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미술
헬레니즘 미술 Hellenism Art(영)
그리스어 ‘hellenismos(본래는 ‘그리스어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의 뜻)’는 이미 고대에 있어서도 시대에 따라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 근대어인 헬레니즘도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시대 개념으로서 쓰이는 경우에도 연구 분야나 학설에 따라서 다른 시대의 구획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고전 고고학이나 미술사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기원전 323)에서부터 악티움 전쟁(기원전 31)까지 약 300년간에 걸친 그리스 회화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대의 그리스 문화는 동방을 향해서 광대한 범위로 확산되고, 그 영향은 인더스 강 유역에까지 파급되었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후계자는 각지에 왕국을 세웠는데, 셀레우코스 조의 수도 안티오키아, 프톨레마이오스 조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종래 폴리스의 개념으로는 더이상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대도시(코스모 폴리스)로 발전하여 헬레니즘 문화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미술의 성격도 변하고 신앙과의 관련도 약해졌으며 미술 작품은 지배자의 권력과시, 혹은 단순한 감상을 위해서 제작되게 되었다.
또한 타민족의 문화로부터 영향도 받아, 헬레니즘 시대 미술의 흐름은 더이상 이전같이 명확한 양식 전개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타문화의 그리스화라는 현상을 도외시하면 초기(기원전 330~200), 성기(기원전 200~150), 후기(기원전 150~30)의 3단계로 구분되어 양식 전개를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건축에서는 풍경과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지배하고 그 장대함을 과시하는 것이 주된 경향이었다. 그 예는 페르가몬의 아크로폴리스의 유구에서 볼 수 있다. 중요한 건물의 대부분은 아탈로스Attalos 왕가가 번영했던 기원전 250~150년 사이에 세워졌는데, 성기 헬레니즘 조형(造形)의 힘에 의한 공간의 지배에 대한 의지를 읽을 수가 있다. 원래 불규칙한 언덕으로 되어 있던 지형이 많은 노력을 들여 여러 단(段)의 테라스로 변화되고, 가능한 한 질서를 추구해 신전, 제단, 극장, 회랑, 도서관, 왕궁 등의 모뉴멘털한 구조물을 세웠다. 같은 식으로 질서에 의한 광대한 공간의 지배는 로도스 섬에 있는 린도스의 여신 아테나의 성역, 코스 섬에 있는 아스클레오피오스 성역 등의 건축군에서도 명백히 볼 수가 있다. 대도시에 사는 유복한 시민의 주거도 점차로 호사스럽게 되어 모자이크로 장식되고, 주랑에 둘러싸인 안뜰이나 더 나아가 정원도 갖게 되었다.
헬레니즘 미술 양식의 전개는 뛰어난 유품이 많이 있는 조각에서 가장 명확하게 살펴 볼 수가 있다. 초기에는 리시포스Lysippos의 영향 하에서 발전했고, 그의 세 아들 에우티크라테스, 다이포스, 보에다스도 활약했었다. 로마 시대의 많은 카피가 남아 있는 <안티오키아의 도시 여신>(기원전 300년경)의 제작자도 리시포스의 제자인 에우티키데스였다. <안티움의 소녀>도 볼륨감있고 질박한 이 시대의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성기에는 힘찬 독창성에 넘친 조형의 에너지가 분출하였다. 부조*에 있어서 상(象)과 공간은 회화적이라 할 만큼 긴장된 관계를 이루고, 환조에 있어서도 상이 방출하는 에너지는 주위의 공간을 압도한다.
후기에는 또다시 위대한 과거를 돌이키는 고전주의적 풍조가 일어났다. <밀로의 비너스>는 이 시대의 초기에 해당하고, <키레네의 아프로디테>는 고전주의적 경향이 강한 기원전 100년경의 원작에 의한 로마 시대의 모작으로 생각된다. 초상은 헬레니즘 조각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였다. 거의가 로마 시대의 모작이지만, 시인, 웅변가, 사상가, 지배자들의 많은 초상이 남아 있고 시대에 따른 양식*의 변화도 보인다.
초기의 조각가 폴리에우크테스가 제작한 데모스테네스의 초상에서는 사실을 꾀하면서도 여전히 볼륨감 있는 조형에 의한 이상화를 볼 수 있는데 비해, 후기의 작품에는 상의 두부(頭部)에만 사실의 정력을 집중한 로마 초상 조각의 선구를 엿볼 수가 있다. 차차로 호장함을 더해가고 있던 헬레니즘의 궁전, 공공 건축, 그리고 또 시민의 주택들은 화려한 벽화*나 대형의 판화*(版畵)로 장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들은 오늘날 다 없어졌지만 마케도니아의 펠라나 델로스섬, 또한 폼페이 출토의 디오스 코리테스의 서명이 있는 마루면 모자이크에서 그 편린(片鱗)을 엿볼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폼페이에서 출토된 기원전 4세기 말의 회화*를 모자이크*로 묘사했다고 생각되는 <알렉산더 모자이크>는 극적인 주제, 격한 움직임, 명암의 효과, 원근법에 의한 거리의 표현 등 헬레니즘 회화의 특징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등 베수비오 화산 주변의 도시들과 로마 제정 초기의 빌라를 장식했던 프레스코*화는, 헬레니즘기 벽화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공예품들 중, 타나그라 인형(人形)이라고 불리는 가련한 모습의 테라코타 소상에서는 대형 조각과 같은 양식의 전개를 추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특히 당시 여성의 풍속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화례에서는 탁월한 초상예술의 반영이 보인다. 풍부하게 장식된 귀금속이나 브론즈로 만든 용기가 수 없이 만들어졌고 도예품은 간소했으며, 대량 생산된 ‘메가라식 배(杯)’ ‘사모스식 배’라고 불리는 작은 그릇에는 흑색 바탕 위에 압인에 의한 부조 장식이 있다.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 끝에 숙적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는 동지중해역에 지배의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최후까지 저항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국마저 악티움 전투에서 패하자 헬레니즘의 세계는 붕괴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미술 최후의 고전주의적 경향은 그리스 문화의 후계자를 자임하는 새 지배자에게 이어져, 공화정 말기 및 제정 초기의 로마에서 눈부시게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