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회화
돈황회화 敦煌繪畵
현존하는 돈황 회화는 두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천불동千佛洞(莫高窟), 서천불동, 안서 유림굴安西楡林窟 등의 석굴 사원군의 벽화*이다. 상하 5m폭의 화면으로 총연장은 무려 25km에 달하며 연대는 5세기 중기(북위北魏)부터 14세기 초(원元)에 이른다. 조굴명(造窟銘)이나 공양자명(供養者銘)에 의거하여 양식적인 편년이 가능하며, 중국 회화사의 중요한 좌표를 제공한다. 즉 5~6세기의 벽화*는 중국 고대회화의 전통에 중앙아시아(특히 쿠차)의 영향이 가미된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불전(佛傳), 본생(本生) 등의 설화를 프리즘처럼 옆으로 길게 전개해 놓은 것이 많다. 7세기에 들어서 당唐이 서역을 지배함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진보된 양식이 직접 도입되었고 유기적인 화면 구성, 세련된 도상에 의한 대규모의 정토국(淨土國) 표현이나 《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등의 변상*이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8세기 중반에 절정에 달하였다.
존상이나 공양자의 원숙한 묘사법, 깊이 있는 산수의 표현 등 중국 고대회화의 고전적 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티베트가 점령한 시기(787~848)를 거쳐 장씨張氏, 조씨曹氏의 귀의군기(歸義軍期, 9세기 후반~11세기 초반)가 되어서는 도상이나 표현이 번잡한 채로 고정화되었으며, 지방적인 양식으로 쇠퇴하기 시작한다.
두번째는 비단, 삼베, 종이 등이 그려진 봉납용, 예배용 화폭이나 두루마리*류로서 11세기초에 막고굴의 소굴(藏經洞)에 감추어져 있다가 1900년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들의 종류는 양식이나 화법이 세련된 것, 거친 것 등 다양한데, 8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700여점을 헤아리고 있어, 중국의 불교회화 자료로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