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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조틴트

메조틴트 mezzotint(영) manière-noir(프)

동판화*에서 직각 제판기법의 일종. 그러나 드라이 포인트*와 같이 판에 직접 새긴다는 점에서 약물제제에 의한 부식 작용을 이용하는 에칭*이나 동판부식법*과는 다르다. 그 제작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동판 위에 로커(rocker)라는 톱니 모양의 예리한 날을 지닌 조각도를 움직여서 작은 구멍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판각할 때 생긴 거친 부분은 스크레퍼(scraper)라는 끌로 제거하고 홈에 잉크를 부은 후 천으로 문지른다. 판면에 따라 바니시*를 써서 회색에서 백색까지 인쇄되도록 단계를 두어 마무리한다. 그림이 거칠게 나오는 부분은 수정이 가능한데, 그로 인해 그림의 톤*이 진해진 부분은 주걱으로 평평하게 만들어 중간톤을 표현해낸다.
이처럼 메조틴트 기법은 어두운 색조를 밝은 색조로 고칠 수 있다. 또한 부드럽고 흐린 미묘한 톤의 변화와 동시에 어두운 색조의 풍부한 변화를 발현함으로써 벨벳과 같은 깊은 감촉의 인쇄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메조틴트는 1642년에 독일의 우트레히트Ludwig von Siegen Utrecht가 발명하였고 18세기 영국에서 유행하였다. 특히 톤의 변화에 따른 판화 효과를 선호했던 영국에서는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1723~1792), 게인스보로Thomas Gainsborough(1727~1788) 등의 초상화가들에 의해 메조틴트가 초상화* 제작에 가장 이상적인 기법으로 선호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발전된 사진에 그 자리를 넘겨주고 퇴조하였으며 지금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

메타포

메타포 metaphor(영)

은유. 어원적으로는 전이(轉移)의 뜻이며 ‘숨겨서 비유하는 수사법’이라는 뜻이다. ‘A는 B와 같다’는 식의 비유가 아닌, 오히려 ‘~같다’는 비교를 직접적으로 명시하지 않는 ‘A는 B다’는 식의 어법을 말한다. 어떤 언어표상을 그 본래의 의미와는 별도로, 전화(轉化)된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본래 표현되어야 할 내용을 간접적으로 명시하는 것이다. 즉 ‘인생은 여행이다’ 등과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이질적인 것의 동일화가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까닭에 매우 강렬한 비유 효과를 지닌다. 은유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선 비교되는 두 대상이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해 있지 않으면 안되고, 그 비교에 어느 정도 연상적인 타당성과 설득력, 그리고 의외성의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메토프

메토프 metope(영)

도리아 건축 양식의 프리즈*에서 두 개의 트리글리프* 사이에 위치한 사각형의 패널*. ‘소간벽(小間壁)’이라고도 한다. 본래 아무 장식 없이 비어 있는 공간이었으나, 그리스 건축에서부터 종종 채색화나 부조* 조각으로 장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피디아스Phidias가 제작한 파르테논 신전의 메토프 조각이 가장 유명하다.

→ ‘엔타블러처’ 도판 참조

멘히르

멘히르 menhir

→ 선돌

면 面 plane(영)

회화*를 구성하는 한 요소. 회화에서는 이차원적 평면 위에서 삼차원적 입체나 깊이가 표현되므로 그려진 면은 양감*이나 공간*의 깊이를 암시한다. 따라서 빛이나 색의 효과가 그 자체로서 공간이나 양감의 표현에 이바지하고 있는 한, 명암*의 면이나 색면이 회화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는 자연은 구와 원추, 원통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자연의 배후에 있는 면의 구성을 단순한 입체면으로 분할했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와 브라크George Braque(1882~1963) 등 입체주의* 화가들은 자연이나 인간을 기하학적인 기본 형태로 환원하였다. 사물의 재현을 거부하는 근대 회화에서는 색채의 상호관계로서의 색가 또는 색면의 처리에 의해 공간의 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명기

명기 明器 ming-qi(중)

무덤에 넣으려고 만든 부장품(副葬品)으로 실물을 작게 축소하여 상징적으로 만든 모형. 종류는 그릇이나 동물, 인물상 등 다양하다. 명칭은 《예기 禮記》에 근거를 둔다. 묘에 부장되는 대부분의 명기는 거친 도질의 바탕에 연유(鉛釉)를 시유한 비실용적인 도기*로 별도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기 이전에는 금속이나 나무재질도 있었으며 피장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실용품이 부장되기도 했었다.
은殷, 주周나라 때에는 공납용 기물이 중심이었고, 이기*(彝器)를 모방한 토기*와 청동납, 구리로 주조한 비실용적인 무기도 포함된다. 전국(戰國)시대부터 예기(禮器)의 모조품과 함께 용*(俑)이 출토되었는데 동용(銅俑), 목용(木俑), 도용(陶俑)이 있다. 한대(漢代)의 사람들은 죽을 때 자신과 함께 가족과 노예, 재산과 가축, 가옥까지도 저 세상에 가지고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명기의 종류가 시종호위병, 농부악대, 곡예사망루, 헛간 등으로 다양해진다. 주로 도기로 만들어진 명기들은 틀에 의한 제작을 통해 대량 생산되었다. 후한(後漢)시대에는 연유도기(갈유, 녹유)가 나타났고 육조(六朝)시대부터는 사실성을 더해가며 진묘수*(鎭墓獸), 호인(胡人), 낙타 등의 종류가 추가된다. 당대(唐代)는 삼채유로 더욱 화려해진다. 명대(明代)에까지 계속된 명기의 부장(副葬)은 각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내세관을 보여주고 있어서 중요도가 크다.

명당

명당 明堂 ming-tang(중)

천자(天子)가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는 중국 고대의 정통적 정치사상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담은 건물. 조회, 제사, 경상(慶賞), 선사(選士), 교학(敎學) 등 중요 의식이 행해졌다. 하夏의 세실(世室), 은殷의 중옥(重屋)과 같은 목적으로 주대(周代)에 설치되어 모든 신하를 모아 천자가 다스린 곳이다. 건물의 실제 형태는 불분명한데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는 5실(室), 《사방양협四旁兩夾》 《예기禮記》 《월령月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1태실(太室), 8가(家), 《대대례기大戴禮記》에는 9실 등 일정치 않아 논쟁이 청대(淸代)까지 계속됐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태산에서 봉선(封禪)의식을 행할 때, 원봉 2년(元封, 기원전 109)에 상주(上奏)된 명당도(明堂圖)에 의해 건립한 이후, 한漢에서 육조(六朝)의 역대 왕조가 건설했다. 남제南齊의 명당은 유송(劉宋)의 태극전(太極殿)이 널리 사용되었고 수隋에는 도면과 모형은 작성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당唐의 측천무후는 낙양洛陽의 건원전을 부수고 기상천외한 3층의 거대한 명당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에서도 천명(天命)사상과 함께 명당을 받아들인 결과, 경복궁 경회루慶會樓가 명당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명대 미술

명대 미술 明代美術

명明은 1368년 주원장朱元璋에 의하여 세워져서 1644년 멸망하기까지 4세기 이상에 걸쳐 북방민족 대신 한민족(漢民族)이 다시 지배한 시기이다. 명대(明代)에는 여러 학파들이 있었지만, 주류는 불교와 도교적 색채를 띤 신유가(新儒家)라는 유교였다. 북송北宋의 신유가는 스스로를 수양하는데 있어 사물을 탐구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사물을 탐구’하는 데에는 정신과 사물의 내재적인 원리뿐 아니라 사물 자체의 현상과 대상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외부세계에 대한 연구는 정신과 원리와의 관계 또는 지식과 실천과의 관계 등의 연구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사물을 엄격하게 분석하는 연구보다는 왕양명王陽明 같은 사상가들은 사물을 일반화하려는 연구에 치중하였다.
건축: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벽돌을 사용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오늘날에 보는 정연한 모습의 장성은 명대에 이루어진 것이나 청대(淸代)나 최근에 보수한 부분도 있다.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과 〈태묘太廟〉는 명대 초기의 웅혼한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많은 건축물이 청대에 들어 개축 또는 보수된 것이다. 그러한 것에 비해 명대의 경향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북경 북쪽에 있는 〈명십삼릉明十三陵〉이다. 1935년에 대규모로 수리를 한 성조의 〈장릉長陵〉(1409~1413 건조)이 최대 규모이며, 인종의 〈헌릉獻陵〉을 비롯하여 마지막 의종의 〈사릉思陵〉까지 건조되었으나 방치된 채 크게 파손된 것이 많다. 벽돌만 사용하고 목재를 사용하지 않는 건축인 <무량전無梁殿>은 명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는데, 남아 있는 것은 명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전탑과 석탑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명대의 라마탑이 화북에 몇 기 전하는 정도이다. 북경에 있는 흰 돌로 만든 대정각정사大正覺正寺의 〈금강보좌金剛寶座〉(1473)는 라마계 건축문화이다.
불상:명대에는 조상적(造像的)인 면에서는 수, 당대(隋唐代)에 비해 쇠퇴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신앙은 일반 민중에 더욱 확산되었다. 불상 중에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 라마교의 상들에서 우수한 예가 전한다. 홍무 연간(1368~1398)과 영락 연간 무렵에는 원元 양식의 조각이 남아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홍무 18년(1385)의 〈목조 천의관음상〉과 홍무 연간에 제작된 태원 숭선사의 〈소조 천수관음상〉, 태원 진사진 봉성사의 〈나한상〉, 영락 9년(1411) 무렵의 〈칠금목조좌불〉은 그 대표적 작품이다.
15~16세기의 것으로는 성화 6년(1469)에 주조한 북경 서산 와불사의 〈청동 석가열반상〉, 정덕 연간(1506~1521)의 북경 서산 벽사의 〈소조 좌불오존상〉 〈십팔나한상〉, 북경 서쪽 교외 팔리장의 마하암에 있는 가정 25년(1546)의 〈목조 좌불삼존상〉 〈소조 십팔나한〉, 성화 13년(1477)의 〈철나한상〉, 베를린의 개인 소장인 성화 18년(1482)의 〈청동나한상〉 등이 있다. 이러한 예를 볼때 명대 초기의 위엄있고 엄숙하던 것이 친근감있게 변하는 것과 명대 조각의 지배적인 경향인 사실적 작풍이 엿보인다. 명대 말기에는 건요 백자의 관음상을 따른 흔적이 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천계 4년(1624)의 〈칠금목조관음좌상〉이 있다.
회화:명대 회화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하는 직업 화가의 화풍, 즉 북종(北宗)으로 남송南宋의 원체화*(院體畵)나 수묵화*(水墨畵)의 흐름을 받아들이거나 원의 이곽파*李郭派와 연결되던 것과, 문인들인 원사대가(元四大家)*를 스승으로 했던 남종으로 나뉜다. 명의 건국에서 영락기까지는 원대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데, 예찬倪讚(니 짠, 1301~1374)의 형식면을 따른 왕몽王蒙(우앙 멍)을 따랐던 서분徐賁(쉬 펀)이 있다. 선덕 연간(宣德,1426~1435)에 이르러 명의 화원제가 확립되었다. 명 초의 궁정화가로는 황전黃筌(후앙 취앤)풍 화조화의 변문진邊文進(삐앤 웬진), 홍치 연간(1488~1505)의 화원에서는 화조를 변각구도로 재구성한 여기呂紀(뤼 지)와 수묵화조화의 임량林良(린 리앙)이 유명하다.
이러한 궁정화가들 이외에 북종화*(北宗畵)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절파*折派이다. 대진戴進(따이 진, 1388~1462)이 절강성 출신임에 따라 후세인들이 절파라고 부른 이 화파는 남송의 원체 양식(院體樣式)에 송말 원초의 자유스런 수묵화법, 변각구도가 그 특징이다. 성화(1465~1487)의 화원에서는 오위吳偉(우 웨이), 재야의 화가 장로張魯(즈앙 루)에 이르면 절파의 화풍의 조방함은 더욱 드러난다. 명대 문인화*(文人畵)의 선구자는 강소성 오현吳縣 출신이며, 임모*(臨摹)에 송, 원대의 명적을 널리 연구하고, 동원董源(똥 위앤)과 거연巨然(쥐 르안)의 화풍을 바탕으로 중년이후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오진吳鎭(우 즈언)에 심취하여 전아하고 활달한 그림을 그린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이다. 심주의 제자로는 기교에 뛰어났던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이 있다. 심주와 문징명의 영향 아래 출현했던 문인화가 중에는 오현(넓게는 강소성 남반과 절강성 북반을 가리킨다) 출신이 많아 절파에 대응하여 오파*吳派라고 명명되는 이 화파의 산수화 특징은 담아한 색채의 아름다움과 선묘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오파와 절파에 속하지 않으면서 명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화가로는 구영仇英(처우 잉)과 당인唐寅(탕 인)이 있다. 고전적 양식의 부흥에 노력하였던 구영은 정교하고 화려한 채색화와 함께 백묘화*(白描畵)에도 뛰어났다. 문인화가인 당인은 처음에는 주신周臣(저우 천)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심주에게도 배워 원체화와 남종화를 종합하는 입장에 섰다. 명말에 다가가면 문인화 계보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이 주목된다. 그는 그림에서 문인 계층의 미적 이념들을 실현시켰고, 또한 자신의 비평을 통해 그 작품들에 이론적 형식을 부여한 인물로서 문인화의 전통이 다른 어떤 전통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15세기의 시인 화가였던 두경杜瓊(뚜 치웅)이 먼저 이룩한 학설을 채택해 남북종론(南北宗論)을 만들었다.

명도

명도 明度 brightness(영)

색*(color)의 세 가지 속성 중의 하나. 색은 색상*(色相), 명도, 채도*(彩度)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색의 3속성이라고 한다. 그 중 명도는 색의 명암(明暗)의 정도, 즉 밝기의 비율을 말한다. 밝은 색은 명도가 높아 명색(light color)이라 하며 어두운 색은 명도가 낮아 암색(dark color)이라 한다. 무채색은 명도만 있다. 무채색 및 유채색을 통틀어 중간 정도의 밝은 색을 중명색(middle light color)이라 한다.

명문

명문 銘文

비석이나 기물에 새겨진 글. 청동기의 명문은 금문(金文), 비의 명은 비명(碑銘)이라고 한다. 상商, 주周 시대의 청동기는 주조명(鑄造銘)이 대부분이나 전국(戰國)시대 이후에는 각명(刻銘)이 많아졌다. 불상에는 조상명(造像銘)이 있으며 목각과 목조 건축에는 묵서명(墨書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