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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미술 唐代美術
당唐은 수隋를 멸망시키고 이연李淵이 618년에 건국한 이래, 907년 애제哀帝때 후량後粱의 주전충에게 멸망당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해 통치되었다. 한漢이래 한족(漢族)에 의한 통일제국을 형성, 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어 동아시아에까지 널리 영향을 끼쳤다. 특히 당대(唐代)에는 서역으로부터 외래문화가 유입되어 당시 수도인 장안長安은 국제적인 성격을 띤 화려하고 독특한 미술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조각:불교 조각은 초당(初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을 거치면서 발전하였다. 전체적인 특징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풍만하고 사실적이며 유려하다. 특히 현장玄裝 같은 구법승(求法僧)이 잇따라 인도에 다녀온 후 당문화는 서방의 영향으로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외래적 영향은 초당의 정관불貞觀佛에서도 이미 인도 굽타미술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초당의 조각으로는 용문석굴*龍文石窟의 〈재발동齋跋洞〉 〈경선사동經善寺洞〉 〈봉선사동奉先寺洞〉이 있다. 성당기(盛唐期)는 측천무후기의 치세로부터 시작되는데, 〈보경사석불寶慶寺石佛〉로 알려진 20여점의 작품이 유명하다. 용문석굴에서는 극남동極南洞과 간경동看經洞의 보살상들이 있는데, 굽타왕조의 삼굴법(三屈法)이 도입되어 허리를 틀고 있는 자세가 이색적이다.
회화:초당에는 염립덕閻立德(이앤 리떠), 염립본閻立本(이앤 리번, ?~673)형제와 서역에서 전래한 음영법(陰影法)을 구사한 위지을승慰遲乙僧(웨이츠 이썽), 화려한 궁중 인물화의 주방周昉(저우 황) 등이 당대의 인물화를 발전시킨 화가들이다. 또한 빠른 필선으로 장안과 낙양의 사찰벽화를 많이 그린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 금벽산수*(金碧山水) 또는 청록산수*(靑綠山水)의 전통을 연 이사훈李思訓(리 쓰쉰), 이소도李昭道(리 샤오따오) 부자 등이 있다. 그리고 시인이자 상서우승尙書右承의 벼슬을 하였던 왕유王維(우앙 웨이)는 남종화와 수묵화의 시조(始祖)로 불린다.
서예:초당에는 해서*(楷書) 양식이 확립되어 우세남虞世南(우 스난)이나 구양순歐陽詢 같은 명가가 나와 중국 서도의 전형이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분간포백(分間布白)에 의한 반듯한 미가 발휘되었는데, 우세남의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등이 대표작이다. 저수량楮遂良(주 쑤에이리앙)은 만년에 가늘고 감상적인 서체로 일세의 절묘한 풍운을 나타내었으며,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가 있다. 성당시기에는 안진경顔眞卿(이앤 쩐칭)이 등장하였고 장욱張旭(즈앙 쉬)과 회소懷素의 광초(狂草)가 주목된다.
공예:도자기는 전반적으로 동체가 여유있게 넓으며 바닥이 평평하고 커서 안정감이 있다. 당대에는 백자*가 만들어졌으며, 특히 8~9세기에 하남성河南省의 형주요에서 만들어진 것이 유명하다. 청자는 월주요*(越州窯)의 것이 유명하였고, 당말(唐末)에는 흑유자(黑釉磁)도 제작되었다. 이외에 녹(綠), 갈(褐), 백(白), 황(黃), 남(藍) 등 낮은 온도의 유약으로 채색되는 이국적이며 화려한 당삼채*(唐三彩)가 있다.
당삼채 唐三彩 tang-san-cai(중)
중국 당唐나라 때 세가지 색깔의 유약으로 장식된 도자. 한대(漢代) 이래로 묘에 부장한 명기*(明器)류는 유약을 씌우지 않은 회도에 채색을 한 것이 주로 사용되어 왔으나 당대(唐代)에는 백토로 분장한 후 녹색, 갈색, 백색, 황색, 남색 등의 저화도 유약(鉛釉)으로 명기를 채색하기 시작했다. 당시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후장의 풍속과 함께 발달한 것으로, 800~900도에서 굽는 연질 도자로서 실용성은 없다. 700년을 전후해서 약 50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756년 안록산의 난(亂) 무렵에 사라진다.
당삼채는 주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부근에서만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화도 유약에 포함된 코발트 블루는 푸른색, 철 성분은 황갈색과 갈색, 구리는 녹색, 중성유는 백색과 탁색을 발한다. 도용(陶俑)이나 명기용(明器用) 그릇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귀족들의 호화로운 생활과 서방문물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복잡한 고도의 기교를 사용하고 있어서 당시 저화도 유약의 눈부신 발달을 보여주는 한편, 일본의 나라삼채奈良三彩, 발해삼채渤海三彩, 요송삼채遼宋三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초문 唐草文
tang-chao-wen(중) rinceau(영)
식물 덩굴의 줄기가 이루는 물결 모양이 꽃과 잎, 열매 등을 에워싸면서 말리고 반전하며 연장된 문양으로, 주로 가늘고 긴 공간을 메우는데 사용된다. 본래 ‘당초’는 당풍(唐風) 또는 이국풍의 덩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고대 이집트의 로터스, 아시리아의 팔메트* 등을 리드미컬한 덩굴 줄기로 연결해나간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의 팔메트 당초문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는 고유의 C자형에 기초한 동물계당초문(動物界唐草文, 龍唐草, 龍紋系唐草)과 서방에서 전래된 식물계당초문(植物界唐草文)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당초문이 식물계 모티브에 기반한 것이므로 식물계당초문에 국한시켜야 할 것이다. 서방의 당초문이 중앙 아시아를 거쳐서 중국에 들어온 것은 육조(六朝)시대의 일이다. 북제北齊~수당隋唐시대에 걸쳐서 화문(花文)과 포도, 석류 등의 과일이 부가되고 채색이 다채로워졌다. 당초문은 각 나라의 독자적 문화와 결합하여 풍부하게 변화, 발전해온 다국적 문양으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은기(銀器), 염직, 이슬람 도기 등 세계 각지의 공예품과 건축의 장식에 널리 사용되었다.
대공 臺工
목조 건물의 대들보 위에 설치되어 중종보나 마루보, 도리*(道里) 등을 받치는 짧은 기둥. 형태와 형식에 따라 동자대공(童子臺工), 접시대공, 화반대공(花盤臺工), 포대공(包臺工), 판대공(板臺工), 인자형대공(人字形臺工)으로 구별된다.
대구 帶鉤 dai-gou(중)
고대 유목 기마민족의 복식용 혁대를 매는 데 사용한 갈고리로, 중국의 춘추(春秋)시대 중기~말기에 중원지역에 전해져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다. 재료는 청동이 많고 철, 연옥으로 된 것도 있다. 초기형식은 소형으로 주조*된 부조*의 훼룡문*(虺龍文)이 드러난 것이 있으며 하남성, 산서성, 안휘성에서 발견되었다.
성행기에는 형태가 점차 둥글고 길어지며 대구의 머리가 여러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갈고리는 항상 운문(雲文)과 와문(渦文)으로 장식되었다. 때로는 금, 은 또는 옥석 등의 상감*(象嵌) 및 도금(鍍金)으로 문양을 두드러지게 했다. 크기는 일반적으로 10cm 정도로, 긴 것은 50cm에서 짧은 것은 2cm 짜리도 있다.
한대(漢代)에서는 화려한 장식은 사라지고 실질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갈고리를 제외하고는 혁대 바깥쪽에 드러나 칼을 차고 경낭(鏡囊)과 인장*(印章), 전폐(錢幣) 등의 물품을 걸 때도 사용되었다. 낙랑의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타출(打出)과 누금(鏤金), 상감기법으로 세공된 금제대구가 유명하다.
대기원근법 大氣遠近法
aerial perspective(영)
눈과 대상 간의 공기층이나 빛의 작용 때문에 생기는 대상의 색채 및 윤곽의 변화를 포착하여 거리감을 표현하는 기법. 선을 이용하여 깊이와 회화 공간을 표현하는 선 원근법*과 비교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는 색채로, 흡사 대기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면서 색채들의 단계적인 변화를 통하여 회화의 깊이감을 산출해내는 방법을 ‘대기 원근법’이라고 이름하였다.
다 빈치는 대기원근법을 선 원근법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색채가 흐려지거나 상실되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거리에 비례한다. 그러나 이는 동일한 고도에서 색채를 보는 경우에 한한다. 고도가 다를 경우, 이러한 규칙은 적용되지 않는데, 이는 공기의 밀도가 다르면 공기가 색채를 흡수하는 정도도 다르기 때문이다”. 대기 원근법은 이미 폼페이 벽화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또 10세기에 중국화에서도 대기 원근법에 대한 해석이 나타나는데, 송宋의 산수화*에서 가장 발달하였다.
유럽에서 대기 원근법은 1000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15세기초 플랑드르 화가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대기 원근법은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의 치밀하게 계획된 풍경화, 터너William Turner(1775~1851)의 작품들에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공간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 ‘선 원근법’ ‘왜곡 원근법’ ‘원근법’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