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 미술
명대 미술 明代美術
명明은 1368년 주원장朱元璋에 의하여 세워져서 1644년 멸망하기까지 4세기 이상에 걸쳐 북방민족 대신 한민족(漢民族)이 다시 지배한 시기이다. 명대(明代)에는 여러 학파들이 있었지만, 주류는 불교와 도교적 색채를 띤 신유가(新儒家)라는 유교였다. 북송北宋의 신유가는 스스로를 수양하는데 있어 사물을 탐구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사물을 탐구’하는 데에는 정신과 사물의 내재적인 원리뿐 아니라 사물 자체의 현상과 대상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외부세계에 대한 연구는 정신과 원리와의 관계 또는 지식과 실천과의 관계 등의 연구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사물을 엄격하게 분석하는 연구보다는 왕양명王陽明 같은 사상가들은 사물을 일반화하려는 연구에 치중하였다.
건축: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거대한 벽돌을 사용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다. 오늘날에 보는 정연한 모습의 장성은 명대에 이루어진 것이나 청대(淸代)나 최근에 보수한 부분도 있다.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과 〈태묘太廟〉는 명대 초기의 웅혼한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나, 많은 건축물이 청대에 들어 개축 또는 보수된 것이다. 그러한 것에 비해 명대의 경향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북경 북쪽에 있는 〈명십삼릉明十三陵〉이다. 1935년에 대규모로 수리를 한 성조의 〈장릉長陵〉(1409~1413 건조)이 최대 규모이며, 인종의 〈헌릉獻陵〉을 비롯하여 마지막 의종의 〈사릉思陵〉까지 건조되었으나 방치된 채 크게 파손된 것이 많다. 벽돌만 사용하고 목재를 사용하지 않는 건축인 <무량전無梁殿>은 명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는데, 남아 있는 것은 명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전탑과 석탑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명대의 라마탑이 화북에 몇 기 전하는 정도이다. 북경에 있는 흰 돌로 만든 대정각정사大正覺正寺의 〈금강보좌金剛寶座〉(1473)는 라마계 건축문화이다.
불상:명대에는 조상적(造像的)인 면에서는 수, 당대(隋唐代)에 비해 쇠퇴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신앙은 일반 민중에 더욱 확산되었다. 불상 중에는 관음보살상과 나한상, 라마교의 상들에서 우수한 예가 전한다. 홍무 연간(1368~1398)과 영락 연간 무렵에는 원元 양식의 조각이 남아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홍무 18년(1385)의 〈목조 천의관음상〉과 홍무 연간에 제작된 태원 숭선사의 〈소조 천수관음상〉, 태원 진사진 봉성사의 〈나한상〉, 영락 9년(1411) 무렵의 〈칠금목조좌불〉은 그 대표적 작품이다.
15~16세기의 것으로는 성화 6년(1469)에 주조한 북경 서산 와불사의 〈청동 석가열반상〉, 정덕 연간(1506~1521)의 북경 서산 벽사의 〈소조 좌불오존상〉 〈십팔나한상〉, 북경 서쪽 교외 팔리장의 마하암에 있는 가정 25년(1546)의 〈목조 좌불삼존상〉 〈소조 십팔나한〉, 성화 13년(1477)의 〈철나한상〉, 베를린의 개인 소장인 성화 18년(1482)의 〈청동나한상〉 등이 있다. 이러한 예를 볼때 명대 초기의 위엄있고 엄숙하던 것이 친근감있게 변하는 것과 명대 조각의 지배적인 경향인 사실적 작풍이 엿보인다. 명대 말기에는 건요 백자의 관음상을 따른 흔적이 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의 천계 4년(1624)의 〈칠금목조관음좌상〉이 있다.
회화:명대 회화에는 궁정을 중심으로 하는 직업 화가의 화풍, 즉 북종(北宗)으로 남송南宋의 원체화*(院體畵)나 수묵화*(水墨畵)의 흐름을 받아들이거나 원의 이곽파*李郭派와 연결되던 것과, 문인들인 원사대가(元四大家)*를 스승으로 했던 남종으로 나뉜다. 명의 건국에서 영락기까지는 원대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는데, 예찬倪讚(니 짠, 1301~1374)의 형식면을 따른 왕몽王蒙(우앙 멍)을 따랐던 서분徐賁(쉬 펀)이 있다. 선덕 연간(宣德,1426~1435)에 이르러 명의 화원제가 확립되었다. 명 초의 궁정화가로는 황전黃筌(후앙 취앤)풍 화조화의 변문진邊文進(삐앤 웬진), 홍치 연간(1488~1505)의 화원에서는 화조를 변각구도로 재구성한 여기呂紀(뤼 지)와 수묵화조화의 임량林良(린 리앙)이 유명하다.
이러한 궁정화가들 이외에 북종화*(北宗畵)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절파*折派이다. 대진戴進(따이 진, 1388~1462)이 절강성 출신임에 따라 후세인들이 절파라고 부른 이 화파는 남송의 원체 양식(院體樣式)에 송말 원초의 자유스런 수묵화법, 변각구도가 그 특징이다. 성화(1465~1487)의 화원에서는 오위吳偉(우 웨이), 재야의 화가 장로張魯(즈앙 루)에 이르면 절파의 화풍의 조방함은 더욱 드러난다. 명대 문인화*(文人畵)의 선구자는 강소성 오현吳縣 출신이며, 임모*(臨摹)에 송, 원대의 명적을 널리 연구하고, 동원董源(똥 위앤)과 거연巨然(쥐 르안)의 화풍을 바탕으로 중년이후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오진吳鎭(우 즈언)에 심취하여 전아하고 활달한 그림을 그린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이다. 심주의 제자로는 기교에 뛰어났던 문징명文徵明(원 즈엉밍, 1470~1559)이 있다. 심주와 문징명의 영향 아래 출현했던 문인화가 중에는 오현(넓게는 강소성 남반과 절강성 북반을 가리킨다) 출신이 많아 절파에 대응하여 오파*吳派라고 명명되는 이 화파의 산수화 특징은 담아한 색채의 아름다움과 선묘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오파와 절파에 속하지 않으면서 명대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화가로는 구영仇英(처우 잉)과 당인唐寅(탕 인)이 있다. 고전적 양식의 부흥에 노력하였던 구영은 정교하고 화려한 채색화와 함께 백묘화*(白描畵)에도 뛰어났다. 문인화가인 당인은 처음에는 주신周臣(저우 천)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심주에게도 배워 원체화와 남종화를 종합하는 입장에 섰다. 명말에 다가가면 문인화 계보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이 주목된다. 그는 그림에서 문인 계층의 미적 이념들을 실현시켰고, 또한 자신의 비평을 통해 그 작품들에 이론적 형식을 부여한 인물로서 문인화의 전통이 다른 어떤 전통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15세기의 시인 화가였던 두경杜瓊(뚜 치웅)이 먼저 이룩한 학설을 채택해 남북종론(南北宗論)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