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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지오

네오 지오 Neo-Geo(영)

1980년대 중반 이후 시뮬레이셔니즘의 중심 개념의 하나로서 ‘신(新)기하학적 개념주의(Neo-Geometric Conceptualism)’의 줄인 말이다. 네오 지오, 혹은 시뮬레이션* 아트라고 불리는 경향 등을 논한 포스터Hal Foster의 글이 《아트 인 아메리카Art in America》(1986, 6)에 실렸는데, 이 글을 필두로 네오 지오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1980년대초, 뉴 페인팅*이 구미에서 각광을 받았던 시기에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의 인터내셔널 위스 모뉴먼트, 네이처 몰트, 제이 코니 모던 아트, 캐시 뉴 하우스 화랑 등 대안 공간*에서 새로운 세대의 미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대다수의 컬렉터와 비평가들에게 무시당했지만 젊은 큐레이터와 컬렉터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지지되고 선전되어졌다. 이 작가들의 작품은 표현적인 것과 구상회화에 지쳤던 사람들에게 미디어, 테크놀로지 그리고 광고에 의한 시각 표현의 독점이 거의 완료된 일렉트로닉스 시대에 있어서 설득력 있는 예술적 모델로서 제공되었는데, 그것은 기하학적이며 신 기술적 표면감이 돋보이는 냉정한 이미지의 작품들이었다.
네오 지오는 보통 비커턴Ashley Bickerton(1959~ ), 헤일리Peter Halley(1953~ ), 쿤스Jeff Koons(1955~ ), 바이스만Meyer Vaisman의 작품을 가리키는 개념인데 이들의 작업은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는 까닭에 그 본래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모더니즘*의 비판으로서, 추상에 대한 언급을 하는 추상의 거짓 양태를 만들어내며 그 모의적(模擬的)인 것에 의한 표층적인 추상의 전개를 구성하는데 최소한의 공통적인 발상의 부분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보들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레이션 이론에 따라 제작한 헤일리의 테마는 현대의 ‘기하학적 생활’의 모의적 체감에 있다. 헤일리의 작품은 언뜻 하드엣지*와 같은 양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는 회화 공간 등에는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감방과 같이 밀폐된 공간, 전화선과 컴퓨터, TV 네트워크에 의해서만 외부 세계와 접속되는 현대인의 고립을 기묘한 추상적 형태로 교묘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유명인사의 흉상처럼 생긴 위스키 병들의 키치* 상품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복제한 쿤스의 작품들은 비록 기하학적인 형태와는 거리가 멀지만 미디어로 둘러싸인 현실의 상황이 현실의 증발을 의미하고 있을 때, 새로운 현실로서의 복제라는 차원에서 하나의 모의이며, 그 점에서는 통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는 네오 지오 작품들의 공통점은 팝 아트*의 냉정한 아이러니에 대한 관심과 개념미술*을 사용하여 1980년대 뉴욕 경제 호황기에 활기를 띤 미술시장의 성격과 관계된 이슈를 제기한 것이다.
1987년 런던에서 열린 <뉴욕미술의 현재>라는 제목의 사치 컬렉션(saatchi collection) 전시회는 혹평이 난무했고, 이것은 네오 지오 운동에 대한 국제적 열기가 식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에 이르러서는 네오 지오라는 용어를 거의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네오 지오와 관련되었던 미술가들은 지금까지도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다.

네온 조각

네온 조각 neon sculpture(영)

네온사인과 형광등을 이용한 작품.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주로 미국에서 시도되었던 일련의 경향을 가리킨다. 네온 조각은 다양한 상황, 즉 키네틱 아트*, 팝 아트*, 추상 구조물 등에서 이용되었다. 조명이라는 원리에 근거를 둔 네온과 형광은 가느다란 튜브에 의해 모양이 갖춰지고,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닐 수 있으며, 또 상업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었다.
팝 아트에서 네온은 시걸George Segal(1924~ )이나 인디아나Robert Indiana(1928~ )와 같은 작가들에 의해 상업적 이미지로 환경적 효과를 내기 위해 이용되었다. 네온은 크리사Varda Chryssa에 의해 보다 조각적인 장르에 접근하게 되었고, 또 뚜렷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크리사는 1962년부터 네온을 이용하여 단색, 다색의 조명, 미묘한 빛의 연속, 플라스틱 유리 속에서 반복되는 빛의 형태, 그리고 전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여러 과정을 표현하였다.
보다 추상적이고 환경적인 효과는 플래빈Dan Flavin(1933~ )의 형광 배열에 나타나 있다. 그가 빛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였는데, 플래빈은 상업적으로도 유용하게 쓰이는 형광 튜브로 작업하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네온 아티스트로는 안토나코스Stephen Antonakos, 번스Ben Berns, 애플Billy Apple 등이 있다.

네이브

네이브 nave(영)

→ 신랑

노르만 양식

노르만 양식 Norman Style(영)

노르만은 원래 ‘북방인’이라는 뜻. 8세기말부터 스칸디나비아 방면에서 해상으로 남하한 바이킹에 서구 사람들이 붙인 이름. 노르만 양식이라는 용어는 미술사상 다음 세경우에 사용된다. ①노르만인이 911년 서북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노르망디 공국), 11세기 이후에 전개된 로마네스크 미술*의 한 양식. 주미에주의 노틀담 성당을 전형으로 하는 건축에 그 특색이 있고, 특히 계상랑(階上廊)과 높은 창을 갖는 삼층 구조, 목조 천장을 받치는 격벽(隔璧)과 아치* 등이 주목된다. ②노르망디 공의 잉글랜드 정복(1066)과 함께 노르만 양식이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서 발전한 양식으로 앵글로 노르만 양식이라고도 한다. 그 전형의 하나인 다람 대성당은 주미에주의 흐름을 계승하며 일찍이(1104년 이전) 교차 늑재 궁륭*을 실현했다. ③일부 노르만 인이 더욱 남하하여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에 정착하고 11세기 이후 시칠리아 왕 로게리우스 2세 시대에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최전성기에 이른 미술 양식으로, 비잔틴과 이슬람 미술의 접촉으로 이룬 건축 장식 양식에 특색이 있고, 몬레아레 대성당이 대표적이다.

노홍초당도

노홍초당도 盧鴻草堂圖

고사(高士)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노홍盧鴻(루 홍)은 당唐나라 때에 숭산嵩山에 은거했던 고사이다. 이름을 ‘홍일鴻一’이라고도 한다. 개원 연간(713~141)에 여러 번 황제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숭산에 영극寧極이라는 초당을 지어 은일했다. 그는 박학하고 서화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림은 산수와 수석(樹石)에 뛰어났는데, 평원(平遠)의 아취가 있고 청아한 기운이 있다 하여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와 비견되었다. 숭산의 초당은 관영(官營)으로 5백명의 학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초당의 모습을 스스로 그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림은 <초당십지도草堂十志圖>라 하여 작은 초가집에 개울을 그리고 한두 사람의 인물이나 자연의 정경을 그리는 것으로 구성된다. 초당, 도경대(倒景台), 월관(樾館), 침연정(枕煙庭), 운금종(雲錦淙), 사선등(斯仙磴), 척번기(滌煩磯), 멱취정(冪翠庭), 동원실(洞元室), 금벽담(金碧潭) 등 10경으로 되어 있다. 모사본이 대북臺北 고궁박물원과 오사카大阪 시립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녹각법

녹각법 鹿角法

나무를 그리는 방법 가운데 하나. 사슴뿔 같은 가지를 가진 낙엽 광엽수를 그리는 방법이다. 가을 숲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며, 주로 농묵을 써서 그린다. 봄 경치에는 옅은 녹색의 작은 점을 찍어서 나타내고, 늦가을의 숲은 붉은 색의 작은 점을 찍어서 붉은 잎사귀를 나타낸다.

논커미션드 포스터

논커미션드 포스터 non-commissioned poster(영)

주문에 따르지 않고 그리는 형식의 포스터*. 프랑스의 사비냑Raymond Savignac이 제2차세계대전 직후의 1950년에 파리에서 이러한 명칭의 전시회를 연 다음부터 유행하게 되었다. 사비냑은 이런 식으로 포스터를 제작함으로써 작가가 포스터 디자인에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농민회화

농민회화 農民繪畵
peasant painting(영)

1966년 중국의 문화혁명 이후 농민들이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 중국의 사회적, 기술적 진보를 묘사하고, 농사일, 건설 작업, 정치, 집회, 마을 재건 및 일상사를 묘사한 작품들이 많다. 훈련받지 못한 농민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기술적으로 비교적 숙달되어 있고, 양식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즉 밝고 평면적이며 상징적인 색채들, 정확한 윤곽선으로 그려진 힘있는 드로잉, 전면의 균일한 장식적 효과, 중심이 없는 구성 등이 그 특징이다.
농민 회화는 서구의 만화책 방식의 예술과 전통적인 중국화를 잘 혼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고 있다. 농민회화의 사실주의는 현실을 순수하게 외연적으로 언급하기 위해 수사학과 함축성을 없애버리는 사실주의*의 서구적 변형이 아니라, 수사학적 태도를 받아들이고 리얼리티로서 사회적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는 사실주의이다. 즉 색채는 사회적, 상징적, 장식적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나, 결코 색채만을 위해 분리되지는 않으며 항상 이념적인 목적에 종속된다.

누각산수

누각산수 樓閣山水

동양화에서 산수와 높은 누각, 정자 등을 조합하여 구성하는 산수화. 그 제작은 북송北宋 무렵부터 활발해진다. 곽희郭熙(구어 시)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따르면, 산수에 누각이 있는 것은 그 곳이 명승지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누금세공

누금세공 鏤金細工 filigree(영)

얇은 금판 위에 작은 금 알갱이를 붙이면서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 이집트의 12왕조때 출현해서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등지에서 발달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성행하였다. 한반도에 전래된 누금세공법은 평양 석암리石巖里에서 출토된 〈대금구帶金具〉가 북방계 양식이고, 신라의 유물에서도 서역적이고 북방적인 요소가 보여 중앙아시아를 통한 북방 유목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금 알갱이를 만드는 방법은 얇은 금판을 잘라 가열하여 둥근 입자를 만들거나, 잘라낸 금판을 탄분 사이에 층을 이루며 끼워서 가열하기도 하며, 금사(金絲)를 ‘입불대’로 가열하여 잘라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금을 녹여서 작은 구멍이 있는 체 같은 것에 부으면서 찬물에 내려 식혀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든 금 알갱이는 대개 용융온도가 낮은 금속가루나 붕사, 혹은 염화동을 사용하여 금판에 붙인다. 한반도의 누금세공법중 최고(最古)의 것은 평양의 석암리 9호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금제금구이고 특히 신라에서 크게 성행하였는데 귀고리, 팔찌 등의 장식에 많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