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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영화 Underground Cinema(영)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영화 운동으로, 1960년대 미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운동은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종래의 영화가 상업주의의 해독(害毒)을 입어 도덕성의 퇴폐, 미학의 쇠퇴, 천박한 주제와 진부한 표현에 빠졌다고 보고, 이에 대항하여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새로운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자유로운 영상 표현을 목표로 하는 실험적인 영화작가 및 화가들에 의해 시도된 것이다.
미국에서는 그 이전에 뉴 아메리칸 시네마라 불리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1960년 메커스Jonas Mekas의 ‘언더그라운드 제1선언’으로 새로운 영화 작가의 집단적 결속을 분명히 천명하게 되었다. 삶이나 예술에 대한 기존의 원칙들을 불신하고 영화는 절대 개인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프로듀서나 배급업자, 제작자의 간섭과 일체의 검열을 거부하는 등의 전위적인 입장을 내세웠다. 작품에는 단편들이 많으나 장편물도 있다. 개인적 주관의 표현이 공통적인 경향인데, 자유로운 주제로 온갖 영화적 기법을 동원하여 영상 표현의 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워홀Andy Warhol(1928~1987), 앵거Kenneth Anger, 린더Carl Linder, 브리어Robert Breer, 올덴버그Claes Oldenburg(1929~), 마코폴로스Gregory J. Markopoulos 등이 대표적 작가이다.
엄격양식 嚴格樣式
Severe Style(영) Strenger Stil(독)
그리스 미술사에 있어서 초기 클래식(기원전 500~450) 중에서도 페르시아 전쟁 이후부터 파르테논의 건축개시까지의 시기(기원전 480~450)를 특히 엄격양식 시대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 시대의 미술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에토스(ethos, 고귀한 정신)’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구수하고 은근한 엄숙성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델포이의 마부상>,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의 장식 조각, <아르테미시온의 포세이돈> 등을 들 수 있다.
에게 미술 Aegean Art(영)
그리스인이 이주해 오기 전인 기원전 약 3000~2000년에 에게해(海)를 중심으로 그 주변의 키클라데스 군도(群島, Cyclades) 및 소아시아 연안과 그리스 본토에서 번창했던 문명을 가리켜 에게 미술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서로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면서도 분명하게 구별되는 세 문명 즉 전설적인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이름을 본떠 미노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크레타 문명, 크레타 북쪽의 소군도 문명인 키클라데스 문명, 그리고 그리스 본토에서 발달된 헬라딕 문명이 있다. 그리스 본토의 테살리아에서는 기하학적 모양으로 장식한 용기(用器)를 특색으로 하는 하나의 문화가 존재한다. 이 문화는 유럽의 <대상장식도기(帶狀裝飾陶器)>와 결부되는 것으로서, 그 영향은 중부 그리스에까지 미치고 있다.
크레타의 신석기 시대 유품으로는 흑색 또는 적색을 덧칠해서 만들거나 장식 모양을 새겨 놓은 도자기만이 전해지고 있다. 키클라데스 군도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계속되었는데, 여기서는 모양을 새겨 넣은 용기가 중기 청동기 시대의 유품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중부 그리스에서는 이미 청동기 시대 초기에 흑화(黑畵)로 장식한 밝은 바탕의 도자기가 생겨났다.
에게 미술에 있어서 최고의 업적은 기원전 1600년경부터 1400년경에 걸쳐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발달된 미술이랄 수 있다. 이 미술은 에게해 주변 전역으로 펼쳐졌다. 이 시대에 나타난 크레타의 항아리는 모양과 장식이 모두 변화 무쌍한 완숙한 기술과 소용돌이치는 역동적 장식 무늬로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크레타 섬의 필라이카스트로에서 발견된 <문어 문양 항아리>(크레타 헤라클리온 미술관)와 카마레스에서 발견된 <부리 모양의 항아리>이다. 이러한 도기에서 사용된 뛰어난 채색 기술은 실내장식과 벽화로 발전되었다.
크레타인의 독창적 상상력의 산물인 벽화는 대개 동물이나 새, 바다의 생물 등을 보여준 자연의 정경들인데, 율동적인 운동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크레타의 도기는 대체로 그리스 본토로부터 모방한 것들이다. 초기 미케네 시대의 항아리는 크레타의 방식과 흡사한 사실적(寫實的)인 장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식물모양은 적지만 파도 모양, 수중에서 일렁이는 해초의 모양, 어개류(魚介類) 등이 많다.
미케네 시대의 말기가 되면 이러한 사실미는 후퇴하고 배치와 구도에 중점을 둔 추상화 또는 도안화의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에게 미술의 훌륭한 작품 가운데의 하나는 금속공예품이다. 정교한 금, 은 상감법이 우수하며, 단검(短劍), 금제 술잔 등의 유품이 있다. 크레타의 건축은 궁전으로 대표된다. 이들 궁전이 붕괴(기원전 1400년경)되기에 앞서서 이미 크레타 미술이 그리스 본토에 전해짐으로써 거기에서 기원전 1200년경까지 ‘크레타-미케네 미술’로서 존속되었다.
에나멜 enamel(영)
①색유리의 가루를 금속의 표면에 구워 붙이는 장식기술.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칠보(七寶)라고 하며, 서양에선 특히 중세에 종교적 용구에 많이 쓰였다. 기법이나 지금(地金)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세분된다. ②에나멜 페인트. 오동유, 아마인(亞麻仁)유에 천연수지, 합성수지를 가열, 융합한 유성 바니시* 혹은 알키드 수지와 같은 합성수지 도료에 여러 가지 안료를 개어 넣은 것으로 보통 페인트에 비해 칠했을 때에 자국이 적고 건조가 빠르며 광택이 우수하다는 장점이 있다.
에도시대 미술 江戶時代美術
에도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멸망(1615) 후부터 다이세이 호칸(大政奉還, 1867년 강호막부가 정권을 잡은 메이지明治천황에게 반환한 일)까지 300여년간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상품경제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토지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농민과 무사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상업자본을 장악한 상인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도시민인 조닌(町人)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와 더불어서 문화는 모든 국민 사이에 널리 보급되는 특징을 보인다.
건축:호화로운 전사(殿舍)건축인 니조성二條城의 〈니노마루二の丸殿舍〉, 장군 가광家光의 거동을 막기 위해 만든 본원사서원本願寺書院의 〈대면소對面所〉 〈백서원白書院〉 등이 대표적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초암풍 다실이 지닌 간소한 아름다움을 서원형식 속에 수용한 수기옥식(數寄屋式)의 〈계리궁桂離宮〉, 이와 반대로 장식적인 효과를 최대로 살린 권현(權現) 형식의 영묘(靈廟)건축이 있다.
조각:유행승(遊行僧)인 원공圓空이 간토關東에서 홋카이도北海道에 이르는 예리한 조형 감각의 타조(打彫)의 불상*과 신상*(神像), 후기의 유행승인 목식명만木鳩明滿은 원공의 격렬한 예각적 표현보다는 둥글고 여유로운 불상을 제작했다.
회화: 초기 관영 연간(寬永, 1624~1644)의 가노 에이도쿠狩野永德의 손자 탄유深幽, 에이도쿠의 제자 산라쿠山樂(1559~1635) 등 가노파狩野派는 전대에 이어 화단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점차 매너리즘에 빠진듯한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서민 출신의 다와라야 소타쓰俵屋宗達는 전통적인 아마토에 수법에 서민적인 생활감정을 담아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풍속화*는 향략적인 유녀(流女) 등이 화제(畵題)로 즐겨 채택되는데, 이는 중기 이후 발전하는 우키요에*(浮世繪) 미인화와 결부됐다. 중기 원록 연간(元祿, 1688~1703)은 우키요에가 에도 시민의 예술로서 정착된 단계로서 베니에(紅繪), 우루시에(漆繪)로부터 색으로 찍는 최초의 단계인 홍색 판화와 색채 판화의 기법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후기 관정寬政, 문화文化, 문정文政 연간에는 우키요에, 문인화*(文人畵), 마루야마•시조파(圓山四條派), 복고(復古), 야마토에(大和繪), 양풍화(洋風畵) 등 여러 유파의 화가와 독립화가들의 활약으로 화단은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예:모모야마시대*(桃山時代) 말부터 이 시대의 초기에 고전 부흥에 따라 새로운 서풍이 이루어졌다. 송宋의 미불米芾(미 후, 1051~1107)의 필의를 가미하여 장식적인 효과를 낸 혼아미 고에쓰本阿彌光悅(1558~1637), 구카이空海의 글씨체를 배워 독자적인 양식을 만든 쇼카도 쇼조松花堂昭乘(1584~1639) 등이 있다.
공예:염직에서는 자수보다 한층 더 세련되게 그림문양을 표현할 수 있는 호방염(糊防染) 수법에 의한 우선염(友禪染)이 고안되어 급속히 유행하였다. 도자에서는 자기*(磁器)가 출현하였고, 도자기 표면에 채색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에디션 edition(영)
원래 초판, 재판 등의 판(版)을 의미하며 인쇄물을 뜻하기도 한다. 미술에서는 한정된 수로 제작되고 전시, 판매되는 작품을 뜻하는 말이다. 판화의 경우, 대부분 에디션으로 제작되고, 사진 작품도 에디션으로 유통될 수 있다. 현대 미술의 멀티플*에 있어서도 에디션이 언급되고 있다.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은 일찍이 몇 개의 작품을 복수로 제작해 유통시킨 바 있다.
에로티시즘 eroticism(영)
육체적 애욕에 관계하는 과도한 기호 혹은 작품의 관능적 정욕을 불러내는 성질을 의미한다. 어느 시대나 인간의 시선은 무엇인가를 보고 욕망을 느끼고 감응받는 행위를 원하는데, 바로 그러한 감정의 표출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인 에로스에서 유래되었는데, 에로스는 그리스 신화의 연애, 사랑의 신이다. 인간 본능의 강력한 힘, 즉 사랑이 그 본래의 뜻이며 남녀간의 연애에 관계하는 관능의 표현을 기본으로 한다. 고대와 미개인족에 나타나는 다산(多産)과 풍요의 상징인 여성의 나체와 생식기의 표현과는 다른 것이며, 또 성행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현대의 포르노그래피와도 구별된다.
르네상스 이후의 미술에서 왕성한 에로티시즘의 상징은 큐피드이지만, 이 밖에도 보편성을 비유하는 구체(지구) 등도 상징의 하나다. 그러나 원근법에 매혹당한 당시 화가들의 흥분 혹은 그것에 의해 재현된 리얼리즘으로의 대상 등도 넓은 의미의 에로티시즘이라 불린다. 외적인 대상을 내면을 통해 투영하는 일, 혹은 내적인 대상을 이차원으로 옮기거나 삼차원에 떠오르게 하는 행위, 그 능력과 가능성이야말로 현대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에로티시즘이라 말할 수 있다.
→ ‘에로틱 아트’ 참조
에로틱 아트 erotic art(영)
성(性)을 주제로 다루거나 그것을 관능적으로 표현한 미술. 미술사에서 육체의 본성이자 문화적으로 형성되는 개념인 에로스는 예술적 생산이 시작된 이래로 등장하였으며, 성애와 예술의 관계가 성애와 미, 환상, 예술적 생산과 수용의 내적 연관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미학에서도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20세기 미술에서는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적인 관점에 친숙해지고 대중문화나 광고를 통해 성적 주제가 일상화되는 등 다소 금기시되었던 에로스적 욕망이 더욱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
성은 1960년대 들어와 미술에서 더욱 주목할 만한 소재로 부각되었으며 서적과 전시 및 강좌들을 통해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신체 자체에 대한 미술가들의 새로운 관심, 표현에 대한 극도의 자유, 자신의 육체와 특수하고 고유한 신체적 경험에 대한 여성들의 자각,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이슈화 등의 사회, 문화적 분위기와 전혀 무관하지 않다.
1968~1969년 필리스와 크론하우젠Eberhard Kronhausen에 의해 조직되어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열린 대규모의 에로틱 아트 국제 전시회는 25만명의 관중을 매혹시켰다. 아마야Mario Amaya는 에로틱 아트를 ‘육체나 정신 속의 성적 감각을 유발하는 예술’로 규정하였다. 이는 에로틱 아트가 성적 행위에 대한 묘사와 직결되는 개념이 아님을 보여주며, 에로틱 아트가 성행위의 직접적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포르노그래피와도 다름을 보여준다. 포르노그래피에서 성적인 이미지들은 그 노골적인 정도를 떠나서라도 성적 자극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지만 에로틱 아트에서는 이미지의 관능성이 미로서 승화되거나 또는 관람자의 이성을 일깨워 작가의 의도를 전해준다.
현대의 예술가 중 성적인 것을 주제로 삼는 작가들은 많으며 그 방식 또한 다양하다. 아콘치Vito Acconci는 퍼포먼스*, 신체미술*, 사진, 비디오 등의 여러 매체를 통해 제한된 상황에서 공공 혹은 개인적인 다양한 맥락에서 스스로 경험하는 자기 고유의 자아를 오브제*로 삼는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이용해서 질식할 정도로까지 손을 입 속에 밀어 넣는다거나 넓적다리 사이에 성기를 숨기기도 한다. 벨머Hans Bellmer(1902~1975)는 분절된 인형을 사용하여 죽음에 이르려는 육체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출했다. 그는 육체를 모욕하는 자신의 태도를 ‘끝도 없는 일련의 아나그램을 가지고 진정한 의미를 재구성하기 위해 우리가 문장을 뒤트는 것’에 비교하였다.
존스Allen Jones(1937~ )는 카탈로그나 잡지에서 영감을 받은 에로틱한 이미지들에 집중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가학증과 피학증적 충동뿐 아니라 구두나 스타킹 등에 대한 물신(物神)숭배도 드러낸다.
에마키 繪卷(일)
두루마리*로 된 일본의 이야기 그림. 에마키모노(繪卷物)라고도 하는데, 《회인과경繪因果經》등 중국의 불교회화에 그 유래를 두고 있으며 일본의 문학, 특히 소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였다. 가로로 긴 두루마리, 즉 마키모노(卷物) 형식이 이용되는데, 대개 이야기와 그에 관한 삽화가 같은 두루마리 면(面)에 나타난다. 가장 오래된 에마키는 735년에 그려졌다고 하나 현존하는 100여개의 에마키 조(組)는 대개 12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에마키로는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소설을 도해(圖解)한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源氏物語繪卷》가 있는데, 여기서 사용된 후키누키 야다이(吹拔屋臺;하늘에서 지붕을 뚫고 내려다 보는 듯한 투시법)나 히키메 가기하나(引目鉤鼻;찢어진 듯한 눈과 갈고리같은 코), 미묘하고 섬세한 필선과 상징적이고 서정적인 채색은 여성적이고 귀족적인 헤이안(平安) 시대의 에마키를 대표한다. 한편 승려 묘렌命蓮의 전설을 그리고 있는 《시기산엔기에마키信貴山緣起繪卷》는 보다 대중적이고 희화적이며 생기발랄한 표현기법에서 전자와 대조되는 양식을 보여주는데 양자는 이후 에마키 발전의 두 가지 방향을 예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모노가타리(物語)나 엔기(緣起)말고도 와카(和歌)나 불경(佛經), 고승(高僧)의 전기(傳記)나 역사기록 등이 에마키로 활발히 제작되어 당시대인들의 생생한 현실생활을 보여주고 있으나 14세기에 들어와서는 에마키를 그리는 어용화사(御用畵師)를 후원하였던 황실과 귀족계급이 정치경제적으로 몰락함에 따라 함께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러나 문학적 주제의 에마키는 이후 오토기 조시(御伽草子)라는 형태의 대중 미술을 낳았으며, 그 서정적 장식적 미감은 15세기 이후의 도사파*土佐派로 계승되고, 17세기의 린파*琳派 및 우키요에*(浮世繪)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일본화의 역사적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