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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미술 高句麗美術
기원전 2~1세기에서 서기 7세기까지 약 700여년 동안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걸쳐 나타난 미술. 만주에 터전을 잡은 고구려는 중국과 화북 지방뿐 아니라 북방 이민족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서역 및 남시베리아의 영향을 많이 수용하였다. 또한 일찍부터 낙랑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또 그 고지를 점령한 관계로 낙랑 미술*의 전통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남쪽으로 퍼뜨리는 중간자 역할을 하였다. 그 묘제 미술과 불교 미술은 백제, 신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건축:고구려의 건축은 도성(都城), 궁궐, 사찰, 살림집 등이 있었지만 현존하는 예가 없어 현재까지 알려진 궁궐터와 절터의 발굴 조사 및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건물의 그림, 문헌 기록에 의거하여 추측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궁궐터로는 통구의 국내성國內城과 평양의 안학궁安鶴宮, 그리고 장안성長安城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궁궐터 주변에는 전시(戰時)나 유사시에 피난, 방어를 목적으로 한 산성으로 위나암산성尉那巖山城(국내성)과 대성산성大城山城(평양)이 있었는데, 이는 도성제(都城制)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근년에 조사된 안학궁터는 한 변이 623m나 되는 마름모형 성벽 안에 남북 선상으로 북궁, 중궁, 남궁과 여기에 대칭 형식으로 동궁과 서궁이 배치된 대건축군과 정원 및 후원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남궁의 정전(正殿)은 정면57m, 측면27m로 그 규모가 장대하다.
현재 알려져 있는 고구려의 절터로는 평양 동북부의 청암리사지淸岩里寺址와 대동군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등이 있어 고구려의 가람* 배치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청암리사지는 팔각탑을 중심으로 동, 서, 북의 삼면에 금당(金堂)을 배치한 1탑3금당식의 가람 배치인데, 일본 최고의 사찰인 아스카테라飛鳥寺(596년 완성)의 건립에 영향을 준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전각과 부속 건물 등을 묘사한 것이 많아서 당시 존재했던 일반 건축의 세부와 배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등을 제공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팔각주, 방주, 원주 등의 기둥과 맞배지붕*과 우진각지붕*, 그리고 치미와 수막새 기와장식, 인자형(人字形) 대공*(臺工)과 동자주(童子柱)의 설치 등 근세까지 건조된 전통적인 목조건축과 기본적으로 유사한 매우 발달된 건축양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평북 시중군時中郡 노남리魯南里와 북창군 대평리, 만주 집안 동대자 등에 당시의 집터가 있음이 알려져 있다. 이들 가운데 시중군의 것은 주변에서 한 점의 기와도 발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서민층의 주택으로 보여지는데, 동서로 늘어선 네 개의 기둥구멍과 ㄱ자로 꺾인 두 개의 긴고래 온돌시설이 중요한 자료이다.
조각:현재까지 전해지는 고구려 조각의 유품은 극히 소수로 불교 조각이 중심이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의 승려 순도順道가 경문(經文)과 불상을 가지고 옴으로써 삼국 중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했다. 불교의 주된 예배 대상인 불상도 이미 4세기말부터 제작되었으리라고 추정되지만 5세기까지 그 제작 연대를 밝힐 수 있는 고구려의 불교 조각은 아직 없다.
현존하는 고구려의 불상 중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예는 〈연가7년기미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己未年銘金銅如來立像〉으로 광배* 뒤의 명문*과 그 양식으로 보아 539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중국 북위北魏나 동위東魏 초의 불상 양식을 보이면서도 고구려 특유의 소박하고 강직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출토의 〈신묘명금동불입상辛卯銘金銅佛立像〉과 평양 평천리平川里 출토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 있는데, 후자는 삼국시대에 유행한 반가사유상 초기의 예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주목된다. 또한 평양 부근의 원오리元五里 출토의 〈니조불보살상군泥造佛菩薩像郡〉은 6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드럽고 풍만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6세기말에서 7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말기의 불상은 초기와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는데, 이런 사실은 그 당시 도교가 국가적으로 유행되면서 불교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석조 조각으로 평양 부근 영명사지永明寺址 계단 석돌에 조각된 돌사자의 예를 볼 수 있다.
회화:고구려의 회화는 현재까지 알려진 통구와 평양을 중심으로 분포된 60여기의 고분벽화로서 알 수 있다. 특히 고분벽화 내용의 주제와 화풍에 따라 시대적으로 변천된 추이를 비교적 잘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4세기 중반에서 5세기에 해당하는 고분벽화는 묘주(墓主)의 초상을 중심으로 한 풍속화적인 요소와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그려졌는데, 신분에 따른 인체 비례와 초보적인 요철법*의 표현은 고졸한 면이 나타나면서 고구려 특유의 동적(動的)인 화풍이 드러나 있다.
황해도 안악3호분安岳3號墳(357)과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409)은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 초기의 귀중한 예이다. 6세기에 해당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중기에는 풍속도가 유행하는데, 통구의 무용총舞踊塚과 각저총角抵塚이 이 시기에 속한다. 특히 무용총의 수렵도에는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는 고구려 회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6세기말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고구려 후기의 고분에는 사신도가 주로 다루어진다. 통구의 사신총四神塚, 강서대묘江西大墓, 중화군 진파리眞坡里 고분군, 오회분사호묘五恢墳四號墓 오회분오호묘五恢墳五號墓에서는 동적이며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를 띤 고구려 특유의 화풍을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고구려 회화가 일본 회화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과 쇼토쿠聖德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수장(繡帳)으로 고구려계의 화가들이 밑그림을 그린 〈천수국만다라수장天繡國曼茶羅繡帳〉, 석가모니불의 전생설화를 다룬 〈옥충주자玉蟲廚子(다마무시즈시)〉등의 작품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공예:고구려는 석실묘의 묘제를 채택한 관계로 도굴이 많이 자행된 탓에 전해지는 부장 유물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고분벽화를 통하여 공예미술의 일면을 추정할 수 있다. 관모는 고깔처럼 생긴 모양에 꼭대기에 새깃을 단 절풍(折風), 절풍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이 쓴 책왕이나 왕족이 쓴 관이 있다. 귀고리는 윗고리가 가는 세환식(細環式)과 태환식(太環式)이 있다. 이들은 모두 중간 장식과 드리개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삼국시대의 형식이다. 또한 허리띠와 띠꾸미개가 전해진다.
고딕 미술 Gothic Art(영)
유럽의 중세미술에 있어서 시대적으로 로마네스크 미술* 다음에 나타난 양식을 말한다. 시기상 대략 12세기 중엽부터 15세기 또는 16세기 초까지에 해당하며 르네상스 미술*이 개화되기 전을 가리킨다.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고딕미술은 12세기말부터 약 1세기동안 지속되었다. 고전적 성격을 띤 전성기 고딕에 반해서, 13세기말 이후에 그 성격이 뚜렷하게 변질되어 바로크적 성격이 강해진 것을 ‘후기 고딕’이라고 부른다. 후기 고딕 중 특히 1400년경을 중심으로 한 약 반세기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사실주의*에 이탈리아 화파의 영향이 섞인 궁정 취미의 우아한 회화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서구 전체로부터 프라하의 신성로마황제의 궁정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유행하였던 이 경향을 특히 ‘국제적 고딕 양식’이라고 한다.
고딕미술은 원래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중세 건축을 야만족인 고트(Goth)인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된 미술사 및 비평 용어이다. ‘고딕’이란 용어는 초기에는 건축, 특히 성당 건축에서 그 평가를 받았으나 점차 장식, 조각*, 회화*, 공예* 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확산, 적용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의 형성과 발전에는 각지의 대수도원의 역할이 컸으며 수도사들이 미술에 종사하는 일이 많았던 것에 비해서, 고딕 미술에서는 파리를 비롯해 도시의 궁전이나 공동체가 발주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미술가도 세속의 전문가가 주를 형성했다. 이 때문에 기술적 발달이 뚜렷하며, 조각이나 회화에서는 시대를 거듭할수록 사실주의 경향으로 변모되었다.
각 분야에서 나타난 고딕 양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축:건축은 고딕 시대를 결정짓는 대표물로서 1140년부터 16세기 중반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고딕건축에 있어서 그 기본 원리는 교차 늑재 궁륭*(rib-vault)의 사용이다. 이것은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이미 나타났던 교차 궁륭*을 대각선을 이루는 늑골*, 측벽 아치* 및 횡단 아치로 보강한 것으로서 이 궁륭을 바깥으로부터 플라잉 버트리스*(flying buttress), 소형의 경우 및 지방에 따라서 본당 측과 직각을 이루는 부벽*에 의해 보강한다. 이 구조는 궁륭의 하중이 측벽 전체에 걸리지 않고, 측벽아치를 버티는 기둥의 정점에 집중되므로 벽이 불필요해져서 창을 크게 만들 수 있으며, 석재가 절약된다는 이점이 있다. 한편 로마네스크 양식에서의 반원 아치가 고딕에서는 첨두아치*로 되었다. 첨두아치는 외부 압력을 경감시켰고, 따라서 여러 곳에 둥근 천장을 만들기가 수월해졌으며, 넓이(직경)와 높이(반경)와의 상호관계가 일정한 반원 아치의 제약에서 벗어나 구조와 공간과의 관계를 자유롭게 다루게 되었다. 또한 첨두아치는 또다른 고딕 건축의 특징인 플라잉 버트리스와 함께 형태상 상승감을 강조하는 미적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최초의 순수한 고딕 건물은 1140년에 세운 생 드니Saint Denis 사원의 예배당과 성가대석으로 추정되며, 그 외에 1163년에 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과 부르주Bourges, 랑Laon 등이 있다. 13세기초의 고딕 양식은 큰 교회당 양식을 중단하고 수도원 건축, 지역 교구 교회, 가정 건축에서 사용되는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해졌다. 후기 고딕 시대에서는 늑골이나 창의 트레이서리* 등이 세분화되고 또 장식적이 되어 플랑보아이양 양식*(프랑스)이나 장식적 양식(영국) 등의 번잡한 양식, 혹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하학적인 수직 양식*(영국) 등을 낳았다. 또 성이나 왕후의 관저나 도시의 공회당 등 세속건물이 성행함에 따라, 실용건축으로서의 고딕 양식을 발달시켰다.
조각:고딕 조각은 특히 성당의 정면 문턱에서 발전하였다. 12세기 중엽의 조각은 건축과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다가(사르트르 대성당, 포르타유 루아이얄) 점차 건축적인 원칙에서 탈피하여 자연주의적 원리에 의해서 스스로를 다루게 되었다(사르트르의 남북 문턱, 아미앵 등). 후기고딕 시대가 되면 조각은 흔들리는 축이나 강조된 볼륨 등에 의해서 건축으로부터의 독립을 보여주며, 그것은 또한 단독 조각의 발달과도 병행되었다. 작품의 소재는 성전의 세계에서 취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기증자의 조각상도 만들었다. 또 대중의 계몽을 위한 인간상이나 종교적 정신과는 관계가 없는 괴기한 모습의 조각도 장식용으로 이따금 쓰여졌다. 전형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랭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초에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 시기의 작품의 본질은 이상주의 및 자연주의의 특징을 띠고 있다. 고딕 조각은 아름다운 고전적인 균형을 지향하였으며, 로마네스크 조각의 상징주의적인 표현에 비해 자연에 가까워지려고 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회화:고딕 회화의 발전은 양식상 조각의 그것과 일치한다. 13세기에 있어서 회화가 지니고 있는 의의는 조각의 그것에 비해 적으나, 고딕 성당 건축의 특수한 조건에 조응하여 스테인드 글라스*가 발달하였다. 또한 미니어처* 회화도 13세기 후반에 특히 프랑스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 도시와 성곽에서 증가하고 있었던 예술과 문학의 새로운 유행은 로맨틱한 삽화의 산출을 자극하였다. 한편 패널*화는 제단 뒤의 칸막이로 제공되기 이전에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였다. 로마네스크 시기에 시작되었던 패널화가 실제로 일반화된 것은 14세기 두치오Duccio di Buoninsegna(1255~1319)의 <시에나 성당 마에스타>에서였다. 마르티니Simone Martini(c.1284~1344)의 <수태고지*> 역시 고딕 패널화의 특징을 지닌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타피스트리*가 14세기부터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성당 내부에서도 제실, 애프스* 주변이나 기둥 사이에 이용되었다. 특히 성당 건축의 벽면 장식으로 이용된 타피스트리는 걸었다가 바꿀 수 있는 벽화로서 후기 고딕의 왕후 귀족이 애호하였다.
한편 13세기경부터 타블로* 화(畵)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프랑스, 플랑드르, 독일 등의 제도시를 중심으로 저명한 작가가 배출되었다. 특히 15세기에 들어와 플랑드르에서 반 데르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1399~1460) 등을 위시한 화가들이 ‘중세의 가을’이 한창일 때 사실주의 회화를 극점까지 밀고 나갔다. 14세기초 지오토Giotto(1266~1337)에서 시작하여 15세기말 반 데르 바이덴이나 보티첼리Botticelli(1445~1510)로 집약되는 고딕 회화상의 발전을 정리해보면, 양식화, 선적인 특질, 고딕식 흔들림(Gothic sway) 등을 이 시기의 주된 특징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고딕의 부흥 Gothic Revival(영)
건축에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내내 행하여진 고딕 양식의 부활. 영국에서 1755년경 스트로베리 힐Strawberry Hill의 월폴Horace Walpole(1717~1797)의 별저가 로코코화된 고딕 양식으로 세워진 이래로, 낭만주의*적 취미로서 유행하였다. 특히 정원건축으로서 고딕 수도원들의 페허나 키오스크(kiosk, 정자)가 애호되었다.
19세기 초기부터 고고학적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영국에서는 1830년경부터 성당 건축이 통상 고딕식으로 세워지게 되었고, 점차 다른 유럽 국가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시청사, 병원, 철도역 같은 공공건축에도 적용되기 시작한 고딕 양식은 고전 양식의 부흥과 더불어 19세기 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건축가로서는 배리 경Sir Charles Barry(1795~1860)과 퓨긴Augustus Welby Pugin(1812~1852)이 있고, 그들이 제작한 런던의 국회의사당(1840~1850)에서 전형적인 고딕 부흥의 예를 볼 수 있다. 이스트레이크Charles Locke Eastlake는 1871년 《고딕 부흥의 역사A History of Gothic Revival》라는 책에서 고딕 양식을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운동”이라고 언급하면서 이것이 “조형예술에서 순수하게 영국적인 운동일 것”이라고 기술한 바 있다.
고려나전칠기 高麗螺鈿漆器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칠공예가 발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자개를 붙인 정교하고 화려한 나전칠기*의 제작이 성행했다. 나전기법을 보여주는 최고의 유물은 통일신라시대의 〈나전단화금수문동경螺鈿團花禽獸文銅鏡〉이고 고려시대 이전에는 나전칠기의 유물이나 기록이 없다. 나전칠기가 고려시대에 이미 발달한 것으로 보아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였고 그것이 점차 숙련되어 고려시대에 독자적인 양식을 이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나전에 관한 문헌상의 첫 기록은 11세기에 문종이 요遼나라 왕실에 나전칠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서 볼 수 있다. 또 1123년에 고려에 왔던 송宋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그릇에 옻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였지만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고 언급하였다.
고려시대의 나전칠기의 특징은 흑칠 위에 나전(螺鈿), 대모(玳瑁), 은사(銀絲), 동사(銅絲)를 감입(嵌入)하여 무늬를 만드는 데 있다. 전복껍질을 종잇장같이 얇게 갈아서 사용한 박패법(薄貝法)은 중국의 당나라에는 없던 것이다. 또한 대모(玳瑁, 鼈甲)를 얇게 갈아 그 뒷면에 붉은 채색을 칠하여 표면에 비쳐 보이도록 하는 복채법(伏彩法)은 고려 나전칠기의 중요한 기법이며 당唐나라의 나전에서도 적지않게 발견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금속선의 사용으로, 중국의 유물이 희소한 반면 고려나전칠기에서는 당초문*의 덩굴줄기나 무늬와 무늬 사이의 경계선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되었으며 주로 은선, 동선, 주석선이 쓰였다. 문양은 대개 국화문과 당초문*을 전면에 가득 밀집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며 귀족적 취향에 영합하여 정교하고 우아하다. 고려의 나전칠기 기법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금속선이 자개로 대치되고 문양의 구도와 대칭이 흐트러지고 여백도 많이 남기며 점차 대범하고 거친 표현의 회화적 의장(意匠)으로 정착된다.
고려미술원 高麗美術院
1923년 9월 서울에서 창립되어 1925년까지 지속된 전통화가와 양화가들의 단체. 처음엔 신미술, 양화운동을 목표로 박영래朴榮萊, 정규익丁奎益, 강진구姜振九, 김석영金奭永, 나혜석羅蕙錫(1899~1740), 백남순白南舜(1904~1994), 김명화金明華 등 신진 남녀 양화가와 미술학도 10여명이 주동이 되어 고려미술회를 조직했다가 김은호金殷鎬(1892~1979), 변관식卞寬植(1899~1976) 등 전통화가가 가담한 이후 고려미술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후 고려미술원 운영의 미술연구소를 개설하고 중학생급 남녀 연구생을 모집하여 지도했다. 김은호가 전통회화를, 강진구, 정규익, 이종우李種禹(1899~1981)가 양화 지도를 맡았다. 1924년 10월에 종로 YMCA회관에서 두번째 미술원 전람회를 개최하고 윤덕영尹德榮 등이 후원을 약속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이듬해에 중단되었다.
고려시대 미술 高麗時代美術
918년에서 1392년 사이에 한반도에서 나타난 미술. 고려는 문화적으로는 송宋을 가까이 하였고, 송이 몽골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송문화를 문화 발전의 토대로 삼아 12세기 중엽에 문화적 전성기를 누렸다. 10~11세기 초기의 미술에는 새로운 왕조의 북방적 생기가 있지만, 12세기 중반 무렵부터 13세기에 걸친 평화와 안정은 상층계급의 세련된 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하여 가장 고려적인 미술양식이 발달하였다. 고려양식의 특색은 직선의 기피와 구성 요소의 조화이지만, 이 고려양식의 성립에는 백제적 전통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고려 전성기 미술도 13세기 중반부터 비롯되는 몽골의 침입과 국력의 피폐가 작용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건축: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에는 건국 초부터 왕궁과 대규모의 불교 사찰의 건립이 왕성하였음을 만월대萬月臺 등의 궁터와 개성 교외의 흥왕사興王寺, 불일사佛日寺의 유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고려의 건축은 시대의 추이에 따라서 초기에는 신라의 건축을 기초로 하면서 중국 요遼의 영향을 받았고, 후기에는 원元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측된다. 또 몽골과의 항쟁기에는 남송南宋의 건축양식도 받아들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목조 건물로서 현존하는 것은 모두 13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그 형식상 공포*(栱包)가 기둥 위 즉 주심에 있는 주심포 양식*과 공포가 기둥 사이에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구분된다. 주심포 양식은 삼국시대 이래의 ‘아마조亞麻組 양식’에 13세기 무렵부터 남송의 ‘천축天竺 양식’이 수용되어 새로운 변화를 이룬 것으로, 외관상 간결하고 명쾌한 효과를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의 예로는 안동의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1366 重修), 예산의 <수덕사修德寺 대웅전大雄殿>,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1376) 등이 있다. 한편 다포 양식은 주심포 양식보다 뒤늦은 고려 말기에 들어와 조선시대에 성행한 건축 양식으로서 장식성이 강하다. 현존하는 예로는 <심원사心源寺 보광전普光殿>, 안변의 <석왕사釋王寺 응진전應眞殿>(1368)이 있다.
석조 건축은 석탑*과 부도*로 대표되는데, 석탑은 초기에는 신라의 양식을 이어 받았으나 부분적으로 차츰 변화하여 새로운 고려탑의 형식을 성립시키고 있다. 즉 탑신부의 비례가 좁고 높아져 전체적으로 높고 웅대해지고, 옥개석 받침의 층수가 적어져 안정감이 줄어들고, 옥개석의 네귀가 위로 더욱 들리는 등의 특색이 나타난다. 경상북도 예천군 보천사지寶泉寺址 오층석탑이나 의령 보천사지寶泉寺址 삼층석탑, 현화사玄化寺 칠층석탑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육각이나 팔각 등의 다각탑이 출현하는데, 금산사金山寺 육각 다층석탑, 영명사永明寺 팔각 오층석탑, 보현사普賢寺 팔각십삼층석탑 등이 있다. 후기의 것으로는 원의 라마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경천사 십층석탑(1348)이 주목된다.
부도는 전대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계승하면서도 사각당형, 석종형(石鐘形), 석등형(石燈形), 불탑형(佛塔形) 등이 새로운 형식으로 나타났다. 또한 표면 장식의 표현도 전대에 비해 더욱 정교하고 화려한 면을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그 밖의 형식은 대부분 신라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지만, 고려 말기에 해당하는 공민왕의 능은 왕과 왕비의 봉분 두 개가 합쳐진 합장 형식을 취하고 있다.
조각:국초 이래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려시대의 조각은 전대에 이어 불교 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건국에서부터 12세기까지의 전기에는 고려의 새로운 기상이 표현된 거대한 석상과 신라 말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독특한 철불의 조성이 성행한다. 그러나 전대의 불상에서 나타난 이상주의적인 표현에 견주어 볼 때, 감동적인 면에서나 조형기술상에서나 퇴화된 면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거대한 석불조각으로는 <괴산 미륵리의 석불> <북한산 구기리의 마애불> <대흥사 북미륵암의 마애불>이 유명하다. 철불로는 <광주 춘궁리의 여래좌상>을 비롯해 개성 적조사지, 충남 보원사지 등의 여래좌상이 대표적이다.
한편 충남지방에는 지역적 특성이 강한 불상 양식이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강원도 일대의 강릉 한송사寒松寺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座像〉, 강릉 신복사지神福師址 〈석조보살〉,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 〈석조보살좌상〉, 또는 충청도 일대의 충주 대원사와 단호사丹湖寺의 〈철조여래좌상〉 등은 지역적 특성이 뚜렷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전자의 석조보살좌상들은 육체의 풍부함과 살찌고 생기 넘치는 얼굴 표정이 독특하며, 후자인 충주 지방의 철불들은 12세기 중반의 제작으로 전해지는데 생경한 얼굴 모습과 도식화된 옷주름 등의 양식이 일치하고 있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특히 원의 지배하에 있었던 14세기 이후 고려 불상은 더욱 경직된 사각형의 얼굴, 두꺼운 옷주름, 형식적으로 번잡해진 세부 표현에서 그 퇴조가 여실히 나타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협시* 보살좌상과 동조불(銅造佛),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금동보살좌상〉 등에서 볼 수 있다. 이 밖에 원에서 유행한 라마교 불상의 영향을 받은 이국적인 보살상 등과 가내(家內)에 봉안되었을 금동불감과 소형 호지불(護持佛) 등이 오늘날까지 다수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불교 조각 이외에 안동 하회동에 전래되는 목제 가면(假面)과 인물과 동물을 주제로 한 상형청자, 그리고 능묘(陵墓) 조각 등을 통해서도 고려시대의 조각성을 살펴볼 수 있다.
회화:고려시대는 도화원圖畵院이 설치되고 상당수의 화가와 작품이 문집(文集)과 사서(史書)에서 확인되는 등 회화가 전대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화원들 이외에도 왕실과 귀족, 승려들이 폭넓게 회화 활동에 참여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회화는 왕의 진영(眞影), 공신의 초상을 그린 인물화*와 탱화*, 변상도* 등의 불교 회화 및 산수, 영모, 궁정누각도, 계회도* 등의 일반 회화에까지 매우 다양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작품이 희귀하고 그나마 불교 회화들이 대부분이어서 일반회화에 의한 고려시대 회화의 특색 및 변천 연구는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그러나 고려의 회화가 전대의 회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송, 원을 비롯한 중국회화와의 교섭과 영향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을 것임은 중국 회화와의 교섭과 몇몇 화적을 통해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 다수 남아 있는 13세기를 전후로 제작된 고려불화의 우아하고 정교한 양식을 통해 고려 회화의 위치를 살필 수 있다. 현존하는 고려의 화적은 안동 소수서원에 있는 안향安珦의 영정과 해애海崖라는 관지가 있는 <세한삼우도細寒三友圖>(日本 妙滿寺), 전(傳) 고연휘高然暉의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공민왕恭愍王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수렵도狩獵圖>, <흑칠금니소병黑漆金泥小屛>에 그린 노영魯英의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등이 있다. 한편 대부분 일본에 건너가 있는 고려불화는 〈관경변도觀經變圖〉 〈나한상羅漢像〉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아미타여래상阿彌陀如來像〉 등을 포함하여 거의 70여 점에 달하는데, 정성을 들인 정밀한 표현 속에 깊은 종교적 분위기와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밖에 고분벽화로는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수락암동水落岩洞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경남 거창군居昌郡 둔마리屯馬里 고분의 <주악천녀상奏樂天女像> 등이 있어 당시의 풍습과 의식 등을 짐작할 수 있다.
공예:고려시대의 불구*(佛具), 칠기*, 도자기 등은 관념적이고 표현 위주의 조선 것과는 다른 기교를 위주로 한 섬세하고 정치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대형의 동탑(銅塔)이나 동향로(銅香爐)에 있어서도 형태의 완벽과 문양의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신라 이래 전통공예품이 된 나전칠기*螺鈿漆器는 당唐의 평탈기법에서 유래했지만, 고려시대에 이르면 문양 면에서도 독특한 발전을 이룩하여 원으로부터 대장경함大藏經函의 주문을 받을 정도였다. 청자*는 송의 월주요*기법을 받아들이는 등 중국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되는데, 고려인의 감각과 취향에 의한 본격적인 고려청자*가 완성된 것은 11세기 중반쯤이다. 한편 12세기부터는 고려인의 독창성에 의한 상감청자*가 활발하게 제작되어 고려미술이 절정을 맞게 되었지만, 13세기 중엽 이후에는 바탕색도 거칠게 되고 상감이나 철회(鐵繪)의 전면에 크게 부각되면서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출현을 예고한다.
고려청자 高麗靑磁
한국의 청자*는 중국 고월자*의 영향과 지배층의 수요로 인해 9세기 후반~10세기 때부터 전남 강진의 요*(窯)에서 제작되었다. 초기 청자인 햇무리굽(日暈文) 청자요지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와 계을리 등 중국과 가까운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이는 신라말 지방호족의 세력이 확장되고 장보고張保皐의 해상무역이 성행하면서 중국도자문화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햇무리굽 청자는 양질의 청자로 갑발*을 사용하는 등 생산비가 높아서 상류층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질청자(粗質靑磁)도 생산되지만 11세기 말까지 기형(器形), 문양(文樣), 번조수법(燔造手法) 등이 세련되어진 청자가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관요*(官窯)를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12세기 전반에는 순청자가 세련되어져 유명한 비색(翡色)청자가 제작되는데 인종仁宗 장릉長陵 출토 청자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 유약을 완성하여 송대(宋代)의 《고려도경高麗圖經》과 《수중금袖中錦》에 기록된 바처럼 중국에서도 절찬을 받았다. 또한 청자에 문양을 상감*하는 독창적인 상감청자*(象嵌靑磁)가 고안되어 12세기 중반에는 문공유묘文公裕墓(1159년) 출토 〈청자상감보상당초문대접〉과 같은 발달된 상감청자가 제작되었다. 이 대접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구성 등이 뛰어나고 기형의 선이 더욱 유려하다. 상감기법이 초기에는 부분적으로 시문되다가 12세기경 음양각된 문양으로 대체되며 한 단계 발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철화청자*(鐵畵靑磁), 철채청자*(鐵彩靑磁), 진사채청자*(辰砂彩靑磁), 화금(畵金靑磁)청자*, 연리문청자*(練理文靑磁) 등이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철화청자는 유약을 입히기 전에 철분 안료를 써서 붓으로 그림을 그린 후 산화염으로 구워내어 문양을 검은색으로 발색시킨 청자이다. 11세기 말~12세기 전반에 성행하였고 고려 말까지 계속 제작되었으며, 회화적인 필치가 소박하고 구도가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철채청자는 청자태토 위에 철사 안료로 그릇 전체를 칠하고 청자유약을 시유하여 마치 흑유를 씌운 것처럼 검게 발색된 그릇이다. 진사채청자는 청자를 초벌구이한 후 진사*(辰砂)로 그리거나 문양의 특정 부분에 악센트로 찍은 후 청자투명유를 시유하여 환원번조시켜 선홍색으로 발색된 청자를 말한다. 산화동 안료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기법은 중국보다도 2세기 가량 앞서 사용되었다. 고려청자에서는 이를 절제하여 조화있게 사용하였다. 화금청자는 순청자에 금채한 것과 상감청자에 금채를 한 것인데 부분적으로 사용되었다. 연리문청자는 백토(白土), 자토(赭土), 회색토(灰色土)를 함께 반죽하여 성형하고 그 위에 청자유를 발라 나뭇결 무늬를 나타낸 그릇이다.
12세기 후반~13세기에는 무신 집권과 몽골 침입 등의 혼란으로 고려청자의 기형이 둔해지고 굽이 커지며 유약의 색깔이 어두워지고 문양도 느슨해진다. 이 때에 간기(干記)가 써있는 청자 상감 그릇이 만들어지는데 암녹색의 흐린 유약과 둔해진 곡선의 그릇으로 모래 받침 자국이 남아 있다. 충렬왕대에 일시적으로 비색이 좋아지고 편호(扁壺)같은 새로운 기형과 문양도 등장하는데 이는 원元나라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이후 환원번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황갈색을 띠며 과장된 기형의 청자가 생산되었고, 14세기에는 쇠퇴하여 조선시대 분청사기*로 이행된다. 중국청자의 색은 진하고 불투명하며 예리하면서 장중한 데 비하여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은 비색을 지니고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등의 특색이 있으며 중국보다 앞선 진사기법과 상감기법의 창안에 독특한 품격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령토 高嶺土 kaolin(영)
자기*(磁器)의 원료가 되는 태토(胎土)로서 중국 강소성 부량현 고령촌에서 대량으로 산출되어 그 근처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령토’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령토는 대략 규석 50%, 알루미늄 30%, 포타시움 2.5% 등이 주성분이며, 이 다량의 규석질이 태토를 단단하게 해준다. 이 고령토에 물을 가해 형태를 만들고 이를 말려서 1,3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면 반투명체로 유리질화된다. 점토 속의 불순물은 체로 쳐서 거르거나 물에 넣어 앙금을 가라앉힌다. 양질의 고령토는 철분이 거의 들어있지 않아, 연한 회색이나 백색을 띠며 내화도(耐火度)가 높아 그릇을 얇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서양에는 이러한 고령토가 없어서 규석 대신 석고(石膏), 골회(骨灰) 등을 써서 17세기경부터 자기를 만들었으나 중국자기만큼 단단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