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시대 미술 魏晉•南北朝時代美術
대략 3~6세기의 중국 미술. 220년 후한後漢이 멸망하자 황하黃河 중류 지역에서 조조의 위魏(220~265)와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 손권의 오吳(222~280), 사천 지방에서 유비의 촉한蜀漢(221~263)등 3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265년에 찬탈하여 즉위하였던 위는 중국을 재통일하여 진(西晉, 221~263)이라 개칭하였다. 바로 이 시기를 위진(魏晋)시기라 한다. 반세기 이후 흉노가 낙양洛陽을 점령한 뒤 2만여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황제를 포로로 삼은 뒤 다시 장안長安으로 가서 약탈을 하자 진은 강남으로 후퇴하여 남경南京에 도읍하였다. 그 이후는 동진(東晉, 317~502)이라고 하며 이 뒤를 이은 유송劉宋(420~479), 남제南齊(479~502), 양梁(502~557), 진陳(557~589)의 한민족 왕조를 남조(南朝)라고 한다.
한편 화북에서는 4세기를 통해 이민족인 흉노匈奴, 강羌, 선비鮮卑 등의 소국이 흥망을 거듭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거쳐, 선비족의 탁발拓跋이 세운 북위北魏(386~535)가 화북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북위는 현재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효문제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시도하여 5세기 말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들 화북의 이민족 왕조인 북조와 화남의 한인 왕조를 일괄하여 남북조시대라고 일컫는다.
또한 위진과 남조를 합쳐서 육조(六朝)시대라고도 한다. 위진시대에는 유학(儒學)이 쇠퇴하고 대신 노장 사상에 기본을 둔 은일적(隱逸的)인 사조가 만연하고 도교가 신봉되었다. 그리고 새로 수용된 외래 종교인 불교가 한편에서 신앙되고 있었으며, 귀족층 사이에는 시서화를 만들고 감상하는 예술적인 풍조가 싹텄다. 북조에서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앙하여 국가 차원의 사탑이나 석굴이 축조되었다. 또한 서방으로 통하는 돈황* 등의 요충지에서는 서역풍과 중국풍이 혼합된 불교미술*이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건축:위의 조조가 세운 현재의 하북성 임장현의 업鄴은 동서 7리, 남북 5리의 도성이 건축되었다, 업은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에서 북조에 이르기까지 지리적 요충지로 쟁탈의 중심지가 되었고 도시계획은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조의 수도 건강健康(현 南京)은 옛 낙양성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궁성은 현양궁顯陽宮이다. 중앙에는 왕이 정사(政事)를 보는 정전(正殿)이 있고, 정전의 양측면에는 왕이 연회를 베푸는 용도 등으로 사용한 동서이당(東西二堂)이 있다.
조각:오호십육국시대 부터는 일찌감치 불교를 적극 수용하여 많은 불교 사찰이 건립되고 불상*도 활발히 조성되었다. 이때의 명문*이 있는 중요한 상인 후조後趙 건무 4년(338) 명의 〈금동불좌상〉(미국 샌프란시스코 드영미술관 소장)은 간다라*풍이 중국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위 시대에는 군주와 부처의 일치를 설파했던 국가 불교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데, 화평(和平, 460~466) 초부터 수도 평성 부근에 운강석굴*이 개착되었다.
이 석굴에서 담요曇曜에 의해 조영된 제16동에서 제20동에 이르는 서방 5굴에는 수십미터의 거대한 불상이 힘이 가득한 체구와 살찌고 풍만한 얼굴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세기말 제5, 6동 등의 불상은 양감을 잃고 평면적으로 섬세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효문제의 한화정책에 따라 이루어진 태화 18년(494)의 낙양천도 이후 개착된 용문석굴*은 운강과 비교하면 불감*의 깊이가 얕고 불상의 조형은 벽면의 공간을 거의 차지하고 있다. 불상들은 정면관을 중시하여 보다 단정하며, 마른 몸,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예리한 편이다. 용문석굴과 40km 떨어진 곳에 공현석굴*이 있다. 다섯개의 대형굴과 두 구의 마주보는 마애대상(磨崖大像)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현석굴의 상들은 다른 북위 조각에서 볼 수 없는 우아하고 활달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영희 3년(534) 북위는 서위와 동위로 나뉘어지고 각기 장안과 업에 도읍하였다. 하남河南의 이동(以東) 양식은 동위로 이어지며 천평(534~537) 양식을 형성한다. 이 시기의 상들은 머리가 약간 작고 부분적으로 환조미를 보이고 광배*가 화려하고 정교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한편 서위대에는 동위대에 비해 현존 유품이 적은데, 서안 초당사草堂寺 등 서위시기의 상들은 옷주름을 다루는 방법이 부드럽고 중후한 모습이다.
회화:동진의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6~407)는 연면한 가는 필선들로 그림을 그렸는데, 원소근대(遠小近大), 원담근농(遠淡近濃)에 따른 시각현상에 주목하였다. 장승요張僧繇(장 성야오)는 색채의 바림으로 입체감을 표현한 요철법*(凹凸法)으로 도석인물화*를 그렸다. 화론으로는 고개지의 《논화論畵》, 종병宗炳(쫑 빙)의 《화산수서畵山水序》, 왕미王微(우앙 웨이)의 《서화敍畵》, 사혁謝赫(시에 허)의 《고화품록古畵品錄》, 요최姚最(야오 츠웨이)의 《속화품續畵品》 등이 있다.
서예:위진시대는 진秦, 한漢의 전서*, 예서*에서 서사체*의 행서*, 초서*로 바뀌어졌으며 해서*가 성립되었다. 남조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행초체가 세련되어 동지의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와 왕헌지王獻之(우앙 시앤즈)의 필체가 뛰어났다. 초기 해서의 전형은 북량北凉의 지세제일(持世第一)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여초呂超의 묘지*(墓誌)는 해서체가 세련되어 가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공예:화북에서는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공예의 영향이 보이며, 4세기의 요녕성遼寧省 북표현北漂縣의 선비묘鮮卑墓에는 유리그릇과 누금세공*의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계통의 것들은 한반도의 삼국시대 고분과 일본의 고분들에서도 출토되어 흥미롭다. 산서성 대동大同 남쪽의 북위 유적터에는 포도 당초문*이나 서양풍의 인물이 부조되어 있는 금은제 그릇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서방영향은 남조에서도 파악되고 있다. 도자기에서 먼저 용*(俑)을 보면, 한대(漢代)의 명기류(名器類) 등은 쇠퇴하였지만 인물용(人物俑)중에는 고개지의 인물처럼 우아한 자태의 작품이 발굴되고 있으며 마용(馬俑) 역시 우아하고 풍부한 장식을 보이고 있다. 육조시대의 요지는 북중국에서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으나 양자강 하류 지방에서는 다수 발견되고 있다. 강남의 도요지에서 만들어진 청자* 계통의 도자기가 3~4세기로 편년(編年)되는 남경南京의 고분에서 발굴된 바 있으며, 항주杭州 부근의 덕청요에서는 짙은 색의 흑유를 바른 도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