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미술
조선시대 미술 朝鮮時代美術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세운 조선왕조는 북벌을 포기하고 한(漢)민족의 명을 받들면서 일본이나 북방 민족과의 평화공존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국초부터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을 시행하여 고려시대의 문화 업적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지나친 문치주의로 붕당 정치의 사화가 발생하고 엄격한 신분제가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기예(技藝)를 천시하는 풍조가 생기는 부정적인 면도 보였다. 하지만 유교적 미의식에 따라 새로운 문화가 창출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예는 수묵화*(水墨畵) 중심의 회화, 백자*(白磁) 중심의 도자기, 재료의 특성을 살린 목공예,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건축과 조원(造園) 등에서 잘 나타난다.
조선시대 미술에는 이러한 유교적 측면 이외에 도가 사상과 불교 사상이 또한 중요한 몫을 차지하였다. 도가 사상은 이 시대의 산수화의 원리, 도자기의 문양, 조원의 원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불교는 정책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끈질진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조선시대 나름의 불교 회화*, 불상*, 불교 공예, 사찰 건축 등을 발전시켰다.
또한 이 시대의 미술은 중국의 영향을 수용하고 소화하여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키고 일본의 미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침으로써 동아시아 미술사상 뚜렷한 기여를 하였다.
건축:조선시대의 목조건축은 공포*(栱包)의 배치에 따라서 크게 다포*(多包)집과 주심포*(柱心包)집으로 이분되는 것은 고려 말기와 같으나, 후기에 가서는 주심포계의 공포가 변화되어 익공*(翼工)이라는 특수한 구조로 변하였으며 후기 건축들은 다포집과 익공집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세부에 있어서는 주심포집과 다포집의 양식이 서로 혼합하여 특색 있는 조선건축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공포가 섬세해지고 내출목(內出目) 부분이 운궁(雲宮)이라는 화려한 장식체로 만들어지거나 공포에 조수형(鳥獸形), 초화형(草花形) 장식이 첨가되는 이른바 초공(草栱), 화공(花栱) 등이 사용되어 전체적으로 번잡해졌으며, 초기 건물이 가지는 정연한 선과 면, 공간의 구성이 깨지고 지붕이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져서 건물 자체의 균형이나 안정감도 크게 줄어들었다.
회화:이 시기는 한국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발전하였던 때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직화된 도화서*(圖畵署)를 중심으로 다수의 화원(畵圓)이 배출되었고, 또한 상당수의 사대부 화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하여 고려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승려 화가들의 활동은 매우 저조하였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보다 산수*, 인물*, 영모*, 화조*, 화훼* 등 감상을 위한 다양한 주제의 그림과 각종 기록화(記錄畵) 등을 포함하는 일반 정통 회화는 물론, 서민 대중을 위한 민화, 그리고 판화*와 불교회화 등 더욱 다양해졌고 또한 한국화 현상이 더욱 뚜렷해졌다.
이러한 한국화 현상은 조선 초기부터 구조, 공간처리, 필묵법*, 준법*, 수지법* 등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더불어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의 중국회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으며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예:범종*은 고려형식을 계승하면서 상대(上帶)아래로 새로 범자대(梵字帶)가 돌거나, 이에 따라 유곽(乳廓)이 상대(上帶)에서 종신(鐘身) 쪽으로 내려오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목공품으로는 장(欌), 궤(櫃), 사방탁자(四方卓子), 문갑(文匣), 연상(硯床), 필통(筆筒), 주상(酒床), 식기(食器) 등 가지각색이며 종류에 따른 나무의 선택, 든든한 짜임새, 나뭇결의 장식적 이용, 간결하고 평민적인 형태 등의 특징이 있다. 조선시대 목조의 미는 인공적인 장식성, 인위적인 조형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목재 자체가 갖는 나뭇결의 미로서 하나의 통일체를 만들어 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조 도자기는 크게 분청사기*와 백자*로 나눌 수 있다. 고려말과 조선조 초기에는 조질청자와 청자상감* 그릇을 생산하는 소규모의 가마*들이 산재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상감청자* 그릇들이 점차 변모하여 문양이 기면(器面) 전체로 확산되고 유약이 투명한 담청색으로 변하는 분청사기들이 생산되었다. 또한 수요는 적으나 고려백자의 맥을 이은 백자와 원, 명대(元明代) 백자의 영향을 받은 백자가 있었다. 전기의 백자는 기형이 유연하며 너그러운 양감을 지니고 있다. 백자에 코발트로 문양을 그린 청화백자*는 세종 연간부터 수입되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