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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기

명기 明器 ming-qi(중)

무덤에 넣으려고 만든 부장품(副葬品)으로 실물을 작게 축소하여 상징적으로 만든 모형. 종류는 그릇이나 동물, 인물상 등 다양하다. 명칭은 《예기 禮記》에 근거를 둔다. 묘에 부장되는 대부분의 명기는 거친 도질의 바탕에 연유(鉛釉)를 시유한 비실용적인 도기*로 별도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기 이전에는 금속이나 나무재질도 있었으며 피장자가 생전에 사용하던 실용품이 부장되기도 했었다.
은殷, 주周나라 때에는 공납용 기물이 중심이었고, 이기*(彝器)를 모방한 토기*와 청동납, 구리로 주조한 비실용적인 무기도 포함된다. 전국(戰國)시대부터 예기(禮器)의 모조품과 함께 용*(俑)이 출토되었는데 동용(銅俑), 목용(木俑), 도용(陶俑)이 있다. 한대(漢代)의 사람들은 죽을 때 자신과 함께 가족과 노예, 재산과 가축, 가옥까지도 저 세상에 가지고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명기의 종류가 시종호위병, 농부악대, 곡예사망루, 헛간 등으로 다양해진다. 주로 도기로 만들어진 명기들은 틀에 의한 제작을 통해 대량 생산되었다. 후한(後漢)시대에는 연유도기(갈유, 녹유)가 나타났고 육조(六朝)시대부터는 사실성을 더해가며 진묘수*(鎭墓獸), 호인(胡人), 낙타 등의 종류가 추가된다. 당대(唐代)는 삼채유로 더욱 화려해진다. 명대(明代)에까지 계속된 명기의 부장(副葬)은 각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내세관을 보여주고 있어서 중요도가 크다.

명당

명당 明堂 ming-tang(중)

천자(天子)가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린다는 중국 고대의 정통적 정치사상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담은 건물. 조회, 제사, 경상(慶賞), 선사(選士), 교학(敎學) 등 중요 의식이 행해졌다. 하夏의 세실(世室), 은殷의 중옥(重屋)과 같은 목적으로 주대(周代)에 설치되어 모든 신하를 모아 천자가 다스린 곳이다. 건물의 실제 형태는 불분명한데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는 5실(室), 《사방양협四旁兩夾》 《예기禮記》 《월령月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1태실(太室), 8가(家), 《대대례기大戴禮記》에는 9실 등 일정치 않아 논쟁이 청대(淸代)까지 계속됐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태산에서 봉선(封禪)의식을 행할 때, 원봉 2년(元封, 기원전 109)에 상주(上奏)된 명당도(明堂圖)에 의해 건립한 이후, 한漢에서 육조(六朝)의 역대 왕조가 건설했다. 남제南齊의 명당은 유송(劉宋)의 태극전(太極殿)이 널리 사용되었고 수隋에는 도면과 모형은 작성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당唐의 측천무후는 낙양洛陽의 건원전을 부수고 기상천외한 3층의 거대한 명당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에서도 천명(天命)사상과 함께 명당을 받아들인 결과, 경복궁 경회루慶會樓가 명당으로 설계되었다고 한다.

명대 미술

명대 미술 明代美術

명明은 1368년 주원장朱元璋에 의하여 세워져서 1644년 멸망하기까지 4세기 이상에 걸쳐 북방민족 대신 한민족(漢民族)이 다시 지배한 시기이다. 명대(明代)에는 여러 학파들이 있었지만, 주류는 불교와 도교적 색채를 띤 신유가(新儒家)라는 유교였다. 북송北宋의 신유가는 스스로를 수양하는데 있어 사물을 탐구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사물을 탐구’하는 데에는 정신과 사물의 내재적인 원리뿐 아니라 사물 자체의 현상과 대상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외부세계에 대한 연구는 정신과 원리와의 관계 또는 지식과 실천과의 관계 등의 연구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사물을 엄격하게 분석하는 연구보다는 왕양명王陽明 같은 사상가들은 사물을 일반화하려는 연구에 치중하였다.
건축: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벽돌을 사용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오늘날에 보는 정연한 모습의 장성은 명대에 이루어진 것이나 청대(淸代)나 최근에 보수한 부분도 있다.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과 〈태묘太廟〉는 명대 초기의 웅혼한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많은 건축물이 청대에 들어 개축 또는 보수된 것이다. 그러한 것에 비해 명대의 경향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북경 북쪽에 있는 〈명십삼릉明十三陵〉이다. 1935년에 대규모로 수리를 한 성조의 〈장릉長陵〉(1409~1413 건조)이 최대 규모이며, 인종의 〈헌릉獻陵〉을 비롯하여 마지막 의종의 〈사릉思陵〉까지 건조되었으나 방치된 채 크게 파손된 것이 많다. 벽돌만 사용하고 목재를 사용하지 않는 건축인 <무량전無梁殿>은 명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는데, 남아 있는 것은 명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전탑과 석탑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명대의 라마탑이 화북에 몇 기 전하는 정도이다. 북경에 있는 흰 돌로 만든 대정각정사大正覺正寺의 〈금강보좌金剛寶座〉(1473)는 라마계 건축문화이다.
불상:명대에는 조상적(造像的)인 면에서는 수, 당대(隋唐代)에 비해 쇠퇴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신앙은 일반 민중에 더욱 확산되었다. 불상 중에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 라마교의 상들에서 우수한 예가 전한다. 홍무 연간(1368~1398)과 영락 연간 무렵에는 원元 양식의 조각이 남아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홍무 18년(1385)의 〈목조 천의관음상〉과 홍무 연간에 제작된 태원 숭선사의 〈소조 천수관음상〉, 태원 진사진 봉성사의 〈나한상〉, 영락 9년(1411) 무렵의 〈칠금목조좌불〉은 그 대표적 작품이다.
15~16세기의 것으로는 성화 6년(1469)에 주조한 북경 서산 와불사의 〈청동 석가열반상〉, 정덕 연간(1506~1521)의 북경 서산 벽사의 〈소조 좌불오존상〉 〈십팔나한상〉, 북경 서쪽 교외 팔리장의 마하암에 있는 가정 25년(1546)의 〈목조 좌불삼존상〉 〈소조 십팔나한〉, 성화 13년(1477)의 〈철나한상〉, 베를린의 개인 소장인 성화 18년(1482)의 〈청동나한상〉 등이 있다. 이러한 예를 볼때 명대 초기의 위엄있고 엄숙하던 것이 친근감있게 변하는 것과 명대 조각의 지배적인 경향인 사실적 작풍이 엿보인다. 명대 말기에는 건요 백자의 관음상을 따른 흔적이 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천계 4년(1624)의 〈칠금목조관음좌상〉이 있다.
회화:명대 회화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하는 직업 화가의 화풍, 즉 북종(北宗)으로 남송南宋의 원체화*(院體畵)나 수묵화*(水墨畵)의 흐름을 받아들이거나 원의 이곽파*李郭派와 연결되던 것과, 문인들인 원사대가(元四大家)*를 스승으로 했던 남종으로 나뉜다. 명의 건국에서 영락기까지는 원대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데, 예찬倪讚(니 짠, 1301~1374)의 형식면을 따른 왕몽王蒙(우앙 멍)을 따랐던 서분徐賁(쉬 펀)이 있다. 선덕 연간(宣德,1426~1435)에 이르러 명의 화원제가 확립되었다. 명 초의 궁정화가로는 황전黃筌(후앙 취앤)풍 화조화의 변문진邊文進(삐앤 웬진), 홍치 연간(1488~1505)의 화원에서는 화조를 변각구도로 재구성한 여기呂紀(뤼 지)와 수묵화조화의 임량林良(린 리앙)이 유명하다.
이러한 궁정화가들 이외에 북종화*(北宗畵)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절파*折派이다. 대진戴進(따이 진, 1388~1462)이 절강성 출신임에 따라 후세인들이 절파라고 부른 이 화파는 남송의 원체 양식(院體樣式)에 송말 원초의 자유스런 수묵화법, 변각구도가 그 특징이다. 성화(1465~1487)의 화원에서는 오위吳偉(우 웨이), 재야의 화가 장로張魯(즈앙 루)에 이르면 절파의 화풍의 조방함은 더욱 드러난다. 명대 문인화*(文人畵)의 선구자는 강소성 오현吳縣 출신이며, 임모*(臨摹)에 송, 원대의 명적을 널리 연구하고, 동원董源(똥 위앤)과 거연巨然(쥐 르안)의 화풍을 바탕으로 중년이후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오진吳鎭(우 즈언)에 심취하여 전아하고 활달한 그림을 그린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이다. 심주의 제자로는 기교에 뛰어났던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이 있다. 심주와 문징명의 영향 아래 출현했던 문인화가 중에는 오현(넓게는 강소성 남반과 절강성 북반을 가리킨다) 출신이 많아 절파에 대응하여 오파*吳派라고 명명되는 이 화파의 산수화 특징은 담아한 색채의 아름다움과 선묘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오파와 절파에 속하지 않으면서 명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화가로는 구영仇英(처우 잉)과 당인唐寅(탕 인)이 있다. 고전적 양식의 부흥에 노력하였던 구영은 정교하고 화려한 채색화와 함께 백묘화*(白描畵)에도 뛰어났다. 문인화가인 당인은 처음에는 주신周臣(저우 천)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심주에게도 배워 원체화와 남종화를 종합하는 입장에 섰다. 명말에 다가가면 문인화 계보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이 주목된다. 그는 그림에서 문인 계층의 미적 이념들을 실현시켰고, 또한 자신의 비평을 통해 그 작품들에 이론적 형식을 부여한 인물로서 문인화의 전통이 다른 어떤 전통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15세기의 시인 화가였던 두경杜瓊(뚜 치웅)이 먼저 이룩한 학설을 채택해 남북종론(南北宗論)을 만들었다.

명도

명도 明度 brightness(영)

색*(color)의 세 가지 속성 중의 하나. 색은 색상*(色相), 명도, 채도*(彩度)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색의 3속성이라고 한다. 그 중 명도는 색의 명암(明暗)의 정도, 즉 밝기의 비율을 말한다. 밝은 색은 명도가 높아 명색(light color)이라 하며 어두운 색은 명도가 낮아 암색(dark color)이라 한다. 무채색은 명도만 있다. 무채색 및 유채색을 통틀어 중간 정도의 밝은 색을 중명색(middle light color)이라 한다.

명문

명문 銘文

비석이나 기물에 새겨진 글. 청동기의 명문은 금문(金文), 비의 명은 비명(碑銘)이라고 한다. 상商, 주周 시대의 청동기는 주조명(鑄造銘)이 대부분이나 전국(戰國)시대 이후에는 각명(刻銘)이 많아졌다. 불상에는 조상명(造像銘)이 있으며 목각과 목조 건축에는 묵서명(墨書銘)이 있다.

명암법

명암법 明暗法 chiaroscuro(이) clair-obscur(프)

회화나 소묘에서 화면이나 묘사된 물체에 입체감과 거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한 가지 색상만을 사용해 명암을 단계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원하는 효과를 얻는 기법. 화면에 밝기와 어두움을 표현하는 화법. 명과 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대상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화면에 원근감을 표현한다.
명암법이라는 용어는 1681년 발디누치Filippo Baldinucci(1162~1196)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드 필르Roger de Piles(1635~1709)의 정의에 따르면 명암법이란 ‘전체적인 효과뿐 아니라 눈에 휴식과 만족을 주도록 그림 속에 광선과 음영을 적절히 분배하는 미술’이다. 명암법은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명암법은 빨리 건조되는 템페라*같은 매체에는 사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유화가 등장한 이후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17세기경 바로크 시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특히 당대의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나 카라밧지오 Caravaggio(1571~1610)는 명암법을 활용하여 광원의 설정, 빛과 그늘의 대조적인 설정을 통해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였다. 그 밖에도 퓌슬리Henry Fuseli(1741~1825), 오피John Opie(1761~1807), 베리James Barry(1741~1806) 등이 명암법의 대가로 유명하다.

명왕

명왕 明王 Vidya-raja(범)

‘명’은 지식을 나타내는 말로, 주문진언, 다라니를 가리킨다. 명왕은 주문을 관할하는 왕자(王者) 혹은 주력을 가진 지명자(持明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위노왕威怒王’ ‘분노왕忿怒王’이라고 하며 지혜의 작용에 의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불(方便佛)이다. 부처의 명령으로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과 이교의 신들을 항복시키기 위하여 다비의 공포스러운 형상으로 나타난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의 심성에 강한 의지를 심어주는 부처님의 다른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명왕은 밀교가 성립하면서 등장하였고, 5세기경 공작명왕이 최초로 등장하였다. 공작명왕은 독초나 해충을 잡아먹는 공작을 신격화한 것으로 모든 중생의 정신적인 번뇌를 제거하여 안락함을 주는 존상으로 명왕의 일종이지만 형상이 분노형이 아니고 자비로운 보살형으로 공작을 타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의 동경*(銅鏡)이나 범종*(梵鐘)과 같은 불교 공예품에서 볼 수 있다. 7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명왕은 모두 분노형으로 다면다비(多面多臂)상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일반적인 도상*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 중에서 오대명왕이 유명한데, 금강계(金剛界) 5불(佛)의 명령을 받아 교화하기 어려운 중생과 내외의 악마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나타나는 5개의 명왕을 말한다. 중앙의 부동명왕(不動明王)은 대일여래(大日如來), 동방의 항삼세명왕(降三世明王)은 아촉불(阿閦佛), 남방의 군다리명왕(軍茶利明王)은 보생불(寶生佛), 서방의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방의 금강야차명왕(金剛夜叉明王)은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의 방편불로 각각 배치된다.
한편 천태계(天台界)에서는 금강야차 대신에 오추사마(烏蒭沙摩)명왕을 넣은 경우도 있다. 오대명왕은 인도에서 성립 발전되었으나, 한 짝을 이루며 나타난 것은 8세기 중국 당唐나라에 이르러서이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에 부동명왕을 만들었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기록이 전하나 실제로는 고려시대의 금강경이나 동경 등에서 볼 수 있다. 오추사마명왕에 관한 신앙 또한 고려시대에 있었으나 조형으로 나타난 것은 19~20세기 초의 신중탱화에서이다. 석가여래의 화현이며 더러움을 제거하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신중탱화의 주존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놓였던 것 같다.

명치, 대정시대 미술

명치, 대정시대 미술 明治, 大正時代美術

→ 메이지, 다이쇼시대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