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 현대 미술
중국 근, 현대 미술 中國近現代美術
19세기 말에 중국은 아편전쟁(阿片戰爭, 1839~1842) 등 열강의 침략에서 비롯된 격동기를 맞이하면서 근대기가 시작되었다. 중국 근대는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던 1840년대부터 5•4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까지로 설정된다. 이 시기의 문학 미술 문화계에서는 중국 전통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서양 문화의 장점을 가미할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서구화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미술계에서 새로운 근대 미술교육 기관이 탄생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1906년 남경양강사범학당南京兩江師範學堂과 북경 북양고등사범학교北洋高等師範學校에 서구식 미술 학과가 설치되었다. 남경양강사범학당은 교장인 이서청李瑞淸(이 루이킹)이 일본의 예술교육을 시찰하고 온 뒤 학부에 도화수공과(圖畵手工科)를 개설할 것을 요청하여 생겼다. 도화과에서는 소묘*화(素描畵), 수채화*(水彩畵), 유화*(油畵), 용기화(容器畵), 도안화(圖案畵), 중국화(人物, 山水, 花卉)를 가르쳤고, 수공과에서는 금공(金工), 목공(木工), 죽공(竹工), 칠공(漆工) 등이 있었다.
또한 일본이나 유럽 등으로 유학해 구체적인 미술을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이들 유학생들 중 1920년대 중기 서비홍徐悲鴻(쉬 뻬이홍)은 남경으로, 유해속劉海粟(리우 하이수)은 상해上海로, 임풍면林風眠은 항주杭州로 돌아와 정착하여 중국 화단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그러던 중 1930년대 초 일본의 침략이 목전에 이르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상해에서는 현대화가 방훈금龐薰琴이 창립한 국제적인 도몽사都夢社(La Societe des Deus Mondes)가 해체되고 대신 결란사決瀾社(The Storm Society)가 발족되었다. 미술가와 문인들은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자유개방주의자들은 예술 자체를 위한 예술이라는 원리를 내세웠고, 현실주의자들은 좌경화하여 인민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중국은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이어 내전에 휘말리게 된다. 국민당이 패배하기 전 몇 년간 미술은, 방훈금, 목판화가 황영우, 그리고 조무극趙無極(자오 오우키)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도전에 가까운 서정주의로 특징지워진다. 항주 미술학교 임풍면의 제자인 조무극은 일본군에 점령당했던 혼미한 시기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풍부한 감수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그의 양식은 중국회화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조무극은 1948년 파리로 건너가서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시기에 또한 주목되는 사람은 전후 북경에서 스승 부금傅金의 화풍을 따라서 화원풍의 작업을 하던 여류화가 증유하曾幼荷이다. 그녀는 호놀룰루에 이주하여 서구 미술의 가장 발전된 운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건축:19세기 중반이후 외국인들이 들어선 곳은 어디나 서구식 상점건물, 학교, 교회가 세워졌다. 중국적인 요소와 서구적인 요소를 결합한 혼합 양식이 곧 출현하였으나 좋은 작품의 예를 거의 찾아 볼 수는 없다.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고 전통 양식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려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 1930년 건축가들이 중국건축연구협회中國建築硏究協會를 창립하였다.
30년 동안 중국 건축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양사성梁思成(량 시쳉)이 협회에서 활동하였다. 이들 건축가들이 세운 작품들은 남경, 상해, 북경의 정부 청사나 대학 건물이다. 이 건축물들은 지붕 형태를 중국 전통식으로 만들고 세부는 회색 콘크리트로 나무를 대신한 것이나 본질적인 구조는 서구식이었다. 1949년 중국이 본토를 장악한 이후의 관청 건물은 러시아 건축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양식은 1950년대 공공건물, 특히 중국 인민 혁명 군사 건축양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회화:최근 백년간의 회화는 근대 중국을 형성하는 전통적 관념과 새로운 관념, 토착 양식과 외래 양식간의 갈등의 연속이었다. 궁정 화가들은 낮은 지위로 전락하였고, 문인 화가들 역시 20세기 초 왕휘王絮(우앙 후에이, 1632~1717)의 학구적인 문인 화풍을 계승한 정통파의 후계자인 재희載熙(1801~1860)와 탕태분湯胎汾(1778~1853)을 제외하면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이후 그 양상이 차츰 변모되어 갔다. 민중예술에서 다른 한편은 상해와 같이 번창한 해안 도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사조에서 영향받은 임백년任伯年(1840~1895)의 힘찬 화풍이 등장하게 된다.
이 새로운 풍조는 조지겸趙之謙(자오 즈지앤, 1829~1884)과 같은 몇몇 작고한 오파*吳派 후계자들에게서 나타났다. 조지겸은 바위틈의 포도나 화훼로 주목을 받은 유명한 화가로 구도나 필치는 근대의 거장 제백석齊白石(자오 츠지앤, 1863~1957)에게 영향을 주었다. 조지겸의 후계자 오창석吳昌碩(우 츠앙스, 1844~1927)은 주로 대나무, 화훼, 암석을 그린 다작 작가(多作作家)로 서예를 곁들여 상당히 효과 있게 작품을 구성하였다.
전통적인 화풍을 주장한 20세기 화가 중에는 화가, 교사, 감정가인 황빈홍黃賓虹(후앙 빈홍, 1864~1955)도 있다. 이들에 비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면모를 보인 인물은 장대천張大千(즈앙 따지엔)으로 1899년 사천성四川省에서 태어나 청말(淸末)의 문인 화풍을 익힌 바 있다. 이러한 흐름과는 반대로 서구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중국 현대미술에 힘쓴 인물로 고검부高劍父(까오 지앤푸)가 주목된다. 그는 도쿄로 유학해 음영법이나 명암법과 같은 서구적인 기법들과 현대적인 소재를 도입하는 일본화운동(日本化運動)의 영향을 받았다. 고검부의 영남파*嶺南派 작품들은 너무 강한 일본 정서와 의도적으로 이룬 종합화 때문에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전통적인 기법을 현대적인 주제에 적용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50년대 이후 들어서는 현대 사회주의 강국으로 변모시키는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예술도 정치와 국가에 봉사하게 되었다. 인민에게 봉사하라는 모택동毛澤東(마오 쩌뚱)의 훈계에 영향받은 1950년대 미술가들은 노동자와 함께 살고 ‘이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농장과 공장으로 들어갔다. 전송암錢松嵒(치앤 송안), 이가염李可染(리 크란) 등과 같은 활동파는 이념적인 내용을 그렸다.
1960년대 교육, 학문, 미술에 만연하던 ‘부르주아적’ 경향을 일소한 1966~1969년 문화대혁명기에서 미술 문화의 통제는 가혹하였다. 대학, 미술학교, 박물관, 미술 전시는 폐쇄되었다. 이 시기에는 예술에서의 엘리트주의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미술 활동의 중심지는 도시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장과 시골 공동체로 옮겨졌고, 교육받은 미술가들은 서로를 일반 대중과 일체감을 갖도록 강요받았다. 노동자, 농민, 군인 등 거대한 군중이 아마추어로서 미술 활동을 하였다.
장식미술:장식미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외국 양식과 침체된 정통 양식간의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장인의 기술 수준은 높았지만, 1950년대 이전에 제작된 자기*, 칠기*, 옥기* 등의 공예품은 독창성이 결여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본토를 점령한 후 전통 공예 기술은 북경 수공업연구소手工業硏究所 후원으로 활발해졌다. 또한 경덕진景德鎭의 대규모 공장들은 점차 기계화되었고, 디자인에 대한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