 대표적인 신상*(神像)이다. 특히 인도의 촐라왕조* 시대에는 청동상으로 많이 제작되었는데, 나타라자는 시바의 우주적인 기능, 즉 파멸과 창조의 모습을 하나의 이미지에 응축시킨 도상*(圖像)으로 해석되고 있다. 시바의 탄다바Tandava 춤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시킬 때 추는 것으로서 나타라자는 시바의 창조, 유지, 파멸이라는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남인도 지역의 춤 자세에서 연유된 이 형태는 각각 도상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북은 시작을 의미하는 창조를, 왼손에 든 불꽃은 파괴를 의미하는 세상의 종말을, 시무외인을 한 또 다른 오른손은 구원을 뜻한다. 또한 아이를 밟고 있는 오른발은 안정을, 들고 있는 왼발은 휴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타라자는 청동상 이외에도 사원의 벽면을 장식하는 부조*로 많이 표현되었다.

나한

나한 羅漢 arhat(범)

불교의 수행을 완성하여 공양, 존경을 받을 만한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고, 응공은 모든 번뇌를 끊고 도덕을 갖추었으므로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뜻이다. 나한은 소승불교에서 수행의 가장 높은 지위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자로서 부처가 열반했을 때 그 법을 전수받아 보호하고 지키는 수행자의 역할을 한다. 처음에는 부처에게 직접 설법을 들은 불제자를 뜻하였으나 점차 일정한 수행을 쌓고 덕을 갖추게 되면 나한으로 불려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양과 공경을 받게 되었다.
나한상은 육조(六朝)시대부터 그림으로 그려졌고, 당대(唐代)에는 현장玄裝에 의해 《법주기法住記》가 번역됨으로써 십육나한의 신앙이 시작되었다. 그 뒤 십팔나한, 오백나한을 비롯하여 중국적 해석에 의해 여러 가지 변화형식이 생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석가모니의 십대제자를 비롯, 십육나한, 오백나한이 주로 나한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낙관

낙관 落款

그림의 화면 일정부분에 도장이나 글씨 등을 쓰는 것.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준말로 낙관낙인(落款落印)이라고도 한다. 서화(書畵)를 마무리한다는 의미로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쓰고 글이나 인장(印章)을 찍는 행위를 말한다. 제작연도나 계절, 일시, 제작장소 등이 첨가되는 경우도 많다. 중국 원대(元代)의 예찬倪瓚(니 짠, 1301~1374)이 자신의 그림에 도장을 찍었던 것에서부터 유래하며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 이래로 많이 사용되었다. 낙관을 하는 것이나 낙관이 유행하는 것 모두가 화가의 지위 향상을 반영한다.

→ ‘관’ 참조

낙랑 미술

낙랑 미술 樂浪美術

낙랑은 중국 한漢의 무제武帝가 원봉 3년(기원전 108)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중의 하나다. 현재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하나, 설치 당시의 강역은 위만조선의 옛땅을 중심으로 하여 대체로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단이 낙랑군의 영역이라고 추측된다. 낙랑군은 한사군 중에서 위치를 변동하지 않고 한곳에 줄곧 자리잡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동방군현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한사군의 400여년에 걸친 통치는 낙랑 중심의 지배를 뜻하므로, 고조선 문화가 일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대체적으로는 한문화의 연장으로 생각된다.
건축:평안남도 대동군 대동면 토성리와 용강의 어을동 등지의 토성이 있다. 토성리의 토성은 길이 약 709m, 남북길이 599m의 소규모로서, 그 내부에는 약간의 건물지, 포도구지(鋪道溝址)가 있다. 어을동 고성은 토성의 가장 긴 면이 150m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의 읍성이다.
공예:금속공예로는 대동강면의 제9호분에서 출토된 박산향로*(博山香爐), 용호경(龍虎鏡), 금수경(禽獸鏡),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등 한대(漢代)의 대표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청동경 등이 있다. 또한 금지환(金指環), 은지환(銀指環), 금천(金釧) 및 순금제대구(純金製帶鉤)가 출토되었다. 이 중 제9호분에서 출토된 순금제대구는 순금판 위에 7마리의 용을 누금세공*기법으로 새기고 녹색 보석을 삭감한 작품이다. 목공예 유물로는 칠기*(漆器)류가 대량으로 출토된 바 있다. 칠기류에는 안(案), 반(盤), 배(杯), 우*(盂) 등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제9호 묘에서 출토된 〈금동구칠반金銅鉤漆盤〉, 왕우묘王旴墓의 〈채화칠반彩畵漆盤〉, 채협총출토의 <채화칙협彩畵漆敎> 등을 들 수 있다.

낙서미술

낙서미술 graffiti art(영)

이탈리아어로 ‘긁기’라는 뜻을 지닌 ‘graffito’의 복수형. ‘graffiti’는 벽 표면을 긁어 만든 드로잉과 이미지를 의미한다. 사실 낙서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며 그것은 인류가 문화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행해왔던 생활의 한 흔적이기도 했다. 낙서가 갖는 잠재된 해방감과 제도화된 매체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또다른 비공식 표현매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일찍부터 예술행위의 본질과 어느 부분 연결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낙서가 미술의 주제로 등장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부터이다. 톰블리Cy Twombly(1929~ )와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같은 미술가는 낙서의 표현방법에 관심을 보였고, 프랑스인인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는 아웃사이더 아트*로서의 낙서가 내포한 의미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스페인 출신의 타피에스Antoni Tàpies(1923~ )는 도시의 벽을 주제로 한 이미지에 낙서를 포함시킬 수 있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낙서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1960년대 말이며 특히 뉴욕의 거리에는 구석구석 낙서가 범람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흑인이나 푸에르토리코인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분사식 스프레이 페인트를 통해 극채색과 격렬한 에너지를 지니고, 속도감 있는 그림과 도안화된 문자들을 거리의 벽과 지하철 등에 뒤덮어 갔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낙서가 예술로서 평가받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아트 페스티벌>이 최초였지만, 그 밖에도 몇 개의 중요한 전시회와 획기적 사건들이 실마리 역할을 하였다. 1975년 뉴욕의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열린 낙서 미술가 연합의 전시회, 1980년에 프레디Pab Five Freddie가 워홀Andy Warhol(1928~1987)의 캠벨 수프깡통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제작한 스프레이 페인트 작품, 1980년에 열려 뉴욕 미술계의 관심을 끌었던 <타임스 스퀘어>쇼, 뉴욕 브롱크스에 있는 대안공간*인 ‘패션 모다Fashion Moda’의 전시회와 직업상담같은 형식으로 한 꾸준한 지원, 그리고 해링Keith Haring(1958~1990)같이 미술 전문교육을 받은 미술가들이 발전시킨 낙서 양식이 바로 그것이다.
1983년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보이스만-반 보이닝겐 미술관에서 최초로 대규모 낙서미술전이 개최되고 시드니 재니스의 블루-칩 갤러리에서 <후기-낙서Post-Graffiti>란 전시회가 열려, 낙서미술이 절정기에 달한 해가 되었다.

낙선전

낙선전 落選展
Salon des Refusés(프)

1863년 프랑스의 관전 심사에 낙선된 그림들이 당시의 편파적인 심사의 결과라는 여론에 따라, 나폴레옹 3세가 살롱* 옆에 낙선작들의 전람회 개최를 허락하여 생긴 전시회의 명칭. 여기에 출품되었던 마네Édouard Manet(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Déjeuner sur l’herbe> 등 종래의 도덕 관념을 타파한 시민적인 작품들은 도덕적으로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황제 자신도 이 전시회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아 단 1회로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마네가 추구한 종래의 전통적인 어두운 화면을 벗어나는 선명한 색조는 무명의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네 주변에는 많은 청년 화가들이 모여들었고, 그로부터 인상주의*가 탄생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또 이 전시회는 관(官)의 심사에 의하지 않은 최초의 살롱으로서, 오늘날의 앙데팡당*전의 효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