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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바우하우스 New Bauhaus(영)
1937년 10월 시카고 미술공예협회의 후원으로 모홀리 나기László Moholy-Nagy(1895~1946)가 시카고에 설립한 미술 교육 기관. 당시 하버드 대학 건축과 교수였던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1883~1969)를 고문으로 하여 처음에는 ‘뉴 바우하우스, 미국 디자인 학교The New Bauhaus, American School of Design’라는 명칭으로 36명의 학생들을 입학시켜 발족하였다. 그러나 관리 운영상의 실패로 이듬해인 1938년 폐쇄되고 말았다. 이어서 1939년에 재차 뉴 바우하우스 시대에 협력했던 사람들과 함께 디자인 학교를 재설립하고 주간과 야간과를 병설하여 운영하였다.
1944년에는 ‘디자인 연구소The Institute of Design’라 개칭하고 대학으로 승격시켰다. 1946년 모흘리 나기가 사망한 후, 1948년 후계자인 체르마이에프Serge Chermayeff가 뒤를 이었다. 1952년에는 ‘일리노이 공과 대학Illinois Institute of Technology’에 합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이념은 근본적으로 독일의 바우하우스*와 별 차이가 없지만 새로운 시대에 발맞춘 미국의 실정에 맞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초 과정 18개월 후 전공 과정으로서 제품 디자인(product design) 부문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communication design)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4년제이다.
뉴 이미지 페인팅 New Image Painting(영)
‘뉴 이미지’란 마샬Henry Richard Marshall이 기획하여 1978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 <뉴 이미지 페인팅>에서 파생된 명칭이다. 이 전시회는 본질적으로 다른, 여러 양식의 미술을 아무렇게나 모아놓았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매우 중요한 현상 두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1960년대의 미니멀 아트*가 10여년간 지속된 후 주제를 알아볼 수 있는 구상 이미지의 재등장, 그리고 둘째는 10여년간 지속되어 온 대상이 없는(non-objects) 개념미술* 이후 전통적인 캔버스* 회화형식으로의 복귀이다. 뉴이미지 회화의 선구자는 과거에 추상표현주의* 계열의 작품활동을 한 거스통Philip Guston(1913~1980)이다. 1970년에 이르러서 거스통은 색채가 어른거리는 듯한 추상을 버리고 비극에 직면한 인간 희극을 만화* 같이 묘사하는 독특한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 어떤 뉴 이미지 화가도 거스통의 개성적인 양식을 모방하지 않았지만 그의 대담한 기발함은 촉매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뉴 이미지 화가 개개인은 각기 독자적인 작품 방향을 설정했으나, 그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추상적인 배경 속에서 대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효과를 창조했다. 예를 들면 로덴버그Susan Rothenberg(1945~ )가 스케치풍으로 그린 말, 아프리카노Nicholas Africano의 아주 작은 인물들, 모스코비츠Robert Moskowitz(1935~ )가 실루엣*으로 처리한 대상 등은 본질적으로 추상적이며 회화적인 배경 안에 들어 있다. 뉴 이미지 화가로 분류되는 다른 미술가들은 보다 개념주의적인 접근방법을 적용시켰다. 제니Neil Jenney(1945~ )는 이미지를 화면 위에 그린 것은 물론 익살스럽고 설명적인 제목을 그림틀 위에 적어 넣었다. 바틀릿Jennifer Bartlett(1941~ )은 강철판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같은 주제를 각기 다른 양식으로 여러 번 시도하여 추상과 재현*의 회화적 언어를 체계적으로 탐구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미술가들을 한 데 묶어 그 성격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이들의 화풍은 추상표현주의와 그 이후의 혼란스러운 작용과 반작용의 다양한 결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이들은 선별, 고립, 단순화, 결합 혹은 제시 따위의 매우 개별화된 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활기를 부여한 형상을 선택함으로써 자신들을 구별시키고 있다.
따라서 뉴 이미지 페인팅의 독창성은 양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과거로부터 차용한 것을 결합하고 혼합하는 특이한 기법과 이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뉴 이미지 회화는 구상 이미지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점에서, 그리고 스티어Pat Steir의 경우처럼 역사를 주제의 원천으로 차용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뉴 일루저니즘 New Illusionism(영)
눈속임 기법* 그림이나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회화 및 조각류를 다시 채택한 주의. 모더니즘*이 현실세계를 이지적 성실성과 단순함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비해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사실주의*는 실제와 같은 회화와 조각을 통해 현실 세계를 반영함으로써 관객을 기만하고 있으므로, 순수한 의미에서 위조 혹은 순수라고 할 수 있다. 개념주의자들이 퍼포먼스*, 과정 미술*, 대지 미술*, 혹은 뒤샹적인 낱말 유희를 위해 화실에서의 제작과 오브제* 제작을 포기하고 있을 즈음, 뉴 일루저니즘 작가들은 미니멀 아트*의 주도권에 반발하였다. 새로운 극사실주의* 미술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니면서 화상과 소장가들을 매료시켰다.
뉴 페인팅 New Painting(영)
1980년대에 들어와서 대두되기 시작한 새로운 조류의 회화의 총칭. 1980년대 후반부터는 신표현주의*, 트랜스 아방가르드* 등의 이름으로 보다 구체화되고 분화되어 불리고 있는 까닭에 자주 사용되지는 않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캔버스에 거친 필치, 원색의 격렬한 색채 대비에 의해 그려지는 폭력, 죽음, 성(性), 꿈, 신화 등의 도상*을 갖는 이미지들을 그 특징으로 가진다. 모더니즘* 회화는 구상으로부터 추상 회화로, 그리고 다시금 회화 자체의 부정에로 그 가치관을 교체시켜 왔다. 그런데 1980년대의 새로운 움직임은 특히 바로 직전의 관념적이고 금욕적인 1970년대 모더니즘 회화의 가치관과는 지극히 대조적인 성격의 것으로서 대비된 까닭에 새 시대의 도래라고 흥분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회화 발전의 역사로부터 이탈한 일시적인 현상이라 보는 측면도 있었다.
최근 들어 신표현주의라는 명칭이 점차 정착되고 있는 이 새로운 회화의 물결은 <뉴 스피리트 인 페인팅>(1981, 런던), <바로크 81>(1981, 파리), <슈나벨전>(1981, 뉴욕), <아방가르디아, 트랜스 아방가르디아 68~77>(1982, 로마), <자이트가이스트*>(1982, 베를린), <미니멀 아트에서 표현주의에로>(1983, 뉴욕) 등의 전람회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 관련했던 작가들은 미국의 슈나벨Julian Schnabel(1951~ ), 살르David Salle(1952~ ),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1942~ ), 독일의 키퍼Anselm Kiefer(1945~ ), 펭크A.R.Penck(1939~ ), 바젤리츠Georg Baselitz(1938~ ), 폴케Sigmar Polke(1941~ ), 이탈리아의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1952~ ), 팔라디노Mimmo Paladino 등을 들 수 있다.
뉴욕화파 New York School(영)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뉴욕에서 작업을 하고 대개 1947~1948년 사이에 개인적 양식을 확립했던, 주로 추상이나 표현주의*적인 혁신적 화가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그룹이라기보다는 독자적인 스타일에서 유래하는 강력하고 개혁적인 개성적 표현이 그 특징이다. 뉴욕화파의 미술가들은 뉴욕이라는 도시 환경을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과거의 전통을 거부하면서 결국 광범위한 국제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고, 나아가 강렬하고 본원적인 미국 전위 회화를 창조함으로써 결합되었을 뿐이었다.
1940년대 초에 시작된 뉴욕화파 운동은 호프만Hans Hofmann(1880~1966)의 미술학교 설립,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이 조직한 전위 유럽미술 전람회, 그리고 특히 미국에 초현실주의*의 도입 등을 포함하는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고무되었다. 초현실주의의 도입은 전람회를 통해서 또는 제2차세계대전 중 많은 유럽 화가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미로Joan Miró(1893~1983), 마송André Masson(1896~1987), 마타Roberto Matta(1911~ ) 등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뉴욕의 화가들에게 오토마티슴*의 이른바 무의식적인 자발성과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불어넣어 주었다. 동시에 입체주의* 화가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 등의 역할 및 활동도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뉴욕 화가들은 이 모든 화풍을 소화하여 강력하고도 개성적인 표현으로 변형시켰다. 1940년대 초기에 주요 작업을 벌이기 시작한 화가는 호프만, 고르키Arshile Gorky(1904~1948), 마더웰Robert Matherwell(1915~1991),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로스코Mark Rothko(1903~1970), 스틸Clyfford Still(1904~1980),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 등이며 이들은 뉴욕의 전위미술가들에게 가장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1947년을 전후해서 이 뉴욕파에 거스통Philip Guston(1913~1980), 톰린Bradley Walker Tomlin(1899~1953), 클라인Franz Kline(1910~1962) 등의 화가들이 가담하게 되어 방향의 전환을 이루었다. 이들은 큰 캔버스와 흑백 화면을 지향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외에도 뉴욕화파에 포함되는 미술가로는 바지오츠William Baziotes(1912~1963), 고틀리프Adolf Gottlieb(1903~1974), 뉴만Barnet Newman(1905~1970), 트워코Jack Tworkow 및 라인하트Ad Reinhardt(1913~1967) 등이다.
이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폴록, 드 쿠닝, 클라인과 같은 소위 액션 페인팅* 작가들은 주로 몸짓의 효과와 붓 또는 페인트의 질에 관심을 기울였고, 로스코를 비롯한 마더웰, 라인하트, 스틸 등은 색면과 소리 없는 암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가들은 대체로 구상적인 이미지를 거부하고 커다란 캔버스를 가지고 작업하였으며 작품의 본질적인 국면으로서 그림 자체에 행동을 표현하는 것을 공통점으로 한다.
1950년대에는 뉴욕화파의 다음 세대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새로운 작품 대부분은 앞 세대들로부터의 파생적인 것에 불과했고 1950년대 말부터는 이 운동도 약화되어갔다. 뉴욕화파의 형성으로 종래 유럽 근대 미술*의 지방적인 아류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의 미술은 폴록의 액션 페인팅 이래 세계의 주목을 끌었고, 전후 미술의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함과 동시에 뉴욕의 존재가 파리와 함께 혹은 파리를 대신해서 강화되기 시작했다.
뉴웨이브 New Wave(영)
원래 트뤼포François Truffaut, 고다르Jean-Luc Godard 등 1950년대 후반에 등장한 프랑스의 신인 영화 감독들을 경멸적인 의미로 칭하기 위해 저널리즘이 붙인 명칭. 1970년대 중반에 뉴웨이브란 명칭은 미국 음악계에 등장한 팝 뮤직의 신세대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매우 극적이며 절충적인 성격을 띤 퍼포먼스*의 영향을 받은 많은 미술학도들은 ‘로미오 보이드Romeo Void’와 대성공을 거둔 ‘토킹 헤즈Talking Heads’같은 팝 음악밴드를 결성했다.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 등 캘리포니아 지방의 미술학교 졸업생들은 전시회는 물론 음악공연과 퍼포먼스도 보여주는 건물 정면에 위치한 대안공간*을 열었다. 표현주의*적인 유형의 광고 포스터도 뉴웨이브에서 발달하여 후에 등장한 신표현주의* 회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뉴웨이브는 부정확하게나마 시각예술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열린 두 건의 대규모 전시회는 뉴웨이브 미학이 미술에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번째 전시회는 ‘콜래보러티브 프로젝트Collaborative Project’와 대안공간인 ‘패션 모다Fashion Moda’에서 주최하여 1980년에 열린 <타임스 스퀘어 쇼>이다. 여기에서 사상 최초로 낙서미술*가들이 개념미술*의 반 대상적(anti-object) 경향에 반대하는 에이언John Ahearn과 오터니스Tom Otterness를 포함한 새로운 세대의 화가와 조각가들과 함께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모든 벽면이 하얗게 칠해져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랑에 대한 대안(代案)을 제공하는 의미에서 이 서커스 같은 전시회는 화랑, 클럽, 길거리를 합쳐놓은 듯한 매력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1981년 9월에 두번째 전시회인 <뉴욕 뉴웨이브>가 P.S.1에서 열렸을 때 이미 뉴웨이브란 용어는 단순히 1980년대 전반기를 주도한 낙서미술, 신표현주의, 이스트 빌리지 미술이 혼합된 상태를 의미했다. 그러나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현재 뉴웨이브는 단지 새롭고, 긁어 벗겨낸 표면을 보여주는 미술과 동의어로 사용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