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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宗敎改革
Reformation(영)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기독교 개혁 운동. 루터Martin Luther의 활동으로 인한 종교개혁은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 말에 이르는 전유럽적인 현상이었으며,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원적 지배가 무너지고 프로테스탄트(改新敎, ‘항의하다’ ‘반항하다’라는 뜻의 ‘protest’에서 유래)의 여러 교파가 나타났다.
1517년 로마를 방문한 독일의 수도사 루터는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berti(1404~1472) 등 르네상스 미술이론가들로부터 성당의 이상적인 형태라고 추앙받은 판테온을 악마의 작품이라고 부르고, 성 베드로 성당 및 바티칸 궁정 개축의 재원으로 판매되는 면죄부(免罪符)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이 운동은 로마 교황의 절대 권위와 성직의 특권적 지배를 비판하고 신앙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민중을 선동하여 광범위한 정치적,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신교에서는 교회는 간소해야 된다고 하여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 칼뱅Jean Calvin, 위그노 일파, 사보나롤라 등은 성상파괴주의*까지 치달았으나 루터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종교미술의 의의를 인정함으로써 미술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주문이 끊어진 미술가들은 직업을 바꾸든지 또는 판화* 등으로 생활수단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은 뮌처Thomas Munzer의 지도 하에 민중이 봉기한 독일 농민전쟁(1524~1525)과 30년전쟁(1618~1648)에 영향을 주어 독일에서 뚜렷한 미술의 쇠퇴를 초래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판화는 선교활동의 도구로서 크게 성행했으며, 독일의 많은 루터파 교회에서는 최후의 만찬, 책형도, 그리스도의 부활, 사도* 등을 주제로 하는 제단화*가 제작되었고 또한 독자적인 상징*을 사용하는 신교미술이 형성되었다. 반면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와 칼뱅에 의한 개혁이 진전되어 스코틀랜드,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각국의 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로마 교황 측에서도 이에 대항하는 투쟁을 전개하여 그 대표적 단체인 예수회(Company of Jesus, 일명 제수이트파)를 성립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운동은 자본주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형성하였으며 또한 로마 교회로부터 독립된 근대 국가의 탄생을 가능케 하였다. 한편 미술에서는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등의 세속미술이 성하게 되고 루터 등 개혁자의 초상화 수요가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도리
한국 목조 지붕틀에서 지붕마루에 수평으로 걸어 좌우 지붕면의 동연(상연)의 위끝을 받치는 도리*. 용마루 받침대. 이 도리에서는 앞뒤의 서까래*가 서로 만나며 한국 전통 건축물의 가구에서 기본 부재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마루도리’ ‘마루대’라고도 한다.
종이 조각 paper sculpture(영)
종이와 풀, 가위 또는 나이프 등을 가지고 만드는 조각. 일반적으로 도장(塗裝)하지 않은 종이를 그대로 사용하며 제작방법에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종이 조각은 종이 점토로 만드는 ‘지소(紙塑)’와 구분된다. 소재인 종이는 재질이 유연하므로 상당히 정교한 조각을 제작할 수 있고, 청결한 느낌과 탄력성을 살리면 다른 소재와는 또 다른 매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
조형의 기초 학습단계에서 흔히 시도되는 종이 조각은 입체조형을 설계할 때 시도하면 형태의 기초가 떠오르게 되므로 설계과정의 모호한 점도 알 수 있게 해준다. 추상적인 작품의 원형을 종이 조각으로 만드는 작가도 많다. 입체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소박한 분야인 종이 조각은 1935년을 전후로 유럽에서 유행하였으며, 특히 상업미술* 분야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종합주의 綜合主義
Synthetisme(프)
19세기말 프랑스의 회화 운동으로서 고갱Paul Gauguin(1904~1948)과 나비파* 화가들인 베르나르Émile Bernard(1868~1941), 앙크탱Louis Anquetin(1861~1932), 라발Charles Laval 등에 의하여 주장된 미술 이론이자 기법. 이들은 인상주의*의 화풍과 이론으로부터 결별하고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기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여 작업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보였다.
1889년 파리에서 고갱이 개최한 <인상주의* 및 종합주의> 전람회가 그 시발점이 되었으며, 종합주의라는 용어도 고갱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종합’은 인상주의의 색채분할과 그 기법의 해체적, 분석적인 경향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종합을 의미한다. 고갱은 자연에서 광선과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데 전념한 인상주의의 방식이 지극히 피상적이며, 사상이나 지적 사고를 소홀히 여긴다는 한계를 자각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인상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인상주의의 기법이 대상을 오히려 해체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하였다. 그럼으로써 작가의 주체성에 기반을 둔 형태와 색채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주관과 객관의 종합을 목표로 하였다.
고갱은 1886년 여름에 퐁타방 등지에서 베르나르를 비롯한 여러 추종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종합주의 그룹을 결성하였다. 상징주의* 시(詩)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주로 상징주의적인 의미와 내용이 심화된 주제를 선택하였다. 회화 기법에 있어서는 명암이나 입체감의 표현이 없는 순수한 색면과 선을 토대로 구성요소들을 거의 이차원적으로 배열한 새로운 장식적인 회화 양식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이차원의 평면을 강조하는 종합주의의 기법은 주제의 느낌이나 기본 개념을 색면과 선이라는 형식에 종합시키고자 했다.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형태를 평면적인 색채로 포착하여 단순화시키고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는 자신들의 회화기법을 일컬어 ‘클루와조니슴*(cloisonnisme)’이라고 명명하였다. 원색의 넓은 평면과 굵게 두른 검정 윤곽선으로 생기는 효과가 중세의 클루와조네(cloisonné, 칸막이 된) 에나멜* 기법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르나르는 중세 미술뿐만 아니라 일본 채색판화와 원시미술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그 밖에 브르타뉴 지방의 토속미술, 고갱의 강렬한 개성 등이 이 운동의 근거가 되었다.
1890년대에 결성된 나비파는 종합주의의 사고를 이어 받아 종합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예술 작품은 눈이 아니라 마음과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에 대한 예술의 우위를 확보하려고 시도하였다. 종합주의는 나비파뿐만 아니라 야수주의*, 추상에 이르는 현대회화에 강한 영향력을 주었다.
→ ‘클루와조니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