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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아 양식

도리아 양식 Doric Style(영)

그리스 건축의 초기 양식으로서, 도리아계 그리스인들이 발전시켰고 이후 로마인들이 수정하였다. 도리아 식의 기둥은 거의 세로홈(fluting)이 있으며, 주초(柱礎, base)가 없다(로마의 도리아 양식은 주초가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단순한 형태의 주두* 및 트리글리프*와 메토프*로 구성된 엔타블러처*의 프리즈*이다. 상단에 있는 코니스*의 아랫부분에는 ‘뮤튤*(mutule)’이라는 작고 납작한 일련의 벽돌이 있다. 장식적인 뮤튤과 그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트리글리프는 초기 목재 건축물의 구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뮤튤은 목재 처마 밑에 보이는 서까래 끝에 해당되며, 트리글리프는 지붕 들보에 해당한다. 뮤튤과 트리글리프는 구테(guttae)라는 작은 막대모양 장식에 의해 고정되었다.
초기의 그리스 도리아식 사원의 원주*는 굵으며, 이후의 것들보다 더 촘촘한 간격으로 세워졌다. 도리아식 원주는 고전 양식 중에서 가장 견고하고 꾸밈없는 기둥으로서 그 비례가 남성 신체의 비례와 관계된다고 여겨졌다. 실상 도리아 양식은 막사, 도시성문, 감옥 등 방어적이고 공격적이거나 실용적인 건축물에 특히 적합하게 보였다. 또한 도리아식 주식*은 콜로세움의 하층을 이루면서 다른 주식들을 지탱하는 강한 성격을 보여준다.

→ ‘엔타블러처’‘주식’ 도판 참조

도리원도

도리원도 桃李園圖

동양 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당대(唐代)의 시인 이백李白(리 바이)의 병려체(騈儢體) 문장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書》에 입각하여 그린 상상화이다. 복숭아꽃(桃)과 오얏꽃(李)이 만발한 정원에 등불을 켜고 술잔을 기울이며 시작(詩作)을 즐기는 문인들을 그린 작품이다. 오랜 작례로 명대(明代)의 구영仇英(처우 잉)과 성무엽盛茂燁(츠엉 마오이에)의 작품이 알려져 있다.

도무스

도무스 domus(라)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고대 로마의 부유층이 사는 고급 주택으로 중산층의 집합주택인 ‘인수라(insula)’와 구별된다. 첫번째 안뜰인 아트리움*은 오락을 하거나 일을 하는 데 사용되고, 두번째 안뜰은 대개 정원이 딸려 있으며 열주랑이나 열주*로 둘러싸여 있다. 폼페이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

도미니크 수도회 Dominican Order(영)

툴루즈에서 성(聖) 도미니크가 1206~1216년 에 창건한 로마 가톨릭 교회 내의 탁발 수도회. 프랑스 프루유에서 설립하여,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공식 인가를 받았다. 복음의 전파를 목적으로 신학의 학문적 중요성을 깨닫고 파리 대학을 비롯해 쾰른, 볼로냐, 옥스퍼드 등의 명문대학에서 성서와 설교 및 신학, 철학, 교회법 등을 연구하여 학문적인 공헌을 하였다.

도사파

도사파 土佐派

야마토에*(大和繪)를 고수한 도사씨(土佐氏)를 중심으로 하여 세습적으로 형성된 15~17세기 일본의 대표적 궁중 어용화파의 하나. 무로마치*(室町)시대에는 가노파*狩野派, 운코쿠파*雲谷派와 함께 3대화파의 하나였으며 가노파와 함께 에도시대*(江戶, 1603~1867) 말기까지 일본화단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도사파 양식*은 헤이안시대*(平安)와 가마쿠라시대*(鎌倉)의 순 일본적 세속화의 전통인 야마토에로 계승되었다. 이들 화파의 그림은 궁중의 에코도로(繪所)를 세습적으로 지내면서 형성되었다. 족보에 따르면, 그 효시가 헤이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17세기에 조작된 것이며 실제로는 15세기의 후지와라 유키미쓰藤原行光와 그 아들 도사 유키히로土佐行廣가 그 시조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작품은 대개 헤이안시대와 가마쿠라시대의 세속화의 전통에 따라 소재와 기법을 반복하는데 그쳤지만 도사 미쓰노부土佐光信와 같은 몇몇 화가의 작품은 당시 귀족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도사파의 마지막 대가였던 도사 미쓰요시土佐光吉는 오사카大阪 근처의 상업항구인 사카이堺로 이주하여 부유한 상인들의 후원을 받았으며, 모모야마(桃山)시대의 가노파 화가들에게 채색법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그 손자 도사 미쓰오키土佐光起는 궁정 에코도로의 책임자 지위에 올랐으며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19세기까지 그 직책을 승계받았으나 화풍상의 발전은 없었다.

도산시대 미술

도산시대 미술 桃山時代美術

→ 모모야마시대 미술

도상

도상 圖像 icon(영)

고대 그리스어 ‘에이콘(eikón)’에서 유래된 용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벽화*와 구별되는 판화*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미술사에서 말하는 도상은 신성한 사건, 특히 성자들의 성상을 뜻하는데, 특히 비잔틴 교회나 러시아 및 그리스의 정교회에서 사용되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도상의 사용은 초창기부터 있었던 일이었지만, 313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습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 유행한 황제의 초상에 대한 숭배 풍습에서도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한편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상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종교의 진리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하는 이설(異說)을 설교하여 이러한 경향에 영향을 미쳤다. 8세기에 들어 이러한 경향은 절정에 이르렀고, 곧 성상파괴주의*자들에 의한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 콘스탄틴 5세는 십자가를 제외한 모든 도상의 파괴를 명령했으며 패널*화, 프레스코*, 모자이크*는 물론 성인의 그림이 삽화로 들어 있는 책자들까지 파괴되었다.
그후 843년 제2차 종교회의 등으로 도상의 사용이 예배 의식을 위해 부분적으로 허용되면서 도상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즉 종교 회의에서 진실된 예배는 오직 신적인 속성에 속하지만, 신의 표상에 의해 경배심이 촉진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도상은 일련의 규칙과 양식상의 엄격한 기준에 의해 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중세의 도상들이 유형화를 견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동방교회에서는 도상 허용론자들이 실권을 잡으면서 도상이 다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들 도상들은 단순한 인물상에서 점차 정경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에 있는 모자이크화인 <수태고지*>라든지,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있는 예수의 생애를 그린 패널화 등이 그러한 예이다. 도상화나 도상을 사용하는 예배의식은 러시아로 전파되었고 비잔티움을 능가할 정도로 유행되어 러시아 혁명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한편 도상은 예술작품의 ‘주제’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이른바 도상학* 혹은 도상 해석학* 등의 용어가 바로 그 예이다.

도상학

도상학 圖像學 iconography(영)

그리스어 ‘eikón’과 ‘graphein’의 합성어로서 ‘형태묘사’라는 의미. 상징성, 우의성, 속성 등 어떤 의미를 가지는 도상*을 비교하고 분류하는 미술사*의 한 분야. 고대 그리스에서는 미술품의 목록 제작을,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대 초상화*를 감정하는 작업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일반적으로 조형미술의 주제를 연구하는 학문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도상학의 과제는 회화*와 조각*의 내용*과 테마의 규정, 순환 또는 상징*에 관한 프로그램의 규정, 그러한 테마와 프로그램의 묘사 유형의 생성, 확장, 변화의 연구이다. 도상학은 해석이 아니라, 명칭이나 개념 또는 텍스트를 인물, 알레고리*, 설명적인 묘사나 순환에로의 배열을 통해 분류화하는 것이다.
도상학은 보통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뉘어진다. 기독교적 도상학에 대한 작업은 1850년이래 종교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에 부응하여 프랑스에서 디드롱Adolphe-Napoléon Didron에 의해 최초로 생성되었다. 도상학의 종교적인 연구 결과는 《기독교 미술의 인덱스Index of Christian Art》와 백과사전에서 종합되었다. 세속적인 미술의 상징주의*에 대한 연구에는 바르부르크Aby Warburg(1866~1929)와 더불어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1892~1968)가 가장 큰 기여를 하였다.
이로 인해 도상학이 조형미술을 감정하는 데 필요한 단순한 보조물 이상의 체계적인 연구가 되었다. 예를 들어 점성학 필사본* 속에 흔히 그려져 있는 유성들의 상의 변천, 풍속화의 발생 원인, 정물화*의 기원, 정치적 풍자의 도입 등 제반 문제들이 다루어진다. 결국 도상학은 개개 작품에 있어서 이념과 형상의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러한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는 다양한 요소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도상해석학

도상해석학 圖像解釋學 iconology(영)

도상학*에서 발전하여 도상*의 본질적인 의미를 해석하고 내용과 형식간의 관계 체계를 연구함으로써 종합적인 미술작품의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미술사* 연구 방법의 하나. 바르부르크Aby Warburg(1866~1929)에 의하면, 도상해석학은 문화에서 조형적 묘사의 기능과 사용에 대한 연구이다.
‘도상해석학’이라는 용어는 1593년에 출간된 리파Cesare Ripa의 《이코놀로지아Ikonologia》에 기인한다. 이 책은 우정이라든가 비탄, 사랑 등의 수많은 개념을 의인화하여 도해한 일종의 도상 어휘사전이다. 훗날 이 용어는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1892~1968)에 의해 다시 채택되었는데, 그는 시각예술에 있어서 단순히 주제를 확인하는 학문인 도상학에 대응하여 시각예술의 의미를 분석하고자 하는 보다 폭넓은 접근방식을 뜻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대응을 통해 도상해석학은 주로 회화적 모티브*의 전통과 그것의 의미를 탐구한다.
파노프스키는 미술 작품을 어떤 특정한 문명이나 시기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구체적인 기록으로의 취급 필요성과, 그리하여 미술사와 다른 영역의 역사적인 연구 작업과의 간격을 메워줄 필요성을 강조했다. 뛰어난 도상해석학 분야의 연구 업적으로는 파노프스키의 저서 《르네상스와 서양 미술에서의 르네상스》(1960)와 비트코우어Rudolf Wittkower의 《인본주의 시대에 있어서의 건축의 제원리》(1952) 등을 들 수 있다.

도석화

도석화 道釋畵

도교나 불교의 인물을 그리는 그림의 총칭. 당대(唐代)까지는 산수화*보다 우선하는 주제였으며,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 장승요張僧繇(즈앙 썽야오), 오도자吳道子(우 따오쯔) 등이 대표적인 화가이다. 당말 오대(唐末五代)에는 전통적인 묘선과 자연주의를 벗어난,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수묵의 도석화가 그려지게 되었고, 감상화로서 커다란 변화와 풍부함을 갖게 되었다. 옷무늬의 형식에서도 ‘조의출수(曹衣出水)’ ‘오대당풍(吳帶當風)’의 전형이 생겨날 정도로 이 시대의 도석화의 양식은 후세까지 모범적인 양식으로 추앙을 받았다. 또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리 꽁린, 1040~1106) 등에 의해서 당대의 백화(白畵)가 재현되었다. 그 후에 착색, 수묵, 백묘*(白描)의 화법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특히 수묵 도석화는 선승(禪僧)의 여기(餘技)로 취급되어 작품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