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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파

마하파 馬夏派

중국 남송南宋의 화원(畵院)에서 활약했던 마원馬遠(마 위엔)과 하규夏珪(시안 꾸에이)에 의해 형성된 화파로서, 주로 직업 화가들 사이에서 추종되었다. 마하 화풍은 강남 지방의 특유한 자연 환경과 이를 향유하는 인물을 소재로 하여 근경에 역점을 두되, 한쪽 구석에 치우치게 하는 일각구도*(一角構圖)로, 원경은 안개 속에 잠긴 듯 시적으로 나타내며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과 암벽의 표면은 부벽준*으로 처리하고, 굴곡이 심한 나무를 근경에 그려 넣는 것도 이 화파의 독특한 작풍이다.

마황묘

마황묘 螞蝗描

→ ‘인물십팔묘’ 참조

만다라

만다라 曼茶羅 Mandala(범)

‘만타라’라고도 한다. 여러 존상의 깨달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불(佛), 보살(菩薩), 명왕(明王), 신(神) 등의 일정한 체계와 조직을 바탕으로 하여 그린 그림으로 관상(觀想), 예배(禮拜)의 대상이기도 하다. 인도에서는 의식수법(儀式修法)을 할 때마다 토단(土壇)을 쌓아 그 위에 색분을 가지고 그렸는데, 티베트나 네팔에서는 사원의 벽이나 화포에 물감을 가지고 그린다. 라마교의 만다라는 인도의 탄트라 불교(密敎)와 마찬가지로 금강계 만다라(金剛界 曼茶羅)의 계통을 이어 받았는데, 일본에 전래된 금강(金剛)과 태장(胎藏) 양부의 만다라는 형식이나 내용이 다르다. 힌두교의 얀트라(yantra)와 유사한 기하학적인 선 속에 여러 존상을 작게 배치한 것, 특정한 존상을 중앙에 크게 그리고, 그 전후 좌우에 금강계 오불이나 그와 관련된 여러 존상을 배치한 것, 천상 제천의 궁전 가운데에 여러 존상 혹은 라마교 각 파의 조사를 병렬한 것 등 그 형식은 여러 가지이다. 주변의 신들 가운데에는 티베트, 네팔 등의 토속신을 받아들인 만다라도 있다.

만다파

만다파 mandapa(범)

힌두 사원*에서 예배나 의식을 준비하는 장방형의 공간으로 오리사Orissa 지역에서는 ‘자가모한(jagamohan)’이라고도 한다. 홀 또는 현관과 비슷한 공간으로서 대개 열주*로 둘러져 있으나 벽이 있는 경우도 있다. 성소인 비마나*의 전방에 위치하며 비마나와 연결되어 있거나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의식과 종교 활동이 복잡해지면서 다른 기능을 갖는 공간이 첨가되기도 한다. 오리사의 부바네쉬바르Bhūbaneśvar에 있는 링가라자Lingarāja 사원의 경우, 자가모한 앞쪽에 음식을 준비하는 장소인 보가만다파(bhogamandapa)와 춤의 방인 나타만디르(nātamandir)가 후대에 덧붙여졌다.

→ ‘힌두 사원’ 참조

만돌라

만돌라 mandorla(이)

신광*(身光). 이탈리아어로 원뜻은 ‘아몬드, 아몬드형(形)’. 신성한 광휘를 부여받은 사람(주로 그리스도나 성모)의 몸을 에워싸고 있는 편도(扁桃) 모양의 오로라나 윤곽선을 말한다. 신의 주위에 반원형의 모양을 그렸던 그리스 화병에서 기원했다고 추측되기도 하며, 둥근 방패나 메달에 인물의 흉상을 그려 넣었던 로마의 전통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만돌라는 5세기경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나타났다. 님부스(nimbus)가 머리에만 있는 후광을 가리킨다면, 만돌라는 신성한 인물 전체를 둘러싼 빛을 의미한다. 주로 신성함, 영광, 위엄의 발현, 신의 보호, 성스러운 일 등과 관련되어 사용된다. 특히 예수 부활 이후의 장면에서 천상에 오른 그리스도를 묘사할 때 가장 흔히 나타난다. 만돌라는 일반적으로 투명한 빛이거나 흰색, 푸른색, 금색으로 채색하여 표현한다. 여러 인물들이 동시에 하나의 만돌라에 포함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만화

만화 漫畵
comic strips, cartoon(영) bande dessinée(프)

익살맞은 주제를 생략적인 수법으로 나타낸 회화*의 한 형식. 대상의 성격을 과장하거나 변형하여 인생이나 사회를 풍자하거나 비판하며, 특히 정치 풍자, 일상 생활의 유머, 난센스 등을 주제로 다루어 웃음을 제공한다. 만화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과장된 인물화*를 캐리커처*(caricature)라고 하며, 한편 시사 만화나 한 장면만으로 구성된 만화는 카툰*(cartoon), 네 컷 이상이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만화를 코믹스(comics) 또는 코믹 스트립스(comic strips)라고 한다. 이처럼 만화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우리만큼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만화의 개념은 비교적 근대에 정착되어 사진*, 영화와 더불어 근대 복제미술*의 한 분야를 형성하고 있다. 일찍이 서양의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의 벽화*에서 동물을 의인화하였으며, 그 풍자의 의미는 전해지지 않지만 만화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또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만화가 그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폼페이 벽화 중 어떤 것은 외설적이지만 만화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형태의 만화는 19세기경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판화*기술의 발전은 만화가 대중에 파고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저널리즘을 통해 보급되었다.
19세기초 프랑스에서는 《실루엣》(1829)을 시작으로 《카리카튀르》(1830), 《샤리바리》(1832) 등 만화신문이 매주 발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도미에Honoré Daumier(1808~1879) 등의 작가들이 석판 만화가로서 활약하였다. 프랑스에서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 등이 풍속만화를 그릴 무렵인 1895년 미국에서는 신문에 연재만화인 코믹 스트립스가 최초로 등장하였다. 《뉴욕 세계The New York World》지에 실린 아우트콜트Richard Felton Outcault의 <옐로 키드Yellow Kid>를 시작으로 20세기에 들어서 연재만화와 스토리만화가 성행하였다.
또 움직이는 만화인 애니메이션*도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단순히 오락적인 기능을 위해 발행되기 시작했던 만화는 오늘날에는 가장 대중적인 시각 매체 중 하나가 되었다. 한때 만화는 호가드William Hogarth(1697~1764), 도미에 같은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최근에는 역으로 화가들이 만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20세기의 몇몇 미술가들은 상업 디자이너로서 출발하기도 했는데 이들 중 파이닝거Lyonel Feininger(1871~1956)는 1906년 두 종류의 만화 시리즈를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만화가 진정한 자기 영역을 차지한 것은 미술가들이 기능이 다양해진 만화에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광고나 포스터*처럼 만화는 많은 현대 화가의 작품 속에 도입되었다. 이들 현대 화가 중 어떤 작가는 만화를 단순히 일시적인 모티브*로 사용했지만, 어떤 작가들은 그 형식과 테마까지 도입했다.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콜라주*를 만들었던 콜린스Jess Collins가 전자를 대표한다면, 1958년 이래 전 작품의 기초를 만화에 두었던 팔스트륌Oyvind Fahlström(1928~1976)은 후자의 전형적인 작가이다.
만화의 연속적인 구성과 장면을 차용한 팝 아트* 작가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1998)을 비롯해 아다미Valerio Adami(1935~ ), 텔레마크Hérve Télémaque, 랑시야크Bernard Rancillac, 다칸젤로Allan d’Arcangelo(1930~ ), 알트Otman Alt 등 많은 현대 화가들은 작품에 만화의 형식과 내용을 직접적으로 도입하였다. 한편 현대 만화의 발전은 팝 아트와 SF소설의 발전과도 연결되어 있다.

망량화

망량화 魍魎畵

매우 맑고 옅은 묵으로 그리는 수묵화*의 일종. 중국 남송南宋의 지융智融(즈 롱)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남송 후반부터 원대(元代) 초기에 걸쳐 많이 제작되었다. 주로 선종화가(禪宗畵家)의 묵희(墨嬉)로 그려져 선종적인 주제를 많이 다룬다. 무준사범無準師範, 솔옹率翁(直翁), 문무관門無關, 호직부胡直夫(후 찌후), 이요부李堯夫(리 야오후) 등의 작자명이 붙어 있고, 남송 후반의 고명한 선승의 화찬(畵贊)이 쓰여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의 유품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일본에 보존되어 있다.

망막의 미술

망막의 미술 Optical Art(영)

→ 옵 아트

망주석

망주석 望柱石

무덤을 꾸미기 위해 무덤 앞, 양 옆에 하나씩 세우는 돌기둥으로 멀리서 바라보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한 표지의 기능을 가진다. 중국에서는 ‘화표주(華表柱)’라고 불렀는데 본래 분묘가 있던 곳에 세운 표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의 괘능과 흥덕왕릉에서 처음 발견된다. 조선시대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능원에 설치되는 망주석은 기둥과 대석(臺石)으로 나뉘어졌으며 기둥의 길이는 7자 3치이며 아랫부분의 7치 정도는 둥굴게 깎아내 대석의 팬 곳에 세우도록 정하였다.

망천도

망천도 輞川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당대(唐代)의 문인화가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가 망천에 은거하며 자신의 별장과 주변 경치를 그린 그림이다. 망천은 장안長安 교외의 남전현藍田縣에 있는 곡천(谷川)이다. 왕유는 이곳에 망천장輞川莊이라는 별장을 짓고 문인들과 함께 풍류생활을 즐겼다. 뛰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문인들의 교유를 주제로 한 이 그림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지만 후대까지 산수화의 화제로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많은 모사품이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오대(五代)의 곽충서郭忠恕(구어 쫑쉬)가 모사했다고 하는 것과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이 모본했다는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