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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문청자

연리문청자 練理文靑磁

→ ‘고려청자’ 참조

연주문

연주문 連珠文
pearl rounded motif(영)

구슬을 꿴 듯이 작은 원을 동그랗게 연결한 문양. 원래 진주는 영혼, 광명, 선(善)을 상징하는 것으로 연주문은 근동지역에서부터 사용됐다. 주로 왕관이나 의복의 장신구에 쓰였으며 고대 공예품과 직물, 건축장식에도 사용됐다.
서아시아에서는 루리스탄 청동기의 가장자리 장식에 사용되었고 사산조 이란*에서 크게 유행하여 의상의 문양과 옷깃, 소매 끝 등 복장의 중요 부분과 왕관 등에 장식되었다. 사산계의 직물에서 연주문이 염직 문양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비잔틴*, 초기 이슬람시기, 7~8세기의 동아시아에도 계승되어 중국의 투르판과 한국에도 쓰인 예가 많다. 후대로 갈수록 소형화되어 단순한 장식의장이 된다. 연주문은 띠 형태로 가장자리를 장식하거나 혹은 작은 원을 이룬 연주문 안에 사자, 봉황 등의 동식물 문양이 삽입되는 경우로 나뉜다. 중국에서는 당唐나라때 크게 유행하여 불상*의 대좌* 및 광배*, 금속공예, 벽화*, 석조부조 등 불교 관계 미술품 장식에 자주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도 통일신라시대*에 불교의 성행과 함께 성행하여 불교공예품을 비롯, 불상이나 도자기 등에 장식문양으로 많이 나타난다.

연출사진

연출사진 staged photography(영)

→ ‘구성된 사진’ 참조

연화

연화 蓮花

불교에서 연화는 지저분한 연못에서도 청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사바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다 하여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며, 무명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취되는 진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부처님이 탄생하여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을 때 땅에서 연꽃이 솟아올라 태자를 받들었기 때문에 부처의 탄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혹은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교공예품이나 조각품의 장엄장식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길상문양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는데, 연뿌리와 연꽃 줄기가 서로 얽혀있는 것은 형제애를, 열매와 씨앗은 자식을 많이 갖기를 희망하는 유교적인 관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연화문

연화문 蓮花文

연꽃을 도안화한 문양. 연꽃은 인도와 이집트 등지에서 재배되었고 불교 성립 이전부터 여러 미술품에 장식문양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에서는 로터스(lotus)라고 불렀고 내세에 무한한 생명을 부여하는 재생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집트에서는 해가 뜰 때 꽃이 피고 해가 지면 꽃이 진다고 하여 태양숭배사상과 관련지어 신성시했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문헌인 《리그베다》에서도 우주만물 창조의 상징으로 비유되어 광명의 꽃, 생명의 꽃으로 상징되었다. 불교성립 후에는 더러운 물에서 자라지만 더렵혀지지 않아 세속에 물들지 않는 청정(淸淨)의 상징으로서 부처의 세계를 공양하는 꽃으로 비유되어 왔다.
연화가 미술품에 장식되기 시작한 것은 불교 발생 이전 이집트* 등의 원동(遠東)지방에서 이고 인도*에서는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Aśoka 기념 천장과 벽면, 사리용기, 불상의 대좌*와 광배*, 기타 공예품 등에 많이 장식되며 중국에서는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주로 남북조(南北朝)시대부터 송대(宋代)에 이르기까지 대유행하며 불교의 흥성과 관련이 깊다. 형태는 활짝 핀 연꽃을 위에서 바라본 화판(花瓣)과 자방이 표현된 것, 측면에서 본 꽃잎과 꽃받침만 표현된 것, 연꽃, 잎, 줄기가 표현된 하연(荷蓮) 등이 있다. 연판이 위로 향한 앙련(仰蓮)과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 하나의 연판에 하나의 꽃잎이 있는 단판(單瓣), 하나의 연판에 두 개의 꽃잎이 있는 복판(複瓣), 연판이 2층 이상 겹친 중판(重瓣) 형식으로 나뉜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백제 등 고대 건물지에서 발견된 와당*에서부터 연화문이 나타나고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다양한 연화문이 보이며 7세기 이후의 각종 불상에 많이 장식되었다. 고구려의 연화문은 잎 끝이 날카롭고 강직해 보이지만 백제의 것은 온화하고 완만하며, 신라의 것은 우아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삼국시대까지는 연판 내 장식문이 인동문*, 구슬, 꽃술이 장식되었으나 8세기 무렵부터 잎, 꽃, 보상화문* 등으로 다채로워지며 고려시대엔 연판 내에 문자가 등장하고 귀꽃장식이 유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귀꽃장식이 매우 많고 연판의 양감도 줄어들어 선각에 가까워진다. 인동문과 결합된 연화인동문(蓮花忍冬紋)은 주로 삼국시대에, 연화당초문(蓮花唐草文)과 연화보상화문(蓮花寶相華文)은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난다.

연화좌

연화좌 蓮華座

→ ‘대좌’ 참조

열녀도

열녀도 列女圖

동양 고사인물화의 한 화제(畵題). 열녀들의 고사를 그린 것으로서 후한後漢~남북조(南北朝)시대에 유행한 유교적 주제의 그림이다. 열녀란 정조가 굳고, 총명함이 빼어난 여성을 가리키는데, 열녀도는 이미 한대(漢代)에 시작되어 화상석*(畵像石)에 많이 그려졌다. 군주를 높이고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교육적 내용, 즉 권선징악과 충효사상 등 유교적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권계화(勸戒畵)에 속한다. 한대의 그림은 정신적 사상적으로 권계화 정신이 지배적이었으며 그림의 소재나 형태면에서 주로 인물화*가 성행하였다. 열녀도도 한대의 상황을 반영하며 유행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서 《명사明史》에 이르는 29사 중의 아홉 개의 정사 속에 있는 열전에는 각종 미담을 모은 항목이 있는데, 이 안의 화제 중 대개는 한대의 유향劉向(리우 시앙)이 편찬한 《열녀전列女傳》에 기초하고 있다. 이후 계속적으로 그려져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제작되었다.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4~406)의 작품이라고 전하는 <여사잠도*>(런던 대영박물관 소장)와 <열녀전도권列女傳圖卷>(북경北京 고궁박물원 소장) 등이 대표적인 그림이다.

열주

열주 列柱
colonnade(영, 프)

건축 용어. 지붕 아래 대들보를 받치며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다수의 기둥.

영국왕립미술원

영국왕립미술원 Royal Academy of Art(영)

1768년 조지 3세의 인가를 받아 본격적인 미술학교의 개설, 연례 전람회 개최, 예술가에 대한 전시 수입 분배 등을 통해 영국의 순수 미술을 육성하고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고자 레이놀즈Sir Joshua Raynols(1723~1792)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협회. 정회원이 40명, 준회원이 20명(1876년부터 30명)이고 투표에 의해 선출된 회장 1명과 8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평의회가 운영됐다. 로열 아카데미는 1824년 런던에 내셔널 갤러리가 창설되기까지 예술가와 학생들에게 거장들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연차 전람회는 1780년부터 펠멜에서 개최되었으며 1868년 현재의 본부인 바린튼하우스로 옮겨져 매년 2회의 전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영남화파

영남화파 嶺南畵派
ingnanpai(중)

명, 청(明淸) 이래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에서 시작된 화파. 영남은 광주의 옛 이름이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명대(明代)의 임량林良(린 리앙)으로 수묵 화조화*에 뛰어났는데 필체가 간결하고 힘차면서 호방하여 영남 일대의 화풍을 향상시켰다. 그 기법을 본받은 사람으로 고엄高儼(까오 이앤, 산수화), 진서陳瑞(츠언 루웨이, 화조화)가 있고, 려간黎簡(리 지앤), 이괴李魁(리 쿠에이) 등이 계속해서 활약했는데, 주로 광동 지방 산수의 특색을 묘사하는 데에 치중했다.
앞의 두 사람은 창윤(蒼潤)함이 오진吳鎭(우 즈언)과 흡사하고, 담원(淡遠)하기는 예찬倪撰(니 짠, 1301~1374)과 근사하며 뒤의 두 사람은 화공*(畵工) 출신으로 기법이 정밀하였다. 청대 건륭 연간(乾隆, 1736~1795)에 소육명蘇六明(쑤 리우펑), 소장춘蘇長春(쑤 즈앙츠운) 등이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소육명은 민중의 생활과 시정의 풍속을 그림의 제재로 삼았고, 소장춘은 신선, 불상을 그렸지만 남방의 일반인들을 모델로 하였다. 청말(淸末)엔 거소居巢(쥐 츠아오), 거렴居廉(쥐 리앤)이 화조충어화(花鳥蟲魚畵)에 뛰어났는데, 이들은 운수평惲壽平(윈 서우핑)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현대의 번우番禹(판 위), 고검부高劍父(까오 지앤푸), 고기봉高奇峰(까오 치펑), 진수인陳樹人(츠언 수르언) 등도 일찍이 거렴을 스승으로 섬겼다. 고씨 형제와 진수인은 후에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화 기법을 도입하였고, 작품의 제재도 중국 남방의 풍물을 묘사한 것이 많은데, 중국화의 전통 기법을 운용하면서 일본 남화*(南畵)와 서양화 기법을 융합하여 사생에 치중하였다. 선명한 색채와 충분한 물기로 부드럽고 깨끗한 현대 영남화파의 새로운 풍격을 빛내며 전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