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
고려청자 高麗靑磁
한국의 청자*는 중국 고월자*의 영향과 지배층의 수요로 인해 9세기 후반~10세기 때부터 전남 강진의 요*(窯)에서 제작되었다. 초기 청자인 햇무리굽(日暈文) 청자요지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와 계을리 등 중국과 가까운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이는 신라말 지방호족의 세력이 확장되고 장보고張保皐의 해상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도자문화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햇무리굽 청자는 양질의 청자로 갑발*을 사용하는 등 생산비가 높아서 상류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질청자(粗質靑磁)도 생산되지만 11세기 말까지 기형(器形), 문양(文樣), 번조수법(燔造手法) 등이 세련되어진 청자가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관요*(官窯)를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12세기 전반에는 순청자가 세련되어져 유명한 비색(翡色)청자가 제작되는데 인종仁宗 장릉長陵 출토 청자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 유약을 완성하여 송대(宋代)의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수중금袖中錦》에 기록된 바처럼 중국에서도 절찬을 받았다. 또한 청자에 문양을 상감*하는 독창적인 상감청자*(象嵌靑磁)가 고안되어 12세기 중반에는 문공유묘文公裕墓(1159년) 출토 〈청자상감보상당초문대접〉과 같은 발달된 상감청자가 제작되었다. 이 대접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구성 등이 뛰어나고 기형의 선이 더욱 유려하다. 상감기법이 초기에는 부분적으로 시문되다가 12세기경 음양각된 문양으로 대체되며 한 단계 발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철화청자*(鐵畵靑磁), 철채청자*(鐵彩靑磁), 진사채청자*(辰砂彩靑磁), 화금(畵金靑磁)청자*, 연리문청자*(練理文靑磁) 등이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철화청자는 유약을 입히기 전에 철분 안료를 써서 붓으로 그림을 그린 후 산화염으로 구워내어 문양을 검은색으로 발색시킨 청자이다. 11세기 말~12세기 전반에 성행하였고 고려 말까지 계속 제작되었으며, 회화적인 필치가 소박하고 구도가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철채청자는 청자태토 위에 철사 안료로 그릇 전체를 칠하고 청자유약을 시유하여 마치 흑유를 씌운 것처럼 검게 발색된 그릇이다. 진사채청자는 청자를 초벌구이한 후 진사*(辰砂)로 그리거나 문양의 특정 부분에 악센트로 찍은 후 청자투명유를 시유하여 환원번조시켜 선홍색으로 발색된 청자를 말한다. 산화동 안료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기법은 중국보다도 2세기 가량 앞서 사용되었다. 고려청자에서는 이를 절제하여 조화있게 사용하였다. 화금청자는 순청자에 금채한 것과 상감청자에 금채를 한 것인데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연리문청자는 백토(白土), 자토(赭土), 회색토(灰色土)를 함께 반죽하여 성형하고 그 위에 청자유를 발라 나뭇결 무늬를 나타낸 그릇이다.
12세기 후반~13세기에는 무신 집권과 몽골 침입 등의 혼란으로 고려청자의 기형이 둔해지고 굽이 커지며 유약의 색깔이 어두워지고 문양도 느슨해진다. 이 때에 간기(干記)가 써있는 청자 상감 그릇이 만들어지는데 암녹색의 흐린 유약과 둔해진 곡선의 그릇으로 모래 받침 자국이 남아 있다. 충렬왕대에 일시적으로 비색이 좋아지고 편호(扁壺)같은 새로운 기형과 문양도 등장하는데 이는 원元나라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이후 환원번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황갈색을 띠며 과장된 기형의 청자가 생산되었고, 14세기에는 쇠퇴하여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행된다. 중국청자의 색은 진하고 불투명하며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은 비색을 지니고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등의 특색이 있으며 중국보다 앞선 진사기법과 상감기법의 창안에 독특한 품격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