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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배지붕

맞배지붕

가장 간단한 지붕형식으로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짓는 지붕. 집의 앞뒤로 평면에 따라 길쭉하게 지붕이 구성되어 가늘고 긴 지붕이 된다. 좌우 측면은 ㅅ자형의 구성 그대로 두는데 박공*을 달아 장식한다. 상대(上代)에 목재가 넉넉하던 시절에는 좌우 기둥으로부터 뺄목을 넉넉히 내어 지붕구성이 아름다웠으나 후대에 이르러서는 뺄목이 짧아지면서 움츠러든 맛을 풍기게 되었다. 기와지붕으로는 가장 간결한 구성이며 고급집에서는 주로 주심포* 계통의 집에 보편적으로 채택된다. 그 예로는 예산의 〈수덕사修德寺 대웅전大雄殿〉,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창녕의 〈관룡사雚龍寺 약사전藥師殿〉 등이 있다.

매그넘 포토스

매그넘 포토스 Magnum Photos(영)

미국과 유럽의 세계적인 보도사진사들의 에이전트. 1947년 파리에서 카파Robert Capa(1913~1954), 세이무어David Seymour,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에 의해 출발되었다. 현재는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다. 매그넘은 제2차세계대전 후의 포토저널리즘*을 선도해왔으며, 《라이프Life》등의 저널리즘을 통해서 자유롭고 개성이 강한 비판적 사진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매그넘 포토스는 동시대의 현실을 휴머니즘적인 시선으로 생생하게 보도하는 가장 정통적인 보도 사진사 집단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매너리즘

매너리즘 Mannerism(영) Manierismo(이) Maniérisme(프)

1520년경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주로 회화를 중심으로 유럽 전체를 풍미한 미술 양식.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17세기 이후부터 미술에 관한 문헌에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역사적, 비평적 의미가 함축된 복합적인 의미로 문학 비평 및 신학에도 통용되었다. 보통 미술사의 시대 구분에서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바로크 미술*로 이행하는 사이(1530~1600)에 이탈리아에서 나타났던 과도기적인 미술 양식을 말한다.
매너리즘이란 종종 성숙기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쇠퇴를 뜻하거나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을 일컫는다. 또 성숙기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명칭 자체는 ‘스타일, 양식’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마니에라(maniera)’에서 유래했으며, 개성적인 양식이 아닌 모방이나 아류 등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매너리즘이라는 용어는 ‘퇴보에 도달한 전통주의’ 혹은 ‘정신적인 위기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죽어가는 양식의 마지막 표현’ 등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매너리즘 시대의 예술가들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면서 독일의 비평가들과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을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에서 정점에 이른 유럽의 예술 운동으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매너리즘이 독일 표현주의*의 미학적 왜곡 및 정신적 격렬함 등이 무분별하고 기묘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옥스퍼드 사전에서는 매너리즘을 ‘독특한 방식에의 과도한 또는 부자연스러운 탐닉’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국의 역사가들은 매너리즘이라는 말보다 ‘후기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1935년 무렵부터 영국의 미술사가들은 매너리즘이 보여주는 긴장과 과장을 이 시대가 르네상스 시대와 같이 하나의 이상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가 아니라, 여러 경향들이 교차하며 갈등을 일으키던 위기의 시대였던 데서 오는 일반적인 불안의 반영으로 해석했다. 13~15세기의 프랑스 궁정 문학이나 이탈리아에서 ‘매너’라는 말은 보편적인 인간행동과 예술양식에 사용되는 말로서 영어의 ‘스타일’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뜻을 갖고 있었다.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에 따르면 매너는 유사한 예술 작품의 바람직한 성격을 뜻하는 ‘우아함’이라는 말과,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화된 아름다움, 기품, 세련, 능숙함’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미술에서 매너리즘의 특징으로는 왜곡되고 늘어진 구불거리는 형상, 불명료한 구도, 양식적인 속임수와 기괴한 효과 등을 들 수 있다. 콘트라포스트와 인체를 극도로 길게 늘이는 과장된 표현이 조각과 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너리스트 미술은 열광적 감정, 긴장과 부조화의 느낌, 신경 불안의 감각을 전달한다.
묘사하는 내용 자체는 기묘하고 복합적이지만, 내용*보다는 양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매너리즘 예술가들이 고전적 아름다움과 조화를 추구하는 르네상스의 이상에 의식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전통과의 단절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나 이유는 없다. 그들은 오히려 좀 더 미묘하고 세련된 우아함을 추구하려고 했으며 코레지오Correggio(c.1490~1534)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가 이룩했던 최상의 완벽을 계속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의 교리와 함께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보다는 예술가들의 마음속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되었으며, 더 큰 미적 효과를 추구하기 위해서 예술가들의 독창성과 상상력이 장려되었다. 그리하여 과장되고 병적인, 때로는 기괴하기까지 한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또 전문가와 소수의 지적인 엘리트에게 부응하기 위해서는 심원한 암시, 놀라움, 새로움을 추구해야 했다. 마침내 16세기말에 와서 고전적 균형, 이성과 자연의 조화, 편안함과 기능을 추구하던 르네상스의 이상은 매너리즘의 불안정성, 기형적인 자세, 불안정한 구도, 자의식 강한 기교, 모호함의 강조로 변형되어 20세기의 초현실주의*의 한 특성을 예고했다.
한편 이탈리아 매너리즘의 장식적 우아함, 지적 에로티시즘 등은 프랑스 퐁텐블로파* 속에서 프랑스적 취향으로 변모했다. 영국에서 매너리즘의 영향은 미약하나마 엘리자베스 시대의 예술에서 엿볼 수 있다. 1590년대에 매너리즘은 카라밧지오Caravaggio(1571~1610)의 사실주의와 카라치Annibale Carracci(1560~1609)의 신고전주의*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그후 18세기말에 몇몇 낭만주의* 화가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부활되었을 뿐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초현실주의자들은 자신들과 매너리즘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매너리즘에 대한 20세기의 관심은 일반적으로 그 동기가 모호하고 해석상의 의견도 서로 엇갈리고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매너리즘은 기교주의, 형식주의*, 현상 유지를 고수하는 경향이나 자세를 비판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매병

매병 梅甁 mei-ping(중)

입이 작고 목이 짧으며 어깨가 풍만해졌다가 점점 좁아져 내려가 다시 약간 넓어진 형태의 병. 고급 술을 담는 데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송대(宋代)에 제작하기 시작하여 원명, 청대(元明淸代)에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고려 11세기경부터 만들어져서 12세기에는 전성기에 달했고 이후 널리 제작되었다. 기형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르고 뚜껑이 있는 것도 많으며 자기*의 기명 중 하나이다.

매스

매스 mass(영)

‘양괴’ 혹은 ‘양감’이라고 번역된다. 부분들이 집합하여 상당한 양으로 덩어리진 것을 가리킨다. 조각*에서는 파악되는 대상의 덩어리를 말하며 그 자체가 이미 매스인 조각의 소재와 통일체를 형성한다. 회화에서는 화면 중 많은 양의 색이나 빛 그림자 등의 통일된 집합을 의미한다. 건축에서 매스는 공간*을 점유하는 양괴의 규모 및 내부 공간을 규정하는 실체를 말한다.

매스 컬처

매스 컬처 mass culture(영)

→ 대중문화

매체

매체 媒體 media(영)

시각 미술에서 표현* 혹은 전달 양식으로 선택된 모든 물질적 재료를 의미. 즉 예를 들어 회화*, 조각*, 건축은 각기 다른 매체이며, 또한 대리석과 브론즈는 조각의 매체이다. 좁은 의미로는 회화에서 안료*를 녹이거나 혼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액 또는 물질을 지칭한다. 수채 물감에서의 물, 템페라*의 달걀 노른자, 유화에서의 린시드유* 등이 그것이다.

매트 컬러

매트 컬러 mat-color(영)

회화* 재료로서 광택이 없는 물감을 말한다. 과슈*, 수성 템페라*, 포스터 컬러 등이 그 예이다. 매재(媒材)로는 수지(樹脂)를 사용한다.

매화서족점

매화서족점 梅花鼠足點

매화꽃잎과 쥐발자국 같은 작은 흑점(黑點)을 밀집시켜 나뭇잎을 그리는 방법. 원사대가*의 한 사람인 오진吳鎭(우 즈언)이 즐겨 사용한 묘사법으로 호초점*(胡椒點)과 같은 계통이며, 문인 산수화에 흔히 쓰인다.

맥적산석굴

맥적산석굴 麥積山石窟
Mai-chi-shan(중)

중국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 현성縣城의 동남쪽 45㎞지점에 있는 불교 석굴 사원군. 1952년에 발견되어 그 해 11월과 이듬해 1953년 7월에 조사되었다. 142m높이의 보리낟가리처럼 생긴 산의 석회암을 깎아지른 절벽 동서 2구역에 굴감(窟龕)이 192개나 된다. 가장 오래된 연대의 것은 502년의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로 되어 있으며 그 후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 당唐, 송宋, 명明에 걸쳐 석불, 조상, 부조*, 벽화*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 중수되어 있다. 동쪽 절벽의 열반굴涅槃窟, 천불랑千佛廊은 북위시대의 것이다.
산화루散花樓 위의 칠불각七佛閣(제4동)은 이 석굴군 가운데 백미이고 조각벽화, 장식 등 화려함이 극에 달하고 있다. 이것은 지면으로부터 높이는 50m가 넘고, 정면의 폭이 31m, 깊이 7m, 8개의 큰 기둥으로 외랑을 버티고 있다. 북주 위신庾信의 〈진주秦州 천수군天水郡 맥적애麥積崖 불감명佛龕銘〉에 보정 3년(563) 북주의 대도독 이윤신李允信(리 윈신)이 죽은 아버지를 위하여 맥적산 남쪽 절벽에 칠불감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서쪽 절벽의 3대 굴은 북위시대 말에 파기 시작하여 가장 큰 만불동에는 북위를 비롯하여 각 시대의 소상, 천당동天堂洞에는 북위의 기마전쟁의 벽화, 제127동에는 네 벽과 천장에 〈기마전쟁도〉 <사신공양도捨身供養圖〉가 있다. 제165동은 북위시대에 파기 시작하여, 송대(宋代)에 크게 수리했는데, 그 소상은 산서성 태원시 서남쪽의 진사 성모전의 소상과 더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