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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재 궁륭

늑재 궁륭 肋材穹窿 rib-vault(영)

궁륭*의 한 종류로 ‘늑골 궁륭’이라고도 한다. 지지물들을 연결시키는 늑골*이나 아치*들의 뼈대가 있는 궁륭을 일컬음. 고대 로마의 궁륭에 이미 있었고 사산 조 페르시아에도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이슬람 건축에 있어서도 일찍부터 늑골 돔, 늑재 궁륭의 복잡하고 환상적인 사용례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늑재 궁륭을 가장 정연하고 조직적으로 사용한 예는 서구의 고딕* 건축이었다.

→ ‘궁륭’ 참조

능 陵

제왕과 후비의 무덤.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봉토(封土)에 호석(護石)을 둘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기고, 주위에 석난간(石欄干)을 두르며,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사자(石獅子)를 세우는 제도를 갖춘 신라능묘는 흥덕왕릉興德王陵대에 이루어졌다. 고려는 대체로 신라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으나,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및 정자각을 세우고 봉분 주위에 석양, 석호를 배치하는 것 등이 다르다. 대부분의 고려 왕릉들이 북한에 소재하여 학문적인 연구가 부족하나 공민왕恭愍王이 노국대장공주와 자신을 위해 조영한 정릉正陵(개풍군 중서면 여릉리 봉명산, 1365)과 현릉玄陵(1374)이 조선시대 왕릉형식의 표준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최초의 왕릉으로 조영한 태조太祖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자 태조의 수릉(壽陵)인 정릉貞陵(사적 제208호,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1397)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1408년(태종 8년) 태종太宗이 태조의 능을 현재의 건원릉建元陵으로 모시고 다음 해에 제왕의 능분은 도성내에 두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이를 동소문 밖으로 이장시킬 때 그 원형이 파괴되어 공민왕릉과 비교하기가 어려워졌지만 정릉은 태조 건원릉 축조의 범본으로 알려진다. 건원릉은 능역 입구의 홍살문*으로 이곳이 성역임을 표시하고, 박석을 깐 참도(參道)로 이어진다. 이 입구 바로 오른쪽에 왕이 능행시 북방을 향해 네 번 절하는 통과의례를 치르는 장소인 정방형의 판위(版位)가 있다. 참도는 정자각의 정면으로 이어지다가 동쪽으로 돌아서 동쪽계단에 연결된다. 이것이 다시 정자각 후면 정중앙으로부터 능언덕 밑까지 이어지고 둥근 구릉으로 된 능원은 1단의 낮은 석축으로 보호된다.
능 전체의 구성요소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능상구역(陵上區域)과 능하구역(陵下區域)이다. 능상구역은 바로 봉분을 중심으로 곡담, 석물, 석계를 포함하며, 정자각 후면의 신문(神門)이 의미론적으로 바로 이 구역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다. 능하구역은 제의식(際儀式)의 장소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이를 좌우에서 보완하는 수복방(守僕房)과 수라간, 그리고 이 구역의 입구에 홍살문이 있으며 이들을 연결지어 주는 참도, 왕의 자리를 나타내는 판위가 있다. 능상구역에서 능원상에는 3단의 장대석을 쌓아 능전에 2단의 넓은 공간에는 문인석, 무인석과 그들이 탈 수 있는 석마(石馬)들이 각각 1쌍씩 있다.
첫째단에는 두손으로 장검을 빼어 들고 선 무인석이 있고, 둘째단에는 문인석이 두 손으로 활을 잡고 서 있다. 맨 윗단에는 봉분 앞 정면 중앙에 장방형의 두꺼운 판석 한 장으로 된 상석이 북모양을 한 네개의 돌로 받쳐져 있다. 그리고 봉분 주위로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각각 두쌍씩 밖을 향하여 능실을 호위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상석의 좌우로는 중국에서는 화표주(華表柱)라 불리는 석망주(石望柱) 두 개가 서있다. 석망주는 연꽃봉오리 모양의 상부에 연꽃이 새겨진 띠로 위, 아래를 받치고 그 사이에 긴 팔각주를 세운 모습이다. 12면의 석난간으로 봉분을 보호하고 하부에 12면의 병풍석(屛風石)으로 보호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제도를 보여준다. 각 면에는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전통이 된 십이지신상 조각이 문관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관에는 각 동물의 모습이 장식되었다. 모서리돌에는 금강저*(金剛杵)가 호신의 상징으로 새겨졌으며, 이 금강저에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만물생성의 원리인 태극이 장식되었다. 이러한 능분은 다시 동서북 3면에 걸쳐 기와를 올린 담장 혹은 곡장(曲墻)에 의해 보호된다.

니치

니치 niche(영)

→ 벽감

다가바

다가바 dāgaba

싱할리즈어인 다가바는 산스크리트어의 다투dhātu(사리)와 가르바garbha(자궁, 용기, 저장소)가 합성된 용어로서 스리랑카의 스투파*를 말한다. 전형적인 형태는 3단의 기단부(trimālā)와 돔(anda)*, 그리고 하르미카*와 야슈티*로 구성된 상부구조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돔 내부에는 사리를 안치한 석실이 마련되어 있다. 스투파는 두 개의 정방형 단으로 된 기단 위에 올려지는데, 이 건조물의 사방에는 와할카다스(vāhalkadas)라는 돌로 만든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는 잎모양의 장식대와 네 방위를 상징하는 동물들, 즉 사자, 코끼리, 말, 황소가 조각*되어 있다.
고대의 다가바들에는 원래 백색의 추남(cunam)회가 덮여 있었다. 기원전 244년에 봉헌되었다고 하는 아누라다푸라의 투파라마(Thūpārāma) 다가바는 건조물 주위에 세 줄의 석조 기둥이 둘러져 있다. 이 기둥들은 나무와 금속으로 된 돔 모양의 지붕을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가바는 돔(복발*)의 모양에 따라 ‘종 모양’(예;아누라다푸라의 투파라마) ‘거품 모양’(예;아누라다푸라의 루완벨리Ruvanveli) ‘볏단 모양’ ‘단지 모양’ ‘연꽃 모양’ ‘아말라카* 모양’의 6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그렇지만 뒤의 3가지 형태는 현재 남아 있는 예가 없다.

다게레오타입

다게레오타입 daguerreotype(영)

1839년 프랑스의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1787~1851)가 발명한 초기의 사진* 처리과정의 한 방식. 잘 닦인 은판표면에 포지티브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은판사진*(銀板寫眞)’이라고도 불린다. 다게레오타입으로 사진을 얻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은판 또는 은도금한 동판을 잘 닦은 후, 요오드 증기로 가득한 상자 속에 넣어 감광성을 가지는 요오드화은 감광막을 만든다. 이것을 카메라에 넣어 사진을 찍은 후 수은 증기로 현상하면 아말감(수은과 은의 화합물)의 상이 떠오르고, 식염수로 감광되지 않은 요오드화은을 제거하고 정착하면 은회색의 사진이 얻어진다.
이 방식은 다른 사진술과는 달리 네거티브 단계를 거치지 않으므로 좌우가 바뀐 포지티브 이미지가 형성되고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얻을 수 있다. 다게레오타입으로 만들어진 사진은 선명한 세부 묘사와 풍부한 톤의 표현이 특징으로, 1839년 7월 프랑스에서 처음 생산된 이래 1848년 아처Frederic Scott Archer의 ‘콜로디온 습판방식*’이 발명되기까지 많은 초기 사진가들에게 인기를 누렸다. 프랑스 정부가 이 사진술을 공식 인정한 8월 19일은 사진 탄생의 날로 여겨진다.

다게레오타입 카메라

다게레오타입 카메라 daguerreotype camera(영)

1839년 8월 다게레오타입* 사진술의 발표와 동시에 파리에서 시판된 카메라. 렌즈가 부착된 나무상자와 투명유리가 붙은 초점 조절용 나무상자가 앞뒤로 연결된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 카메라는 뒷상자가 앞상자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방식으로 초점을 맞추었으며 셔터는 붙어있지 않았다.

→ ‘다게레오타입’ 참조

다뉴세문경

다뉴세문경 多紐細文鏡

금속거울의 한 종류. 청동기시대 세문경 중 가장 정교하다. 뒷면 중심부에 2~3개의 손잡이가 붙어 있고 가는 톱니무늬*(鋸齒文)가 주출(鑄出)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가는 줄 톱니무늬 거울이라고도 한다. 직경은 9~14cm 정도이다. 중국의 전국(戰國)시대부터 한대(漢代)에 걸친 북방계 청동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중국 동북부 혹은 한반도에서 제작되었고 주로 한반도 연해주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었고 주물기술도 훌륭하여 당시 청동기 제작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다다

다다 Dada

1915~1922년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 반합리적인 예술운동. 제1차세계대전을 초래한 전통적인 서구 문명을 부정하고 기성의 모든 사회적, 도덕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하여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다. 다다란 여러 나라의 말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로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고 프랑스어로 ‘목마’를 의미하며, 슬라브어에서는 ‘예, 예’를 뜻한다. 다다란 명칭이 탄생한 경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 중 1916년 시인인 차라Tristan Tzara(1896~1960)가 사전을 놓고 펜나이프를 아무데나 집어넣어 나온 다다라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음성어를 그 명칭으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다다는 제1차세계대전 중과 그 직후에 전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어 갔는데, 처음에는 취리히, 뉴욕, 바르셀로나 같은 중립도시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베를린, 쾰른, 파리에서 일어났다. 루마니아의 시인 차라, 독일의 작가 발Hugo Ball(1886~1927), 휠젠벡Rihardt Hülsenbeck, 스위스의 화가 아르프Jean Arp(1887~1966) 등이 그 선도자였으며, 다다의 파괴적인 주장은 기관지인 《다다》 제3호에 실린 <다다 선언>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독일에서는 반전운동과 공산주의에 결합된 베를린 다다가 1919년에 결성되었다. 또 1919년 쾰른에서는 아르프와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에 의해 전람회가 개최되었으나, 당국에 의해 폐쇄됐다. 하노버에서는 1919년에 슈비터즈Kurt Schwitters(1887~1948)가 메르츠*를 창안해 냈다. 피카비아Francis Picabia(1879~1953)는 바르셀로나에서 잡지 《391》을 창간하여 취리히 다다의 맥을 이었다.
파리에서는 같은 해 브르통André Breton(1896~1966), 아라공Louis Aragon 등이 시(詩) 잡지 《리테라튀르Littérature》를 창간, 취리히 그룹의 거의 전원이 여기에 참가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유럽의 다다 운동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1912년경부터 이미 다다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던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이 만 레이Man Ray(1890~1977)와 함께 뉴욕의 291 화랑*에서 충격적인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뉴욕 다다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기에는 다다 운동이 거의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영향을 끼쳐 1922년 파리에서 대규모 국제전이 개최되었으나, 1924년 초현실주의*가 발족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다다의 비합리적인 태도가 미술작품에만 국한되어 표현된 것은 아니다. 스튜디오에만 처박혀 작품을 제작하기보다는 선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다다미술가들은 대중을 상대로 한 선동적인 이벤트를 마련했다. 그 결과, 다다는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취리히의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에서 민중을 선동할 목적으로 열린 여러 예술형태가 혼재된 프로그램에서부터 레디메이드*와 같이 마치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듯한 뒤샹의 수많은 창작 작품들이 쏟아졌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경향으로는 소위 레디메이드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 콜라주* 또는 앗상블라주*로 통하는 메르츠 등이 시도되었던 점이다. 기계적, 성적인 이미지의 사용도 다다의 특색이다.
다다는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천만명 이상 되는 사망자들의 비극적 희생에 대한 미술가들의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기계문명시대의 테크놀로지가 인류를 황폐케 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대 문명의 이기를 얻는 대가치고는 너무 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다다 미술가들은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던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결국은 유럽문명을 자멸케 한 원인이었다고 비난했다. 이에 다다미술가들은 합리적인 것과는 정반대의 미술로 대응했다. 그들에게는 부조리와 장난기, 대항과 허무주의, 직관과 감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즉 다다는 하나의 미술양식이 아니라 세계관을 가리키는 명칭인 것이다. 다다 미술은 부조리를 대담하게 표현해냄으로써 많은 관람자들을 격분케 했다. 부르주아 계급을 향한 다다의 비판적 태도는 다다 뿐만 아니라 모든 현대미술의 특징이지만, 다다는 중산층의 도덕률을 거부했다는 사실로 볼 때 가장 신랄한 모더니스트로 꼽힐 만하다.

다리파

다리파 Die Brücke(독)

드레스덴의 고등공업학교 학생이었던 키르히너Ernst Kirchner(1880~1938), 헤켈Erich Heckel(1883~1970),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1884~1976) 등이 창립한 독일 표현주의* 그룹. 당시 그들의 혁명적인 정신과 회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자 했던 다리파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제1, 2회전을 열고, 당시의 인상주의*적인 분리파*에 반항하여 내적 자아를 직접 표출하려고 시도하였다. 1906년에는 놀데Emil Nolde(1867~1956)와 펙슈타인Max Pechstein(1881~1955), 1908년에는 반 동겐Kees van Dongen(1877~1968)도 동인으로 참가했다.
그들 작품세계의 특징이기도 한 데포르마시옹*과 원색은 프랑스의 야수주의*에 대응되는데, 야수주의의 그것이 주로 조형상의 과제였던 데 반해 다리파의 경우는 북방(北方)적 고뇌의 드라마를 전개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고갱Paul Gauguin(1848~1903), 뭉크Edvard Munch(1863~1944)에 심취하고, 흑인 조각에 끌리어 그 열광과 불안을 회화, 목조, 목판화*, 석판화*, 에칭*, 포스터* 등의 갖가지 조형 수단을 구사하여 형상화하였다.
그러나 브뤼케 그룹은 1913년에 이르러서 동료 사이의 불화 때문에 마침내 해산되었고, 그 후 멤버들은 각기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하지만 다리파의 운동은 표현주의 운동의 선구가 되었던 바 젊은 세대의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문화주의

다문화주의 多文化主義
Multiculturalism(영)

민족중심주의의 반대 개념으로 나타난 개념. 하나의 국가 내지 사회 속에서 복수의 다른 인종, 민족, 계층 등이 존재할 때, 서로 다른 문화의 공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그들 각자의 독자성을 육성하려는 입장.
미술에서의 다문화주의란 백인 중심의 유럽문화적 전통만을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로부터 다양한 민족과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인정하는 차원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다문화주의는 특히 모더니즘*이 갖는 순수주의 내지 중심주의를 탈피하려는 시각에서 필연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만나게 되면서 미술에서도 급속하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개념은 1980년대말경 미국과 유럽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미국과 유럽에 이민으로 유입된 유색인 수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인종 차별적인 사건이 부분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적 기술의 발달 덕분에 국경을 넘어서 정보와 사고의 즉각적인 전달이 가능해진 점도 다문화주의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다문화주의는 다른 문화에 속하는 미술을 ‘원시적’인 것으로 보거나, 문화적인 타자(他者)에 의한 색다른 산물로 간주하는 경향에 잠재하는 식민지주의의 흔적을 거부한다. 그리고 비유럽적인 문화에서 제작된 미술작품은 그들의 자체적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89년 <대지의 마술사들Les Magiciens de la Terre>이라는 이름으로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전시회는 유명한 서양의 미술가와 무명의 제3세계 작가의 작품을 한 데 모았다. 이 전시회는 근본적으로 다른 여러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줌으로써 예술의 본질에 대한 사고방식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문화주의 개념은 서양 문화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기묘하게 적용되는 예가 적지 않았으며, 이러한 한계 속의 다문화주의는 단순한 다양성을 위한 도구의 개념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