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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유사 類似 similarity(영)

조형의 모티브*에서 서로 비슷한 것의 차이가 작아지면 동등하게 되는데, 이 동등 또는 동등에 가까운 관계를 유사라고 한다. 유사의 반대 개념이 대조*이다.

유스턴 로드파

유스턴 로드파 Euston Road School(영)

영국에서 일어난 화파. 1937년에 성립되어 1939년까지 존속했다. 이 화파는 ‘유스턴 로드 그룹Euston Road Group’으로 알려진 일군의 화가들에 의해 결성된 것으로, 주요 멤버는 로저스Claude Rogers, 벨Graham Bell, 패스모어Victor Pasmore, 콜드스트림William Coldstream 등이었다. 이 그룹은 당시 서구 추상미술*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대한 반동적 입장에서 결성되었으며, 여기에 속한 작가들은 이전에는 추상화를 실험했지만 이 운동을 계기로 서정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화풍으로 돌아섰고, 예술가의 자연에 대한 객관적 관계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이들은 추상을 주장하는 모더니스트의 이론들과 초현실주의를 다같이 배격하고, 보다 친근한 주제들, 즉 풍경이라든가, 정물, 초상화, 그리고 누드화 등으로 화제(畵題)를 옮겨갔다. 특히 이들은 자연의 접근에서 무엇보다도 구도를 강조함으로써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의 뒤를 이었다. 유스턴 로드의 화가들은 이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지만, 결국 그들의 실험은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유약

유약 釉藥 glaze(영)

①도자기의 표면에 덧씌워 광택과 무늬를 아름답게 하는 유리같은 분말의 약품. 잿물, 도자기를 구울 때 덧씌우는 약으로 단순히 유(釉)라고도 한다. 바탕의 흡수성을 없애고 도자기 자체의 강도를 늘리며 기면을 광택나게 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소성화도(燒成火度)에 희한 고화도유와 저화도유, 외관에 따라 투명유와 불투명유, 성분에 따라 철유(鐵釉), 동유(銅釉), 연유(鉛釉), 장석유(長石釉), 회유(灰釉), 소다유 등으로 분류된다. 규산과 산화알루미늄이 주성분이고 거기에 나트륨, 칼륨, 마그네슘이 첨가되며 종류에 따라 연(鉛), 아연 등이 사용된다.
고대 자기의 유약은 소다유(알칼리유*), 연유, 회유의 3종으로 대별된다. 소다유는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었고, 그 후 서아시아와 로마에서 사용된 바 있으며 이슬람 도기에 많이 쓰였다. 연유는 중국 전국시대와 한漢나라 이후에 성행하였다.
유약의 색조는 함유하고 있는 금속의 종류와 양, 소성할 때 환원염(還元焰), 산화염(酸化焰), 중성염(中性焰) 및 용제(溶劑)의 성질에 따라 여러가지로 변한다. 유약 및 금속으로서 철이 색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여 청자유, 흑유, 황유 등이 되고, 동(銅)은 녹유(綠釉)와 홍유(紅釉, 長砂, 桃花紅, 牛血紅) 및 소다유의 청유(靑釉), 망간은 자유(紫釉), 흑유(黑釉), 코발트는 남유(藍釉, 唐藍釉, 瑠璃釉)가 된다. 유럽에서는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기에 걸쳐서 이슬람 세계에서 예부터 쓰인 석유(錫釉) 도기가 유행했다. 스페인의 이스파노모레스크, 이탈리아의 마용리카, 프랑스나 독일의 파이앙스, 네덜란드의 델프트, 영국의 잉글리시 델프트 등이 모두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 말기부터 17, 18세기의 독일 라인 지방에서는 소성 중에 식염을 투입하는 식염유를 바른 석기가 다량으로 구워졌다. 회유는 나무재나 석회를 용제로 하고, 1,200도 이상의 고온에 녹기 때문에 내열성이 뛰어나 중국에서는 자연유로부터 발달하여 자기의 유약으로 보급되어 왔다.
②서양 회화에 나타나는 그림의 기법적인 용어. 색채나 바탕 위에 바른 또다른 색조풍. 그림물감은 혼색하면 뒤로 후퇴하는 반면에 유약을 바른 색채는 앞으로 드러나듯이 보인다. 많은 화가들이 유약을 여러 번 덧칠하는데,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가 특히 이 방법을 애용하였다. 티치아노Tiziano(1485~1576)와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의 그림에서 의상의 화려한 심홍색은 불투명한 밑그림의 심홍색에 유약을 바른 것이다. 19세기에는 유약을 거의 바르지 않는 그림을 선호한 까닭에 유약이 쓰이지 않았다. 19세기의 와니스 유약은 불완전한 부분을 감추고 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었던 색채의 눈속임식 조화를 그림에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터너William Turner(1775~1851)가 빛과 대기의 효과를 그리고자 했을 때, 그는 유화에 수채화의 기법을 원용하였다. 그 때 밝은 바탕 위에 투명한 유약이나 밝은 그림물감으로 된 얇은 층을 주로 사용했다.

유엽묘

유엽묘 柳葉描

→ ‘인물십팔묘’ 참조

유정수목도

유정수목도 幽亭秀木圖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수직으로 높이 뻗은 나무와 그 밑에 정자 하나를 그리고 원경을 배치하는 간결한 구도의 산수화를 말한다. 원사대가*의 한 사람인 예찬倪瓚(니 짠, 1301~1374) 이래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예찬은 1354년에 그린 <송림정자松林亭子>에서 전경의 물가에 배치된 나무와 빈 정자, 중경의 강물, 그리고 원경의 산 등 예찬 특유의 산수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그의 유명한 작품 <용슬재도容膝齋圖>(1372)에서는 얼음같이 찬 바위 위에 서 있는 몇 그루의 앙상한 나무, 예리한 선으로 묘사된 빈 정자, 나지막한 원경의 산으로 이루어진 쓸쓸한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양식의 그림들은 속기가 없는 담백한 그림으로 추앙되었고, 하나의 화제로 유행하였다. 이에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은 이 화제의 뜻을 설명하기를, 정자에 속물이 없음을 유(幽)라 하고, 후련하게 솟은 나무가 서리를 맞으며 잎사귀에 단풍이 곱게 든 것을 수(秀)라 하였다.

유토

유토 油土 plasticine(영)

조소*의 재료. 소상(塑像) 따위를 만들 때, 점토보다 부드러운 맛을 내기 위해 쓰는 기름 섞인 흙을 말한다. 주성분은 유황, 산화 아연, 밀랍, 올리브유로서 천연토는 들어 있지 않다. 기온에 따라 경연(硬鉛)의 변화는 있으나 점착력이 있으므로 조각의 소품이나 복잡한 모양의 부조 등에 적합하다.

유파

유파 流派
school(영) école(프)

일단의 예술가들이 공통된 이념, 예술관, 기법, 지역적 기반 등을 토대로 함께 모여 결성하고 공동으로 활동이나 작업을 추진하는 하나의 일관된 미술운동 또는 모임. 화파(畵派)라고도 한다. 무브먼트* 개념과 유사하지만 유파가 보다 집단의 결속력이 강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형학

유형학 類型學 Typology(영)

유형학은 신적인 영감을 받아 쓰여진 성서(聖書)가 총체적이고 일관된 체계를 가졌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를 테면, 구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들은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에 일치하는 전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교회에서는 신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세계의 구원자라고 인간들에게 알리고 이해하게 하는 방법으로써 구약에서 이미 성서의 저자들에게 계시를 했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약성서는 베일에 가려진 신약성서와 같고, 신약성서는 베일이 벗겨진 구약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입장에서 서양의 기독교 미술은 다양한 테마들을 그 유형학적 일치점을 고려하여 함께 그룹지어 그려내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를 테면, 구약에서의 만나의 기적이 신약의 최후의 심판과,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서 탈출하는 사건은 신약에서의 예수의 부활과, 그리고 야곱의 사다리는 예수의 승천과 함께 묶어서 묘사되는 것 등이 있다.

유화

유화 油畵
oil painting(영) peinture á l’huile(프)

안료를 녹이는 매재*로서 린시드유*를 사용한 그림. 유채화라고도 한다. ‘유화’라는 용어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쓰여지고, 그러한 방법으로 그려진 그림에 대해서도 쓰여진다. 유화 기법의 특징은 다른 기법과 비교해서 색조, 색의 농담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동시에 선적 표현도 가능하고 광택, 반광택, 무광택의 효과, 혹은 불투명, 반투명, 투명의 묘법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으며 두꺼운 칠, 얇은 칠, 혹은 기복의 변화가 있는 화면 등 재질감의 표현이 가능하다. 또한 제작 중의 색과 건조 후의 색의 변화도 없는 등의 장점을 가진다. 여러 시대에 걸친 각 유파의 기법이 구조와 외양에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그림의 방법과 재료 등 매우 다양한 범위에 걸쳐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화라고 부를 때 그 공통적인 특징은 매재에 건성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유화가 15세기 초반 반 아이크van Eyck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하는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의 주장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유화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반 아이크는 햇빛에 쬐지 않고서도 마르는 바니시*를 연구하는 동안 린시드유와 호도유에서 이러한 성징을 발견하였다. 반 아이크는 이러한 기름을 색소에 대한 매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기름이 이보다 훨씬 이전인 중세에 이미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어쨌든 반 아이크가 보다 나은 유연성, 보다 풍부한 색조, 보다 범위가 확장된 명암을 유럽 회화로 유입하면서 유화의 기법상 하나의 혁명을 실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와 같이 초기 플랑드르파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이 새로운 화법이 다 메시나Antonello Da Messina에 의해 이탈리아로 전해졌고, 이때부터 새로운 유화 방법의 보다 큰 잠재력이 표출되기 시작하여 점차 종래에 성행하던 템페라*화와 교체되기에 이르렀다. 세부적인 명암의 변화, 색채와 대기의 자연주의적인 재현, 공간에 입체적으로 표현되는 형식, 색조의 미묘한 변화와 혼합 등 이러한 특징은 템페라로는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제 물감은 조직적인 특질을 갖고 있는 실체로 인정되고, 그 자체의 표현성을 살리면서 사용되기에 이르렀는데, 유화의 가장 큰 특징이랄 수 있는 이러한 기법이 르네상스* 화가들 중에서도 티치아노Tiziano(1485~1576)의 후기 작품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티치아노는 그림의 구조와 입체감 표현 작업에 있어서 주로 색채와 안료에 의존하였다.
17세기에는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a Y Velasquez(1599~1660),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를 통하여 다양한 유화 기법이 완벽하게 구사되었다. 이들은 유화만이 가능한 제작의 신속함과 분방함, 미묘한 명암의 변화 등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바로크 회화의 양식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세기 중반에는 두 가지 면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그 하나는 상업적인 재료상이 등장하여 화가가 직접 하던 재료의 제조과정을 떠맡았다는 것이다. 짤 수 있는 주석 튜브의 발명은 이전에 사용되었던 불편하고 지저분한 주머니를 대신하여 작업 면에서 기본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뿐만 아니라 옥외에 나가 자연을 직접 그릴 수 있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매재로서 포피유의 사용은 천천히 마르는 그림을 만들게 되었지만, 동시에 두껍게 버터를 바른 듯한 견고함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견고함은 붓 터치와 같은 거친 흔적을 보존할 수 있게 했는데 이전에는 그러한 흔적들이 곧 평평하게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이 같은 물감 성질의 변화는 덧칠해서 원하는 색채를 내는 방법이 아닌, 직접 또는 프리마묘법*으로 그리는 것을 선호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유약칠과 바림(scumbles)으로써 투명 또는 반투명의 물감을 여러번 덧칠하여 그리는 방식이 아니라, 이제는 화가가 마치 그림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의도했던 것처럼 색채를 부분적으로 칠한다.
또한 직접 그리는 방법은 자연스러움과 충동성을 나타낼 수 있게 하였다. 이전에는 그릴 것을 머릿 속에 구상해 놓은 체계가 있어야 했다. 이제는 세심한 소묘와 주의깊은 밑그림 작업에 따라 단계적으로 조심스럽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밑그림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단 한 번의 덧칠을 하거나 아니면 거의 덧칠을 하지 않고서도 그림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19세기 화가들에게는 장식적인 붓터치가 더이상 그림의 표현적인 종속물이 아니라, 그림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고, 그들 양식의 뚜렷한 특징을 갖게 하였다.
두번째 변화는 인상주의자들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의 화가들은 몇 개 안되는 비교적 밝은 색채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보다 짙은 색조의 사용을 선호하였는데, 이러한 색조로서 미와 강렬함을 최대한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는 보다 많은 밝은 계통의 색채, 특히 금속성의 색채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의 팔레트는 연보라색, 보라색, 밝은 녹색, 오렌지색, 다양한 청색, 강렬한 노란 색 등으로 더욱 풍부해졌다. 그러나 인상주의자들에 의한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물감의 보다 밝고 풍부한 효과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빛과 대기를 재현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유화의 역사는 끊임없이 불안한 실험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5세기 초나 19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새로운 미적 전개가 매재를 다루는 방법에 따른 새로운 기법의 소개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20세기의 유화는 이에 비견할 만한 중요한 혁신을 보이지는 못했다. 다만 20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혁신은 삼차원적인 구조물에 유화를 결합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