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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주의

종합주의 綜合主義
Synthetisme(프)

19세기말 프랑스의 회화 운동으로서 고갱Paul Gauguin(1904~1948)과 나비파* 화가들인 베르나르Émile Bernard(1868~1941), 앙크탱Louis Anquetin(1861~1932), 라발Charles Laval 등에 의하여 주장된 미술 이론이자 기법. 이들은 인상주의*의 화풍과 이론으로부터 결별하고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기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여 작업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보였다.
1889년 파리에서 고갱이 개최한 <인상주의* 및 종합주의> 전람회가 그 시발점이 되었으며, 종합주의라는 용어도 고갱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종합’은 인상주의의 색채분할과 그 기법의 해체적, 분석적인 경향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종합을 의미한다. 고갱은 자연에서 광선과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데 전념한 인상주의의 방식이 지극히 피상적이며, 사상이나 지적 사고를 소홀히 여긴다는 한계를 자각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인상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인상주의의 기법이 대상을 오히려 해체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하였다. 그럼으로써 작가의 주체성에 기반을 둔 형태와 색채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주관과 객관의 종합을 목표로 하였다.
고갱은 1886년 여름에 퐁타방 등지에서 베르나르를 비롯한 여러 추종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종합주의 그룹을 결성하였다. 상징주의* 시(詩)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주로 상징주의적인 의미와 내용이 심화된 주제를 선택하였다. 회화 기법에 있어서는 명암이나 입체감의 표현이 없는 순수한 색면과 선을 토대로 구성요소들을 거의 이차원적으로 배열한 새로운 장식적인 회화 양식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이차원의 평면을 강조하는 종합주의의 기법은 주제의 느낌이나 기본 개념을 색면과 선이라는 형식에 종합시키고자 했다.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형태를 평면적인 색채로 포착하여 단순화시키고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는 자신들의 회화기법을 일컬어 ‘클루와조니슴*(cloisonnisme)’이라고 명명하였다. 원색의 넓은 평면과 굵게 두른 검정 윤곽선으로 생기는 효과가 중세의 클루와조네(cloisonné, 칸막이 된) 에나멜* 기법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르는 중세 미술뿐만 아니라 일본 채색판화와 원시미술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그 밖에 브르타뉴 지방의 토속미술, 고갱의 강렬한 개성 등이 이 운동의 근거가 되었다.
1890년대에 결성된 나비파는 종합주의의 사고를 이어 받아 종합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예술 작품은 눈이 아니라 마음과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에 대한 예술의 우위를 확보하려고 시도하였다. 종합주의는 나비파뿐만 아니라 야수주의*, 추상에 이르는 현대회화에 강한 영향력을 주었다.

→ ‘클루와조니슴’ 참조

주관주의사진

주관주의사진 主觀主義寫眞
subjective photography(영)

독일 현대사진의 대부로 불리는 슈타이너트Otto Steinert(1915~1978)에 의해 주창된 사진예술의 한 방법론. 1952년에 출판된 슈타이너트의 작품집 제목으로 처음 사용되면서 이후 독일 사진의 중요한 흐름이 되었다. 주관주의 사진은 역사적으로 1910년대 독일에서 유행한 파추Albert Renger Parzsch 등의 신즉물주의* 사진의 맥을 이으면서 등장했고, 이 사조의 작품은 대상성에 충실하면서 그 대상을 통해 사진가의 주관을 표현하고 이를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다소 역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주두

주두 柱頭 capital(영)

원주*나 각주*, 벽기둥* 상단에 얹혀 있으며 처마도리나 위의 아치*를 지탱하고 있는 건축물의 일부 혹은 여러 형태의 기둥들의 맨 윗부분에 얹는 부재(部材). 구조적으로 건물 상부로부터 무게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위로부터의 힘을 기둥에 집약시키는 접점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시각적으로는 각종 문양과 동식물의 모티브*를 그리거나 치장 벽토를 바르거나 조각을 하는 등 장식을 하여 조형적인 기능도 담당한다. 주두는 벽에 붙여 세울 수도 있고 고정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주두의 밑부분에는 ‘기둥목도리(necking)’라고 부르는 쇠시리 장식이 있고, 윗부분에는 직사각형 모양을 한 아바쿠스*(abacus)가 있다. 기둥은 보통 원통 모양이며 주두 위의 석조는 단면이 정사각형이므로 주두의 모양은 그 중간에서 연결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이집트에서는 연꽃이나 파피루스* 같은 식물 모양으로 주두를 만들었으며,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동물 형태로 깎아서 만들었다. 고전주의* 건축 양식에서 주두는 기둥의 양식을 가장 쉽게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부재이다.
서양에서 주두의 양식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세가지 형식인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주두는 고대 그리스에서 처음 고안되었다.
도리아 양식의 주두는 달걀을 잘라놓은 듯한 둥근 모양의 에키누스*(echinus) 위에 정사각형의 관판(冠板)으로 구성된다. 이오니아식 주두는 관판과 에키누스 사이에 있는 한 쌍의 소용돌이 장식이 특징이다. 코린트식 주두의 관판은 거꾸로 된 종모양으로 지지되며 양식화된 아칸서스* 잎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간결한 도리아식, 우아한 이오니아식, 장식이 풍부한 코린트식은 이후 거의 모든 주두 양식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도리아식을 변형한 토스카나 양식과, 이오니아 주두의 소용돌이 장식과 코린트의 종 모양을 결합한 혼합주두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 외에도 로마 말기의 프로토마이 주두(protomai, 네 구석에 동물의 상반신이 돌출한 주두), 비잔틴과 중세의 광주리형 주두, 바로크 주두, 우의주두(chapiteau histoire, 성서 등의 이야기를 새겨넣은 주두), 크로켓 주두(crocket, 권엽 장식을 붙인 고딕 주두) 등이 있다.
한편 동양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슬람 양식 주두는 작은 쇠시리의 반복과 소형 아치를 주로 한 추상적인 형태를 사용했고, 까치발 장식 주두와 연꽃 모양으로 장식된 종모양의 주두는 인도와 중국, 일본에서 자주 발견된다. 한국 건축에서는 기둥머리 위나 창방, 평방 등의 횡으로 놓이는 부재 위에 놓여 위쪽의 무게를 받아 기둥이나 벽으로 전달시켜 주는 대접처럼 넓적하게 네모난 나무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여기에서 주두는 운두와 굽, 굽받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 ‘주식’ 참조

주랑현관

주랑현관 柱廊玄關
portico(이, 영)

건물 입구 앞에 기둥이 있는 현관 또는 신전이나 교회, 기타 건물에 부속되어 있는 지붕이 덮인 출입구. 지붕이나 엔타블러처*, 박공*을 떠받치는 열주랑 부분으로 간혹 많은 계단과 연결되어 있으며, 종종 주 파사드*로부터 돌출되어 있다. 주차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주문

주문 籒文

대전*(大篆). 중국의 고대 서체의 일종. 서주西周의 금문*(金文)으로부터 파생된 자체(字體)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서진西秦에서 통용되었다. 자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진시황秦始皇 때보다 간략화된 소전*(小篆)이 출현하였다. 현존하는 〈석고문*石鼓文〉은 주문의 대표작으로 간주된다.

→ ‘대전’ 참조

주식

주식 柱式 order(영)

서양 고전 건축에 있어서 주초(柱礎, base)와 주두*를 갖춘 원주*와 엔타블러처*가 결합된 형식을 가리키는 용어. 원주와 그 위에 얹히는 수평적 엔타블러처를 구성하는 각부의 비율이나 형식상의 차이에 따라 도리아 양식*, 이오니아 양식*, 코린트 양식* 세 가지로 구별하며, 여기에 로마 시대에 형성된 토스카나 양식과 콤포지트 양식을 포함시켜 다섯 가지로 구별하기도 한다.

주심포

주심포 柱心包

우리나라 목조건축 양식의 하나. 공포*(栱包)의 일종으로, 공포가 기둥의 위에만 배치된 형식. 기둥 위에 주두*(柱頭)를 올려놓고 그로부터 첨차(檐遮)와 도리*, 보*를 층층이 짜올려 지붕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비교적 간단한 형식의 공포이다. 다포*계와 익공*계 양식보다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주심포 양식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건물의 공포에서도 볼 수 있어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심포 양식의 건물은 외관상 화려함보다는 단아한 맛을 보여준다. 경북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국보 제15호)이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랜 예이다.

주왕조 미술

주왕조 미술 周王朝美術

상商왕조가 쇠퇴기에 들어갔을 때 서쪽의 한 제후국인 주周가 강대국으로 등장하였으며, 문왕文王은 상 영토의 3분의 2를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안양을 함락하였고, 무왕을 계승한 성왕成王의 섭정으로 알려진 주공은 봉건제도를 확립하였다.
주왕조는 봉건제도, 전례(典禮), 조상 숭배의식 등 상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국가를 발전시켰다. 상제(上帝)를 숭배하는 것이 중심이 되던 종교생활은 ‘천(天)’의 관념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청동기의 명문이나 고문헌에는 후에 공자 가르침의 기본이 된 천의를 따르고 덕을 숭상함을 중심으로 한 도덕률의 기원이 나타나 있다. 주왕조는 기원전 771년 유왕幽王의 서거와 섬서성 동부의 낙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종말을 고했다.
공예:서주西周의 청동기는 상 이래의 전통을 변화없이 이어받고 있으나, 청동기 표면에 명문*을 새기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명문의 내용은 정치적 업적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제기가 봉헌되었다. 기원전 10세기경의 청동기 양식은 일반적으로 과장되며 거칠게 소상되고 테두리 장식은 점점 커지며 여러가지 새로운 동물 문양이 등장하고 있다. 기원전 9세기에는 새나 짐승이 수평으로 전개된 여러 모양의 비늘무늬로 분해되어 상대(商代) 말기에서 주대(周代) 초기 청동기에 보이던 문양의 통일성이 사라진다. 기원전 7세기경에는 북방 이민족과 접촉하여 동물의 형상을 복잡한 무늬로 만든 새로운 예술적 양식이 발전되기 시작한다.
도자기는 청동기를 거의 모방하였으며, 서주시대 토기의 대부분은 거친 회도(灰陶)이며 아랫부분이 둥글고 구연부가 넓은 저장용 항아리이다. 이외에 청동기의 명문으로 미루어 보아 기원전 11세기에서 10세기로 짐작되는 유약을 바른 그릇들이 하남, 강소, 안휘성 등의 고분에서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러한 그릇은 후대 청자* 계통의 시조로 간주된다.

주조

주조 鑄造 casting(영)

조각*, 공예*의 선형기법의 하나이다. 가열, 용해 등을 수단으로 한 소재를 주형에 부어 넣어서 필요한 형을 얻는 방법. 용해된 금속 등 굳어지는 성질이 있는 물질을 주형에 부어 조각 작품을 복제해내는 방법으로 사용된다. 소재가 금속일 때는 주금이라 한다. 금속 외에는 석고, 도토, 유리 등 형의 구석구석까지 닿고 고화 후에는 아름답고 견고한 재료가 적합하다. 주물의 설계, 주조 방안의 작성, 모형(模型)의 작성, 용해 및 주입, 끝손질의 순서로 진행한다.

죽간

죽간 竹簡

중국 고대의 글씨를 쓰던 재료의 하나.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중국에서는 글씨를 쓰는 재료로서 대나무나 비단이 사용되었는데, 값이 싼 대나무가 실용적으로 널리 쓰였다. 이 대나무는 마디를 잘라내고 적당한 길이(2척, 1척 등)로 다듬은 다음, 이것을 세로로 쪼개어 얇은 나무 조각 모양으로 만들고 불에 쬐어 푸른 기운을 없앤 다음 사용한다. 이 대나무로 만든 패찰을 ‘간(簡)’이라고도 하는데, 현존하는 죽간으로는 전국시대의 초간(楚簡)이 있다. 한간(漢簡), 진간(晋簡)은 중국 서북의 변방 지역에서 1만 2천여 점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이 목간(木簡)이며 죽간은 1% 이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