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포르멜 미술
앵포르멜 미술 Art Informel(프)
‘앵포르멜’은 원래 부정형 또는 비정형의 뜻. 앵포르멜 미술은 제2차세계대전 후에 정형화되고 아카데미즘*화한 추상 특히 기하학적 추상*에 대해 반발하여 일어난 것으로서, 미리 계획된 구성을 거부하고 자발적이며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말한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상응하는 동시대 유럽 미술을 지칭하면서 시작된 말이고 서정추상*이나 타시슴*과도 거의 혼용되고 있으나, 사실상 유사한 성격의 미술들을 전부 포괄하여 일명 뜨거운 추상 또는 부정형의 추상 전체를 양식적으로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파리의 드루엥 화랑에서 열린 세 전시회를 통해 포트리에Jean Fautrier(1898~1964), 볼스Wols(1913~1951),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는 앵포르멜 미술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1945년에 발표된 포트리에의 <인질Otages>전, 1946년 뒤뷔페의 <오트 파트Haute Pâtes>전, 1947년 볼스의 두번째 개인전이 그것이다. 이들은 가혹한 전쟁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억압된 인간의 극한적인 정신을 다루었다. 이들은 구상과 추상을 불문하고 기존의 회화 개념 및 소재의 틀을 깨고 삶의 실존적인 모습을 표출하고자 했으나 소수의 문학가 및 화가에게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앵포르멜의 이념이 구체화된 것은 비평가 타피에Michel Tapié에 의해서였다. 그는 1951년 니나 도세Nina Dausset 갤러리에서 <대립된 격정Véhémences confrontées>을 시작으로 앵포르멜 추상 운동을 본격화했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마티유Georges Mathieu와 브리앙Camille Bryen, 독일의 볼스와 아르퉁Hans Hartung, 캐나다의 리오펠Jean-Paul Riopelle, 미국의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과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등이 참가했다.
앵포르멜이란 명칭은 이듬해 6월 스튜디오 파케티Faccheti에서 열린 <앵포르멜이 의미하는 것Significant de l’informel>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전시회의 제목은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타피에는 ‘의미하는 것’과 ‘의미하지 않는 것’을 같은 위치에 놓고 비정형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아르 오트르Un Art Autre》(1952)라는 소책자에서 본래 앵포르멜의 근원적인 생명의 징후는 구상*, 비구상*을 부정하고 ‘생생한’ 포름*에 정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입체주의*와 기하학적 추상은 붕괴된 고전주의*의 ‘마지막 절규’에 지나지 않고, 초현실주의*도 낭만주의*의 문학적 변용으로 보아 역시 부정한다고 밝히면서, 가치 전도를 위해 반휴머니즘의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니체와 다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산으로 규정한 뒤, 이러한 일체의 미학적 권위의 파괴 위에 위상기하학, 집합론, 양자역학, 비교적(秘敎的) 기독교, 노장사상(老莊思想) 등을 끌어들여 앵포르멜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타피에는 앵포르멜 미술이 표현의 제스처*보다는 마티에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나 본래 유파나 이즘을 목표로 하지 않았던 만큼 작가들의 양식은 다양했으며, 미쇼Henri Michaux(1899~1984), 프란시스Sam Francis(1903~1970), 술라주Pierre Soulages(1919~ ), 토비Mark Tobey(1890~1976), 폰타나Lucio Fontana(1899~1968), 로스코Mark Rothko(1923~1994), 부리Pol Bury(1922~ ), 보르뒤아스Paul-Éile Borduas(1905~1960), 알레친스키Pierre Alechinsky, 타피에스Antoni Tàpies(1923~ ) 등 다채로운 구성원들을 끌어들여 전후 아방가르드* 미술 가운데 대표적인 미술사조를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