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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서 共觀福音書
Synoptic Gospels(영)
신약성서 중에서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의 3서(書)를 가리킨다.
→ ‘복음서’ 참조
공동작 共同作
cooperated works(영)
복수의 예술가가 동일한 작품을 대등하게 분담, 제작하는 것. 이는 스승이 제자나 조수에게 원안을 주어 그리게 하고 가필, 수정하여 완성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공동제작 개념으로 잘 알려진 경우는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와 브라크Georges Braque(1882~1963), 뒤샹Marcel Duchamp(1887~1968)과 만 레이Man Ray(1890~1977) 등의 상호 인용을 들 수 있다. 특히 전후의 현대미술에 있어서 공동제작이 보다 전략적인 의미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의 앙상블 아티스트인 길버트와 조지Gilbert & George로 대표되는 1960년대의 개념미술*에 있어서이다. 1970~1980년대에 걸쳐서는 바르트Roland Barthes의 《작가의 죽음》, 에코Umberto Ecco의 《열려진 작품》이라는 구조주의 혹은 후기구조주의의 테제(these)에 호응하는 형태로서 복수의 주체 사이에 함수화되어진 텍스트 공간으로 작품(행위)을 생성시키는 시도가 많이 출현했다.
공동체 미술 共同體美術
community art(영)
박물관의 죽어 있는 예술과 상반된 것으로 화랑이나 무대라는 상황을 벗어나 예술행위를 구체화하고, 사회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특정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욕구를 가진 일군의 예술가들의 활동. 공동체 예술가들은 특정 예술 형태들 사이의 특성을 초월하여 거리의 무대, 비디오, 벽화*, 교통수단, 기구, 놀이구조 따위를 이용한 보편적인 매체 접근 방법을 쓴다. ‘액션 스페이스Action Space’와 ‘인터액션Interaction’과 같은 그룹이 지역공동체 중심의 역할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관객들과의 일차적인 만남은 거리, 공공건물 등과 같은 환경 속에서 작품을 성취함으로써 형성된다. 1970년대의 공동체 미술 운동은 1960년대의 반문화로부터 발전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점차 공식화되고 제도화되었다. 공동체 예술가들은 전문가, 직업적인 예술가들과 비전문가들 사이의 구분을 없애는데, 이러한 접근 방식은 공동체 벽화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공방 工房 workshop(영)
예술가, 장인 등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방 혹은 작업장. 후에 뜻이 바뀌어 공통의 기반 혹은 방침 아래 제작하는 예술가나 직인(職人) 등의 집단을 가리킨다. 아틀리에*와 거의 같은 뜻이지만 공방이라는 말에는 ‘물건을 만드는 곳’이라는 뉘앙스가 짙다. 문명이 발생한 곳 특히 예술이 권위 표상의 수단으로서 큰 구실을 하는 경우에는, 지배자는 직속 공방을 설치해 놓고 제품의 질을 높이고 디자인을 통일하는 것이 상례였다.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등의 미술은 그 배후에 대규모 그리고 조직적인 궁정 공방의 존재를 상상케 한다. 하지만 공적인 조직으로서의 기술자 집단이 확인되는 것은 고대 로마*로서, 율리우스 법에서는 ‘콜레기아Collegia’라는 동업자의 단체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서양 중세에 있어서는 대성당 건조에 필요한 모든 분야의 집단이 일단이 되어 그 사업에 종사했다. 비잔틴에서는 궁정에 통괄되어 있었지만 서구에서는 수도원에 부속되었고 중세 말에는 우수한 공인을 가지는 공방과 그 연합조직인 동업조합을 형성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개개의 공방이 자립한 기업가로서 수도원에서 독립하였고, 16세기 피렌체에서는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jo, 베로키오Verrocchio(c.1435~1488) 등의 대공방을 낳아 고객의 주문에 따라 제작했다. 공방은 근세까지 기술의 전승과 공인의 교육이라는 기능을 다해 왔지만 아카데미*의 성립과 함께 두 가지 기능은 후자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다.
공상화 空想畵
picture of imagination(영)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 또는 실제로 체험하지 않은 사상(事象) 등 비현실적인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여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공상화는 아동화(兒童畵)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에는 동화나 미지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 등을 상상하여 그리는 그림을 말한다.
공양인상 供養人像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현실의 인물, 즉 불상에게 공양을 바치는 모습으로 표현해놓은 것. 이것을 통해 신도들은 자신의 ‘공덕(功德)이 체현(體現)’되었다고 믿었다. 이런 형식을 ‘예불도(禮佛圖)’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관료와 귀족이 많으며 일반 민중들도 있는데, 불단(佛壇)의 앞, 또는 석굴입구, 전문(殿門)의 양 옆에 배치된다. 대개 불상보다 크기가 작고, 단신 또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예불도’는 여러 사람들의 배역 또는 행진의 장면이다. 예를 들면 용문석굴* 빈양중동賓陽中洞의 〈제후예불도〉가 가장 대표적이다.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 제123굴에는 북위北魏의 〈남녀동공양니소男女童供養尼塑〉가 있다. 그 모습은 두 공자가 공수(拱手)를 하고 어린아이의 복식을 하고 있다. 조각 수법은 세련되었으나 형상이 귀여워 종교적 색채는 별로 없다. 산서성山西省 평요현平遙縣 쌍림사雙林寺 천불전千佛殿의 남녀공양인 채소(彩塑)는 조각이 정밀하고 움직임이 자연스러워 명대(明代)를 대표할 만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공현석굴* 제1굴 문안 양쪽에 있는 공양인 행렬상은 구도가 간단하면서 세련되었으며, 형상도 생동적이고 현재까지도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공예 工藝 crafts(영)
실용적 가치와 미술적 가치를 겸해서 가진 조형품의 총칭. 공예는 생활에 유용한 물건을 제조하는 공업과 미를 창조하는 예술의 두 영역이 중첩되는 곳에서 성립된다. 근대의 예술 관념이 성립되기 이전에는 공예의 개념도 명확하지 않아, 예술과 공업은 미분화된 채 통일되었으므로 모든 조형품이 공예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공예가 새로 인식되게 된 것은 19세기로, 특히 영국의 미술과 공예운동에 의해서였다. 일반적으로 비교적 소규모의 조형에 한정시켜 건축에 포함시키지 않는 공예는 도예, 금공, 염직, 글라스 공예, 가구 등 그 분야가 광범위하며, 전통적으로는 수공예에 의한 것이 주가 되지만, 근대 기계화에 의한 제품도 포함시킨다. 이러한 공업제품에 대해서 현대에는 산업 디자인*이라는 독립된 조형 활동의 분야가 있다. 한편 오늘날에는 공예라는 이름 아래 실용성이 전혀 없는 자유로운 조형이 시도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공필 工筆
동양화를 그릴 때 표현하려는 대상물을 어느 한 구석이라도 소홀함이 없이 꼼꼼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기법. 가는 붓을 사용하여 상세하게 그리고 채색하여 화려한 인상을 준다. 주로 정밀한 묘사를 필요로 하는 화조화*나 영모화*에 많이 사용되며 사실적인 외형모사에 치중하여 그리는 직업화가들의 작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사의*(寫意)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공현석굴 鞏縣石窟 Gongxian(중)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서방 약 50㎞, 공현에 있는 불교석굴군. 현성의 서북 2㎞, 낙수洛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대력산 산기슭에 있다. 원래는 정토사淨土寺로 불렸으나 현재는 석굴사石窟寺로 불린다. 동(東)에서 서(西)로 대굴 5개소가 남면에 늘어서 있는데, 이 중에서 제3, 4동(洞) 사이에 〈마애대상磨崖大像〉이 있다. 약간 푸른 기를 띤 사암(砂岩)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양식과 제2동과 3동의 조상기(造像記)로 미루어 북위北魏 후기(6세기 초)의 조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석굴내외에는 동위~초당 시기의 소불감(小佛龕)이 200여개 남짓 있다. 제2, 3, 4 동은 탑주굴(塔柱窟)로서 탑주사면에는 좌불의 오존감(五尊龕)이 있으며 또한 제2, 3 동에는 귀인공양자 행렬의 부조가 있다. 지리적, 시대적으로는 용문석굴*에 가까우나, 용문석굴의 불상에 비해 공현석굴의 조상은 소박하면서도 밝아서 남조양식(南朝樣式)의 영향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