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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간구획

경간구획 徑間區劃 bay(영)

건축용어 중의 하나로, 건물의 내부공간 혹은 외부공간을 구획하는 구분. 보통 건물의 내부 공간을 구획한 부분, 기둥과 기둥 사이의 한 구획의 벽(교각의 사이)을 의미한다. 대개 연속적으로 서 있는 건축상의 지주가 한 구분씩 구획을 이룬다.

경덕진요

경덕진요 景德鎭窯
Jing-de-zhen-yao(중)

강서성江西省의 동북부 파양호鄱陽湖로 통하는 해운로인 창강昌江 남부의 부량현浮梁縣 경덕진景德鎭에 있는 도요*(陶窯). 남조시대(南朝時代)부터 자기*를 만들기 시작하여 당대(唐代)에 백자*를 제작했다. 오대(五代)에 당唐의 유명한 도자기를 모방하여 청자*와 백자 등을 생산했다.
송대(宋代)에는 더욱 많은 종류의 도자기를 제작했는데, 그 중에 청백자*(靑白磁)가 이름이 높았다. 청백자는 ‘영청자*影靑磁’라고도 하며 고령토*와 백돈자(白墩子)를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여 소성한 푸른 빛이 감도는 흰색 백자로, 명칭은 12세기초에 북경 상인들이 붙인 것이다. 북송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했고 기벽이 얇고 치밀질 백자보다 약간 낮은 화도에서 자기화되어서 백자처럼 견고하지 못하다.
원대(元代)에 궁정용 자기를 관장하는 부량자국浮梁磁局이 설치되어 14세기초부터 ‘추부백자樞府白磁’라는 새로운 치밀질 백자가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발달하여 현재의 백자가 되었다. 또한 청화(靑花), 유리홍(釉裏紅), 동홍유(銅紅釉), 난백유(卵白釉) 등 유명한 자기를 만들어냈고 송말부터 도자기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명청시대(明淸時代)에는 어기창御器廠이 설치되어 관요*(官窯)로서, 도자기 제작의 중심이 되었다. 명대의 오채(五彩), 두채(豆彩)와 첨백(甛白) 등 색유(色釉) 자기가 모두 여기서 창안되었다. 청대(淸代)에 들어서 여러 도공과 감독관 당영唐英 등의 노력으로 도자기술이 더욱 완벽해져서, 분채(粉彩) 뿐만 아니라 법랑채(琺瑯彩) 등 여러 새로운 종류를 만들어냈다. 또한 자기의 유색(釉色)과 조형, 장식이 매우 뛰어났다. 역대로 경덕진은 중국 도자의 중심이었으며 경덕진 동쪽의 고령산高嶺山은 양질의 자기원료가 풍부해서 ‘고령토’라는 세계적인 명칭이 나왔다.

경도화단

경도화단 京都畵壇

→ 교토화단

경상

경상 經床

→ ‘서안’ 참조

경직도

경직도 耕織圖

동양 인물 풍속화의 한 화제(畵題). 농민의 부지런함과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임금에게 알리고, 임금이 백성들의 생업인 농업과 잠업에 대한 정책을 힘쓰도록 촉구하기 위하여 제작되었다. 일종의 권계화*(勸戒畵)로 왕실의 교육에 이용되었다. 남송南宋의 화가인 누숙樓璹(로우 즈우)이 고종高宗에게 진상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절강성浙江省의 현령을 지낸 누숙은 빈풍칠월도*에서 힌트를 얻어 경직도를 그렸다고 한다.
농업과 잠업(蠶業)의 일을 시기 순으로 묘사한 경직도와 잠직도(蠶織圖)를 경직시(耕織詩)와 함께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경직도에는 농사를 짓는 21개의 장면이 묘사되고, 잠직도에는 베짜는 24개의 장면이 표현되어 총 45폭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각각 오언시(五言詩)를 붙이는데, 원본은 남아있지 않다. 이후 많은 경직도가 그려졌는데, <누숙경직도樓璹耕織圖>를 모본으로 제작된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가 가장 유명하다. <패문재경직도>는 청淸나라 강희 연간(康熙, 1662~1722) 때인 1696년에 초병정焦秉貞(자오 빙즈엉)이 투시원근법을 사용하여 제작한 것이다.
한국에는 조선 중기인 1498년에 <누숙경직도> 모본이 전래되었다고 추정된다. <패문재경직도>는 18세기 초엽이나 늦어도 중엽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경직도로는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논갈이> 등의 경직도와 작자미상의 <경직도>(독일 게르트루드 클라센 소장) 등이 있다. 조선 후기 풍속화 중에 종종 보이는 논갈이, 베짜기, 실감기 등의 장면은 경직도에 그 연원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계문

계문 契文

→ 갑골문

계화

계화 界畵

건물, 배, 수레 등을 소재로 자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여 정밀하게 그리는 것 또는 그 기법. 본래 실용적인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장인적이라고 하여 낮게 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하나의 점, 하나의 필획(筆劃)일지라도 자나 컴퍼스와 같은 도구에 의해서 정확성을 기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리는 대상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요구되기 때문에 학습이 필요한 분야다.
그 역사는 진대(晋代)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를 거쳐 수대(隋代)에 그 양식이 본격화되었다. 이사훈李思訓(리 쓰쉰), 동원董源(똥 위앤), 또 북송北宋의 곽충서郭忠恕(구어 쫑쉬),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처우 잉)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당대(唐代) 의덕태자묘(懿德太子墓)의 벽화에도 실례가 있으며 송대(宋代)의 〈황학루黃鶴樓〉 〈승왕각도勝王閣圖〉 등이 전한다.

계회도

계회도 契會圖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문인들의 계모임(契會)을 묘사한 그림. 조선시대에는 관아(官衙)의 동료나 과거의 동년(同年) 등이 명승지나 서당에서 계모임을 가졌는데 이를 기념하거나 기록하기 위하여 그 장면을 도시(圖示)했다. 특히 표제(標題)와 인적사항을 적은 좌목(座目)을 첨가하고 있다. 계회도는 옛날 문인들의 문화와 생활의 여러 단면을 그리고 있어 풍속적인 경향이 강하다. 전통문화 내지 회화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 觚

→ ‘이기’ 참조

고구려 미술

고구려 미술 高句麗美術

기원전 2~1세기에서 서기 7세기까지 약 700여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걸쳐 나타난 미술. 만주에 터전을 잡은 고구려는 중국과 화북 지방뿐 아니라 북방 이민족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서역 및 남시베리아의 영향을 많이 수용하였다. 또한 일찍부터 낙랑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또 그 고지를 점령한 관계로 낙랑 미술*의 전통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남쪽으로 퍼뜨리는 중간자 역할을 하였다. 그 묘제 미술과 불교 미술은 백제, 신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건축:고구려의 건축은 도성(都城), 궁궐, 사찰, 살림집 등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예가 없어 현재까지 알려진 궁궐터와 절터의 발굴 조사 및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건물의 그림, 문헌 기록에 의거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궁궐터로는 통구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의 안학궁安鶴宮, 그리고 장안성長安城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궁궐터 주변에는 전시(戰時)나 유사시에 피난, 방어를 목적으로 한 산성으로 위나암산성尉那巖山城(국내성)과 대성산성大城山城(평양)이 있었는데, 이는 도성제(都城制)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근년에 조사된 안학궁터는 한 변이 623m나 되는 마름모형 성벽 안에 남북 선상으로 북궁, 중궁, 남궁과 여기에 대칭 형식으로 동궁과 서궁이 배치된 대건축군과 정원 및 후원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남궁의 정전(正殿)은 정면57m, 측면27m로 그 규모가 장대하다.
현재 알려져 있는 고구려의 절터로는 평양 동북부의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와 대동군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등이 있어 고구려의 가람* 배치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청암리사지는 팔각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의 삼면에 금당(金堂)을 배치한 1탑3금당식의 가람 배치인데, 일본 최고의 사찰인 아스카테라飛鳥寺(596년 완성)의 건립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전각과 부속 건물 등을 묘사한 것이 많아서 당시 존재했던 일반 건축의 세부와 배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팔각주, 방주, 원주 등의 기둥과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 그리고 치미와 수막새 기와장식, 인자형(人字形) 대공*(臺工)과 동자주(童子柱)의 설치 등 근세까지 건조된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기본적으로 유사한 매우 발달된 건축양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평북 시중군時中郡 노남리魯南里와 북창군 대평리, 만주 집안 동대자 등에 당시의 집터가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시중군의 것은 주변에서 한 점의 기와도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서민층의 주택으로 보여지는데, 동서로 늘어선 네 개의 기둥구멍과 ㄱ자로 꺾인 두 개의 긴고래 온돌시설이 중요한 자료이다.
조각:현재까지 전해지는 고구려 조각의 유품은 극히 소수로 불교 조각이 중심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경문(經文)과 불상을 가지고 옴으로써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했다. 불교의 주된 예배 대상인 불상도 이미 4세기말부터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되지만 5세기까지 그 제작 연대를 밝힐 수 있는 고구려의 불교 조각은 아직 없다.
현존하는 고구려의 불상 중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예는 〈연가7년기미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己未年銘金銅如來立像〉으로 광배* 뒤의 명문*과 그 양식으로 보아 53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중국 북위北魏나 동위東魏 초의 불상 양식을 보이면서도 고구려 특유의 소박하고 강직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출토의 〈신묘명금동불입상辛卯銘金銅佛立像〉과 평양 평천리平川里 출토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 있는데, 후자는 삼국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 초기의 예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주목된다. 또한 평양 부근의 원오리元五里 출토의 〈니조불보살상군泥造佛菩薩像郡〉은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드럽고 풍만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6세기말에서 7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말기의 불상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는데, 이런 사실은 그 당시 도교가 국가적으로 유행되면서 불교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석조 조각으로 평양 부근 영명사지永明寺址 계단 석돌에 조각된 돌사자의 예를 볼 수 있다.
회화:고구려의 회화는 현재까지 알려진 통구와 평양을 중심으로 분포된 60여기의 고분벽화로서 알 수 있다. 특히 고분벽화 내용의 주제와 화풍에 따라 시대적으로 변천된 추이를 비교적 잘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4세기 중반에서 5세기에 해당하는 고분벽화는 묘주(墓主)의 초상을 중심으로 한 풍속화적인 요소와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그려졌는데, 신분에 따른 인체 비례와 초보적인 요철법*의 표현은 고졸한 면이 나타나면서 고구려 특유의 동적(動的)인 화풍이 드러나 있다.
황해도 안악3호분安岳3號墳(357)과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409)은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초기의 귀중한 예이다. 6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중기에는 풍속도가 유행하는데, 통구의 무용총舞踊塚과 각저총角抵塚이 이 시기에 속한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는 고구려 회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6세기말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고구려 후기의 고분에는 사신도가 주로 다루어진다. 통구의 사신총四神塚, 강서대묘江西大墓, 중화군 진파리眞坡里 고분군, 오회분사호묘五恢墳四號墓 오회분오호묘五恢墳五號墓에서는 동적이며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를 띤 고구려 특유의 화풍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고구려 회화가 일본 회화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과 쇼토쿠聖德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수장(繡帳)으로 고구려계의 화가들이 밑그림을 그린 〈천수국만다라수장天繡國曼茶羅繡帳〉, 석가모니불의 전생설화를 다룬 〈옥충주자玉蟲廚子(다마무시즈시)〉등의 작품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공예:고구려는 석실묘의 묘제를 채택한 관계로 도굴이 많이 자행된 탓에 전해지는 부장 유물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고분벽화를 통하여 공예미술의 일면을 추정할 수 있다. 관모는 고깔처럼 생긴 모양에 꼭대기에 새깃을 단 절풍(折風), 절풍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쓴 책왕이나 왕족이 쓴 관이 있다. 귀고리는 윗고리가 가는 세환식(細環式)과 태환식(太環式)이 있다. 이들은 모두 중간 장식과 드리개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삼국시대의 형식이다. 또한 허리띠와 띠꾸미개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