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아트
페미니스트 아트 feminist art(영)
여성 미술. 1960년대 후반부터 여성 미술가들이 종래의 예술을 남성의 시각에서 본 것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여성의 감성과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보고 실천한 예술을 말한다.
여성 참정권론자들은 여성의 해방을 당면목표로 했으나, 이후 여성운동은 사회, 문화적 부분까지 포함하는 등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페미니스트 비평가와 역사가들은 대부분의 여성들로부터 미술가가 될 기회를 박탈하는 차별적인 문화제도를 지적하게 되었다. 수백년 간 유럽의 대부분의 여성은 미술가가 된다고 생각하거나 설사 그런 생각을 가졌다 하더라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 받고 자신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여성이 시각문화에 기여한 증거를 이젤 그림보다도 덜 공식적인 영역, 즉 북미의 누비이불이나 나바호 담요, 사진 등에서 주의해 살펴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있었다. 문화사적으로 여성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는 여성의 미술을 하나의 전통으로 확립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페미니스트 아트는 제도의 성적인 편견을 공격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여성들은 이를 수용하여 현 제도를 비판하고 보다 나은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공동 제작하기도 한다.
20세기초에 더욱 많은 여성 미술가가 등장했는데,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1885~1979), 토이버 아르프Sophie Taueber-Arp(1889~1943), 오키프Georgia O’Keeffe(1887~1986), 헤프워드Barbara Hepworth 등이 대표적이고, 그 뒤를 이어 크리사Vadra Chryssa, 마리솔Escobar Marisol(1930~ ),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1928~ ), 하티간Grace Hartigan(1922~ ), 라일리Bridget Riley(1931~ ) 등이 1950년대에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누구도 의식적인 페미니스트 작가는 아니었다. 여성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이러한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여성 미술가들의 운동은 여성 해방운동과 뉴욕에서 일어난 예술가들의 저항운동이라는 두 개의 급진적인 모임이 결합되면서 가속화됐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덧붙이고 현존하는 예술구조의 불공정성을 드러냄으로써 페미니스트 아트의 기반을 다졌다.
1971년에는 켈리포니아 미술대학 등에서 페미니스트 아트 강좌가 생기고, 1972년에 여성작가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이후로 여러 그룹들이 협조와 공동작업, 전시회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979년에는 페미니스트 아트 인스티튜트가 여성의 손으로 결성되었다.
또 같은 해 페미니스트 아트의 기수로 불리는 시카고Judy Chicago(1939~ )가 이 주장을 상징하는 <저녁 만찬 The Dinner Party>을 발표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페미니스트 아트는 순전히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미술이 아니라 평등주의자와 차별주의자의 논쟁, 어떤 면에서는 여성 예술가가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경험을 탐구한 작품 등을 포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