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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배 光背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것으로, 부처님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장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원광(圓光), 후광(後光), 광(光), 염광(焰光) 등으로 불린다. 원래 불타(佛陀)상에 한하여 조성되었지만, 점차 보살과 여러 신들에게도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광배의 종류에는 크게 머리에서 발산하는 빛을 형상화한 두광(頭光, siras-cakra)과 전신에서 발산하는 신광(身光, vali-cakra), 거신광(擧身光)이 있다.
인도의 초기 불상 즉 간다라불상에서는 두광만 형상화하였는데, 머리 윗부분의 백호(白毫)를 중심으로 한 원륜(圓輪)이 그것이다. 초기 두광에는 무늬가 없었으나 연화문*, 화염문, 당초문* 등 여러 문양이 점차 첨가되었고 중국에 들어와서는 형태도 끝이 뾰족한 보주형이나 연판형뿐 아니라 빛의 발산을 표시하는 채색문과 선광(線光)을 형상화하는 등 다양해진다. 신광은 두광과 함께 표현되며 신광만 나타내는 경우는 없다. 거신광은 입상이나 좌상에 관계없이 몸전체를 감싸는 형태로 전신광(全身光)이라고도 한다. 형식에는 두광과 신광을 겹쳐서 표현한 이중원광(二重圓光)과 전체의 모양이 배와 같은 주형(舟形) 광배가 있다.
광선주의 光線主義 Rayonnisme(프)
1912~1914년 곤차로바Natalya Goncharova(1881~1962)와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1881~1964) 부부를 중심으로 러시아에서 전개된 추상 또는 반(半)추상운동. 광선주의는 1913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타깃 전(展)Target Exhibition>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해 라리오노프는 “광선주의는 입체주의*, 미래주의*, 오르피슴*의 종합”이라는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14년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가 파리에 이주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광선주의 양식은 인상주의*의 빛과 색채의 관계를 발전시켜 방사되는 광선 가운데서의 사물의 형태와 색채의 리듬을 파악하는 방법과 미래주의에서 강조하였던 일종의 사차원적인 시간을 회화 속에 도입하였다. 순수하게 색과 형태만의 세계, 즉 추상회화의 영역으로 몰입하였던 광선주의는 무대 미술에 특히 강한 영향을 미쳤으나, 하나의 미술운동으로서는 오래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광주요 廣州窯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요*(官窯). 조선시대 초기에는 전국의 도자소(陶磁所)에서 제작된 상품의 도자기를 공물(貢物)로 수납하여 왕실용으로 사용하였다. 1468년(세조13년)에 사옹방(司饔房)이 사옹원(司饔院)으로 개칭되던 무렵에 관영백자제조장(官營白磁製造場)으로서 사옹원의 분원(分院)이 경기도 광주 한강지류의 경안천慶安川에 설치되었다. 즉, 1470년대를 전후한 조선 세조 연간에 왕실 및 관청용의 백자*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관요로서 380명의 사기장(沙器匠)이 소속된 광주요가 성립된 것이다. 이렇게 체제가 변하면서 백자가 매우 발달하였다. 또한 분청사기*粉靑沙器는 백자화되었으며 관에서 쓰던 그릇에서 일반민간용으로도 쓰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1481)과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해마다 사옹원 관리가 화원(畵員)과 서리(書吏)를 거느리고 어용의 그릇을 제작, 감독했다는 기록을 살필 수 있어, 광주요 백자에 그림을 그린 것은 화원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광주 분원은 서울에서 가깝고 땔감인 나무가 풍부하며, 양질의 백토(白土)가 인근에서 산출되고 수운(水運)이 편리한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분원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는데, 그것은 땔감조달을 위해 수목이 울창한 곳을 택하여 10년에 한번씩 광주 내에서 번소(燔所)를 이동하여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요에서는 주로 양질의 백자와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제작되었는데, 시기별 주된 요지로는 초기 1480~1490년대에는 도마리道馬里, 무갑리武甲里 요지 등이 있으며, 이후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이란 명문*(銘文)의 백자가 출토되는 우산리牛山里, 번천리樊川里 등이 있고, 임진왜란 이후 정지리亭支里, 탄벌리炭筏里, 학동리鶴東里 등에서 담청회백색의 백자가 생산되었다.
이후 18세기 전반 유백색 바탕에 간결한 추초문(秋草文)이 있는 청화백자로 유명한 금사리요(金沙里窯), 1752년부터는 금사리요의 백자와 유사하면서 청백색이 특징적인 분원리요(分院里窯)로 옮겨져 왔다. 이윽고 1883년에 광주분원은 도서원(都署員)이 운영하고 경시인(京市人)이 판매하는 민간경영체제로 바뀌었다가 1900년대에 문을 닫게 되어 사기장(沙器匠)들은 전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광태사학 狂態邪學
중국 명대(明代) 회화양식인 절파*浙派의 후기 화풍을 비판하는 용어. 절파는 명대 초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회화양식으로, 이당李唐(리 탕),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 등의 회화풍격을 계승한 것이다. 절파 화풍은 일종의 원체화*(院體畵)풍이어서 문인화가들로부터 비하되었다. 명말(明末)에 이르러서는 절파 후기양식을 광태사학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절파 화가들 중 주로 홍치 연간(洪治, 1488~1505) 이후의 몇 명을 가리켜 ‘미친 행동을 멋대로 하는 자’, 그림에 있어서의 ‘사학의 무리’라고 혹평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 논평은 고렴高濂(까오 리엔)의 《연간청상전燕間淸賞箋》 《준생팔전遵生八霜》, 도륭屠隆(투 롱)의 《화전畵箋》, 서심徐沁(쉬 신)의 《명화록明畵錄》, 당지계唐志契(탕 츠지)의 《회사미언繪事微言》 등에 보인다.
여러 문헌에 나오는 절파 화가의 이름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절파 화가의 극단적인 필묵의 조방함에 대한 비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절파에 대한 비판, 특히 절파 후기 양식에 대한 공격은 다소 편벽스럽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송대(宋代) 이후 전개되어 온 문인화론(文人畵論)이나 명말 이후 성립된 남북종론(南北宗論)의 영향이 깊다. 문인화가들의 편벽스러운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명대 중기 감상가인 이개선李開先(리 까이시앤)의 주장이 있다. 이개선은 그의 저서 《중록화품中麓畵品》에서 유일하게 절파 화가를 변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