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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각화 운동 木刻畵運動
문학가인 노신魯迅(루 쉰)의 지도에 의해서 추진된 중국 판화운동을 말한다. 1931년에 노신은 일본의 우치야마內山嘉吉를 강사로 초청하여 상해上海에서 강습회를 열었으며, 또 외국 판화전을 여는 등 이 운동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다. 노신이 죽은 후,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중화목각항적협회中華木刻抗敵協會의 주도 아래 전의(戰意)를 고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산서성山西省 연안延安을 거점으로 한 북방계와, 사천성四川省 중경重慶을 거점으로 한 남방계의 두 파로 갈라져 전개되었다. 북방계는 사실주의와 민족형식의 추구에 힘쓰고, 외국 판화나 전통적 판화를 답습하면서 음각(陰刻)을 위주로 한 세련된 기술과 격정적인 표현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북방계의 대표 작가로는 역군力群(리 쥔), 고원古元(꾸 위앤), 마달馬達(마 따) 등이 있다. 남방계는 양각(陽刻)을 위주로 한 명확하게 두드러진 묘사와 소박한 운동감의 표현이 돋보인다. 대표적인 작가는 이화李樺(리 후아), 맥조麥稠(마이 처우), 왕기王琦(우앙 치) 등이 있다.
목일회 牧日會
1934년 한국에서, 도쿄미술학교 출신 양화가들을 주축으로 창립된 단체. 구본웅具本雄(1906~1953), 길진섭吉鎭燮(1907~1975), 김용준金瑢俊(1904~1967), 김응진金應進(1907~1977), 이병규李昞圭(1901~1974), 이종우李鐘禹(1899~1981), 송병돈宋秉敦(1902~1967), 황술조黃述祚(1904~1939) 등 당시 화단의 주축이 되고 있었던 양화가들을 중심으로, 1934년 5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전람회를 열어 46점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도쿄미술학교 유학생 출신들을 주축으로 창립되었다는 상징적인 동일성 외에 작품경향에서의 통일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전시에서도 구본웅의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에서부터 일상적인 풍경 작품까지 다양한 장르가 망라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단체의 명칭 즉 ‘목일’이 반일색을 띠었다고 하여 명칭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고, 이러한 압력에 의하여 스스로 ‘목시회牧時會’로 개칭하였다. 1937년 6월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제2회 전람회에서는 백남순白南舜(1904~1994), 이마동李馬銅(1906~1981), 임용연任用璉(1901~ ), 장발張勃(1901~ ), 홍득순洪得順이 새롭게 가세하는 등 당시 중견 서양화가들이 거의 다 참가하였다. 제3회 전람회에서는 ‘양화동인전洋畵同人展’이라고 다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후 1938년 11월에 제4회, 1939년 7월에는 제5회를 여는 등 1930년대 양화가들의 미술단체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꾸준한 활동을 보이다가 1940년 무렵 해체되었다.
목탄 木炭 charcoal(영)
회화* 재료. 버드나무, 회양목, 너도밤나무 등을 구워서 만든 가늘고 부드러운 소묘* 재료. 가볍고 편리하며 용이하게 지울 수도 있어서 특히 구도*의 밑그림이나 습작 및 스케치에 매우 적합하다. 목탄 소묘에 있어서 그라데이션을 할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종이 등을 원추형으로 감은 찰필(擦筆, stump, 압지(押紙)나 엷은 가죽으로 말아서 붓과 같이 만든 물건)을 사용한다.
목판화 木版畵 woodcut(영)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판화*로서 나무를 판재로 볼록판의 형식을 취한다. 목판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판목의 평평한 표면에 밑그림을 그려서 조각칼과 끌을 사용하여 도안은 그대로 남겨 두고 공백 부분만 낮게 깎아 낸다. 먹이나 잉크를 칠한 판목 위에 종이를 놓고 뒤쪽에서 손이나 프레스, 바렌 등으로 눌러서 원래의 밑그림과 반대의 이미지를 본뜬다. 목판화의 특징은 대담성, 단순성, 투박성으로 이것은 나무 자체의 성질과 조각 도구의 성질에서 기인한 것이다. 목판용 판재는 부드러운 나무가 적합하며 특히 배나무, 포플러, 너도밤나무, 벚나무, 단풍나무 등이 많이 사용된다. 목판화의 선은 나뭇결을 따라 날카로운 칼로 파내야 하므로 곧고 굵은 직선인 경우가 많으나, 정교한 표현도 충분히 가능하다. 초기 목판화의 장점들은 주로 대담한 밑그림과 힘있는 판각에 있었다.
이에 비해 현대의 판화는 나무 표면의 특징을 살리는 정교한 표현에 그 특징이 있다. 채색판화는 대개 각 색깔마다 다른 판을 새기고 그 판목을 같은 종이 위에 계속 찍어서 만드는 판화이다. 다색인쇄목판은 색의 수효만큼 판이 필요하므로 인쇄공정이 단색 판화보다 복잡하고 숙련된 기술을 요한다. 목판화의 역사와 목판 작업은 제책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왔다. 판각작업이 된 판목들은 본문과 삽화가 동시에 인쇄되도록 같은 두께의 활자와 프레스에 맞물리게 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은 다른 인쇄기에 별도의 종이로 인쇄하고 난 후 제본을 해야 하는 동판화* 인쇄보다 훨씬 간편하고 저렴하다. 5세기 이후 중동 지역에서 직물 인쇄를 위해서 나무에 새긴 도안이 발견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옛날부터 목판화를 사용했다고 인정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화는 돈황*에서 발견된 것으로, 868년 중국에서 인쇄된 금강경에 새겨진 판화이다.
서구에서 목판화 기술은 대략 15세기 초엽 이후에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100여년 동안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중요한 세 가지 형태, 즉 종교화트럼프, 책 삽화 등의 형태로 꾸준히 발달하였다. 현존하는 최초의 유럽 판화는 15세기초 순례지에 배포되었던 것으로 성모와 성자들을 단순한 선으로 도안하여 손으로 직접 찍은 종교화들이다. 그 당시 종교적 내용을 담은 많은 목판화의 명각기법은 예술에서 매우 특징적인, 즉 말과 영상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을 만들어 냈다. 목판본 책의 각 면은 본문과 삽화가 한 판면 위에 새겨진 것이었는데, 인쇄된 책의 삽화는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가 1440년과 1460년 사이에 고정된 활자로 인쇄하는 기술을 발명했을 때에야 가능해졌다. 1470년경 이미 독일에서 일반화된 목판화 삽화가 이탈리아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6세기에는 목판을 새기는 장인의 기술에 상당한 발전이 있었고 근본적인 목표와 의도에서도 변화를 보였다.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 홀바인Hans Holbein(1497~1543), 크라나흐Lucas Cranach(1472~1553) 같은 유명한 화가들은 오랫동안 고수되어 왔던 목판화의 곧은 직선을 아카데믹한 도안의 복제를 위해 점차적으로 복잡하게 표현하였다.
르네상스 미술*의 삼차원적 제도 기술로 인해 목판화의 특징인 날카로운 표현과 그래픽적 효과가 상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세련된 도안들이 16세기에 새겨졌는데, 특히 뒤러의 목판화는 르네상스 양식에 정교한 삼차원적 구성을 시도함으로써 회화적 특성을 획득하였다. 17~18세기 동안 목판화는 대중적인 용도로만 사용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목판 제판법(wood engraving)이 발달하였으나, 판목의 결을 따라 새기는 기법은 점차 사라져갔다. 19세기 사진의 발명은 판화가 담당했던 복제 작업을 대체하였기 때문에 판화는 창조적인 표현 수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5세기적인 단순성과 솔직한 표현이 재등장했고 풍부하며 힘에 넘치는 삽화가 제2차세계대전 전에 뒤피Raoul Dufy(1877~1953)에 의해 새겨졌다. 특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1880~1938), 마르크Franz Marc(1880~1916) 같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목판화는 주된 표현 양식이었다.
몰골 沒骨
동양화에서 형태의 윤곽선을 그리지 않고, 수묵 또는 색채의 농담만으로 직접 대상을 그리는 채색기법. 예전에는 산악도(山岳圖)에 쓰였고, 양梁의 장승요張僧繇(즈앙 썽야오), 당唐의 양승楊昇(양 성) 등이 이러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오대 이후에는 화조화*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이 기법은 구륵전채*의 일종인 황씨체(黃氏體)와 대립되는 것으로 서숭사徐崇嗣(쉬 쭝쓰)가 확립한 서씨체(徐氏體)의 몰골화가 유명하다. 명대(明代)의 서위徐渭(쉬 웨이)가 그린 몰골을 이용한 화훼도*와 청대(淸代) 초기의 운수평惲壽平(윈 서우핑)이 그린 사실적인 몰골 화조화가 유명하다.
몽마르트르 Montmartre(프)
파리 북부에 위치한 제18행정구이자 센강 우안에 있는 언덕 지역의 지명.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위트릴로Maurice Utrillo(1883~1955) 등 근대 미술의 발달에 공헌했던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며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창작 활동을 펼쳤다.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가 살았던 세탁선*(洗濯船)도 여기에 있었다. 물랭 루즈, 물랭 드 라 갈레트 등의 건물은 당시와 같은 모습으로 현재에도 남아 있다. 몽마르트르는 지금도 좌안의 몽파르나스*와 함께 많은 예술가들이 거주하고 있는 새로운 예술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 곳이다.
몽타주 montage(프)
기존의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그 일부를 잘라내 한 화면 위에 붙여 합성하는 회화 기법. 본래 몽타주는 영화에서 비롯된 기법인데, 영화에서는 개별적으로 촬영한 필름의 단편들을 시퀀스에 끼워넣거나 편집하여 하나의 연속적인 작품으로 구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 몇 장의 사진을 따로따로 짜맞추어 잔상* 효과나 환기력에 의해 통일된 인상을 주는 방법을 가리키기도 하며, 최근에는 합성사진이나 짜맞추기 사진을 뜻하는 명칭으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미술에서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소재나 이미지들을 잘라내어 맞추고 재구성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결합시키는 기법을 몽타주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몽타주한 것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지만 그림에서는 잘라낸 부분들을 한 화면 안에 병치시켜야 한다. 몽타주를 가장 선호하였던 것은 독일의 다다*이스트들이었으며, 그들은 특히 사진을 소재로 한 포토몽타주*를 고안해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잘라내어 한 화면에 결합한 포토몽타주는 러시아의 영화감독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의 몽타주 이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에이젠슈타인은 서로 다른 독립적인 장면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돌하거나 상극함으로써 유발되는 개념이 몽타주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고 그에 의해서 몽타주는 영화기술에서 영화예술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포토몽타주 역시 서로 관계없는 사진들을 동일 화면 상에 짜맞춘 결과, 사실적인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의외적이고 기괴하기까지 한 비현실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기성의 이미지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전환하여 전혀 다른 맥락에 놓이게 만듦으로써 화면에서 일관된 총체로서의 흐름을 파괴하는 것이다. 전통 회화에 반하기 위해 포토몽타주를 고안한 하우스만Raoul Hausmann은 자신을 화가가 아닌 일종의 기술자로 자처하고 포토콜라주가 아닌 몽타주라고 지칭하였다.
한편 콜라주*도 일종의 몽타주로 여겨지는데, 종이나 이차원적인 재료를 사용한 콜라주는 파피에 콜레*로 구분한다. 콜라주와 파피에 콜레가 ‘풀로 붙이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동사 ‘coller’에서 나온 것인데 비해, 몽타주의 어원인 ‘monter’는 본래 건축적 용어로서 ‘벽돌 등을 쌓다’라는 의미이다. 둘 다 서로 상반되거나 의미없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말하지만, 콜라주가 의미의 충동이나 대립 그 자체에 중점을 둔다면, 몽타주는 그 대립을 통해서 일관된 의미를 조립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몽타주에서는 주로 사진이나 복제물, 인쇄물, 광고 등을 사용하지만, 때로는 입체적인 삼차원의 오브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 ‘콜라주’ ‘포토몽타주’ ‘파피에 콜레’ 참조
몽파르나스 Montparnasse(프)
파리 제14행정구에 속하는 센강 좌안의 지명. 1920년대 에콜 드 파리*가 한창일 때,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모여 살며 작품 활동을 했고 무수한 일화를 남겼다. 특히 1910~1930년경에는 예술가 뿐만 아니라 정치가, 문인들이 모여들어 그 시대의 예술과 문화를 이끄는 중심지였다.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이 이 근처에 머무르고 있으며, 미술학교와 화랑이 많아 몽파르나스의 유서 깊은 예술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묘지 墓誌 mu-chih(중)
죽은 사람의 본관과 관위(官位), 행적 등을 돌이나 전(塼)에 새겨 무덤 앞에 묻은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 흔히 ‘광지(壙誌)’라고도 한다. 묘 앞에 세우는 묘비와는 구별된다. 《서경잡기》에 ‘전한前漢의 두자춘杜子春이 임종때 글을 지어 돌에 새기고, 무덤 앞에 파묻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전한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후한後漢 원평 원년(106)의 〈가무중의 처 마강(價武仲妻馬姜)묘지〉, 서진의 〈유도(劉韜) 묘지〉 등이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묘지의 시초인지는 확실치 않다. 위진(魏晋)시대에는 금비령(禁碑令)에 의해 묘비 대신 성행하였고,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이르러 묘지명의 체제가 정비되었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묘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는 공주 무녕왕릉武寧王陵의 것인데, 523년에 죽은 무녕왕의 능에서 나온 이 묘지는 지신(地神)으로부터 묘터를 산다는 토지 매매 계약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묘지가 많이 나타나는 시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인데, 묘지의 내용이 피장자의 가계나 신분 등 개인신상에 대한 것을 알려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