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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 이미지 multiple image(영)
동일한 이미지나 서로 다른 여러 이미지를 중복하여 구성시키는 화면을 말한다. 멀티플 이미지를 만드는 테크닉으로는 카메라에서 다중노출을 하는 경우, 암실에서 인화지 위에 다중노광하는 경우, 그리고 몽타주*나 콜라주* 기법을 이용하여 사진을 합성하는 방법 등이 있다.
멀티플 프로젝션 multiple projection(영)
두 대 이상의 영사기를 사용, 복수(複數)의 영상을 동시에 재현하여 환상적인 영상을 연출하는 기법. 영상 표현의 틀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최초의 멀티플 프로젝션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첫 선을 보인 <시크로마>였다. 10대의 영사기를 통해 360도의 화면을 구성한 이 영화는 그러나 1회 상영에 그쳤다. 그 밖에 제2차세계대전 전의 것으로는 강스Abel Gance의 삼면 스크린인 <나폴레옹>(1925)과 전후에는 임즈Charles Eames의 <샘플 레슨>(1951)이 유명하다. 그 후에도 브뤼셀 만국박람회(1958) 등 여러 만국박람회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실험이 행해졌고, 특히 1967년 몬트리올 만국박람회에서 화제를 모으면서 1960년대 후반에는 미국, 캐나다, 체코 등 각국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멀티플 프로젝션은 급격히 그 속도가 가속되고 있는 사회의 변화와 문화적 다원성,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등 일관된 맥락을 거부하고 다양한 현상들이 모여 전체를 형성하고 있는 현 시대를 반영하는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메가론 megaron(그)
고대 그리스와 중동에서 볼 수 있는 건축 형태. 특히 미노스나 미케네 시대의 궁전 혹은 주택의 가운데 있는 큰 방을 가리키며, 메가론이라는 명칭도 광대함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으로 벽이 없이 트인 현관, 문간방과 중앙에 난로와 왕좌가 있는 큰 홀로 이루어져 있다. 메가론은 단순히 커다란 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미케네에서는 궁정마다 메가론이 있었으며 개인 주택의 일부로 지어지기도 했다. 메가론의 건축 양식은 중동에서 처음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여기에 기둥으로 받친 현관이 첨가되면서 에게 건축의 특징으로 발달하였다. 초기 그리스 건축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메가론은 신전 건축의 원형적인 양식으로 여겨진다. 메가론의 전형적인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예는 필로스에 있는 네스토르 궁전이다. 여기에서 왕의 거처로 사용되었던 크고 중요한 메가론은 중정에 면해 있으며 양쪽에 세로홈으로 장식된 원주*들이 세워진 통로를 지나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메디치가 Famiglia Medici(이)
1434~1737년에 걸쳐 이탈리아 피렌체와 후기 투스카니 지방을 중심으로 은행이나 상업에 종사하며 세력을 떨쳤던 명문가(名門家). 르네상스 시대에는 학문과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를 자처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문의 창시자인 지오반니Giovanni di Bicci de Medici(1360~1429)부터 우피치 컬렉션(Uffizi collection)의 토대를 마련한 코지모 1세Cosimo Ⅰ(1519~1574)에 이르기까지 메디치 집안 사람들은 보티첼리Sandoro Botticelli(1445~1510), 도나텔로Donatello(1382~1466), 라파엘로Raffaello Sanzio(1483~1520), 립피Filippo Lippi(1457~1504),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 고졸리Benozzo Gozzoli(c.1421~1497), 첼리니Benbenuto Cellini(1500~1570),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 폰토르모Pontormo(1494~1557) 등 당대의 저명한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작품을 의뢰하였다. 특히 로렌조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1449~1503)는 자신의 정원에 수집한 고대 미술품들을 젊은 작가들에게 개방하여 고대 미술 연구의 장을 제공했으며, 그 중 한 명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최초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은 수도원*과 교회 등 종교 건축에도 후원했으며 예술가들에게 의뢰하여 가문 전용의 건물들을 지었는데, 그 중에서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메디치 예배당이 가장 유명하다.
→ ‘르네상스 미술’ 참조
메르츠 Merz
하노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일 다다이스트 슈비터즈Kurt Schwitters(1887~1948)가 자신의 작품에 붙인 명칭이자,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개념이다. 메르츠라는 단어 자체는 ‘Kommerz-und Privatsbank’라는 문구가 적힌 인쇄물에서 우연히 선택한 글자를 조합한 것이다. 슈비터즈는 제1차세계대전 말부터 병마개, 신문지, 광고 전단, 기차표, 단추, 성냥, 못 등 일상 생활에서 버려진 폐품들을 이용해 콜라주*하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재료 간의 조화와 물질의 만남으로 인한 대비 효과를 통해 기존의 회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시도하였다. 메르츠의 중심 사상은 폐품 미학과 우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슈비터즈에게 메르츠는 ‘시각(vision)으로 확장될 수 있는 모든 예술 형태’를 의미했으며, 이것은 쓰레기임에도 불구하고 조형성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우연한 만남과 의외성, 마술적 생명력을 지닌 메르츠는 산업적 시정(詩情)을 감지하게 하며 또한 추상적 차원으로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선보였다. 그러나 슈비터즈의 이러한 서정성은 베를린 다다이스트인 휠젠벡Rihardt Hulsenbeck에 의해 ‘핏기없는 표현주의*의 추상성’과 ‘나약한 감상성’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슈비터즈는 192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메르츠를 중심으로 그의 예술 사상을 펴기 시작했다. 회화에서 출발한 메르츠 작업은 점차 이차원적인 평면 작업에서 발전하여 삼차원의 오브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조각들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건축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는데, 메르츠는 이같은 발전 단계에 따라 평면 작업인 ‘메르츠빌트’와 현실 공간 속에 위치한 입체 작품인 ‘메르츠바우’로 나뉘어진다. 슈비터즈는 하노버에 있는 자신의 집에 일종의 환경물인 메르츠바우를 조성하였고 여기에서 정기적으로 다다이스트들의 모임을 주최하였다.
메르츠 미학에 입각한 건축물인 메르츠바우는 삶과 예술을 총체적으로 종합한 환경 미술*이며 또한 예술 간의 구분을 넘어선 총체 예술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슈비터즈가 1940년 영국으로 망명한 후에 제작한 말년의 메르츠바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2층으로까지 확대되었다고 한다. 시인이자 화가, 공연자였던 슈비터즈에게 메르츠 개념은 회화 뿐 아니라 그의 예술 세계 전반을 대변하는 미학이었다. 그는 나치에 의해 퇴폐 예술가로 낙인 찍혀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객사하였지만, 메르츠를 통해 추구한 슈비터즈의 폐품 미학은 전후에 등장한 정크 아트*의 선구자로서 새롭게 재평가되었다.
메세나 Mécénat(프)
‘문화 예술의 옹호와 원조’라는 뜻. 이는 ‘메세나스(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정치가로서 문화대신의 입장에서 시인들을 후원하고 문화의 옹호에 노력했던 인물 ‘마에케나스’의 프랑스어 발음. 즉 ‘카이에스 메세나스’에서 유래되었다)’라는 고유명사로부터 생겨났다. 국가와 민간기업 등이 행하는 문화예술지원 작업을 의미하며 직접적인 담보나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문화공헌 활동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도 1994년 4월 한국 기업 메세나협의회가 창립되어 206개의 회원사가 가입했으나 ‘기업과 문화예술계를 서로 연결하여 적절한 문화사업을 알선해 주는 등 경제와 문화예술 간의 협력을 추진’한다는 취지에 비해 아직은 그 활동이 미비한 상태이다.
메이지, 다이쇼시대 미술 明治, 大正時代美術
메이지(明治)정부에 의해 수용된 서구문명은 미술계에도 커다란 파란을 일으켜 전통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그 전통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서로 다투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1862~1913)을 지도자로 한 화가들은 전통에 입각한 새로운 일본화의 창조를 지향하며 근대화로 나아갔다. 이 시대의 전람회의 개최는 미술을 일반에 보급시키는 효과를 거두었으며 정부에 의한 관전(官展)은 관료성의 폐해와 작품의 통속성을 낳게 했다. 다이쇼기에는 신예 작가들이 관전에 대항하여 재야 미술 단체들을 결성하였다. 또한 서양에 직접 유학하고 돌아와 서양화를 일본에 정착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건축:처음에는 서양인 설계자에 의해 건축되었으나, 이후에는 서양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워 온 일본인 건축가에 의해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양식을 수용한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설계의 일본은행 본관, 17세기 프랑스 고전 건축인 베르사유 궁전을 따른 〈적판이궁赤坂離宮>(1909, 현 迎賓館) 등이 있다. 다이쇼기에는 미국식 고층건물 양식도 수용되었다.
조각:일본의 근대 조각은 양풍(洋風) 조각과 일본의 전통적 흐름을 이은 것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메이지 9년(1876) 공업 미술학교가 세워지면서 조각학과가 신설되어 이탈리아에서 라구사Vincenzo Ragusa가 교수로 초청돼 그의 지도를 받은 오쿠마 우지히로大態氏廣, 등전문장藤田文藏 등이 양풍조각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재야의 태평양회화연구소에도 조소교실이 신설되어 유럽에서 돌아온 신카이 다케타로新海竹太郞 지도아래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 등의 신예가 배출되었다. 다이쇼 3년(1914) 재흥일본미술원*再興日本美術院에 조소부가 설립되면서 이곳을 무대로 신구 양파의 화가들이 우수한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회화:오카쿠라 덴신의 지도를 받은 요코야마 다이칸黃山大觀, 시모무라 간잔下村觀山 등은 일본문화원日本文化院을 설립하여 신일본화의 창조에 매진하였다. 이 외에 자연주의를 주장하고 양화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무성회無聲會(유키 모토가키結城素明, 히라후쿠 햐쿠쓰이平福百穗,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등), 우키요에*(浮世畵) 풍속화 계열인 오합회烏合會(미오노 도시카타水野年方, 가부라기 기요카타鏑木淸方 등), 야마토에*(大和繪)의 전통을 중시하는 홍아회紅兒會(이마무라 시코今寸紫紅 등, 이후에 고바야시 고케이小林古俓, 하야미 교슈速水御舟 등도 참가)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다케우치 세이호竹內栖鳳 등 교토화단의 신예작가들은 1918년 국화창작협회國畵創作協會를 설립하여 다이쇼기 일본화단에 활기를 더했다.
양화 화단에서는 1893년 구로타 세이키黑田淸輝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라파엘 콜랑Louis-Joseph -Raphaël Collin에게서 배운 외광파外光派를 소개하였는데, 이는 자파紫派로 불리면서 일반의 주목을 끌었다. 1896년에 도쿄미술학교에 구로타가 주임교수로 임명되고 백마회白馬會를 결성하면서 외광파는 더욱 널리 확산되었다. 다이쇼 원년인 1912년에는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 등이 퓨생회를 조직하여 개성있는 작품을 발표하였고, 1914년에는 야스이 소타로安井曾太郞 등에 의해 이과회二科會가 설립되어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야수주의*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