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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심리학

예술심리학 藝術心理學
psychology of art(영)

예술을 심리학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과학체계. 철학에 의한 인간 탐구의 불만이 심리학이라는 과학을 낳게 한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에서 철학적 미학에 대립하여 성장해 온 것이 예술심리학이다. 현재로는 아직 완전한 체계가 수립되었다고 할 수 없으나 역사적으로 보아, 두 갈래의 연구 방향이 있다. 그 하나는, 예술 자체를 심리학적 연구의 방법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심리학적 연구의 범위 안에서 예술 연구에 관여하는 것이다. 전자는 미학*, 예술학*의 흐름에서 파생된 것으로 각 장르마다 연구 대상이 있어, 이에 따라 연구 방법에 차이가 나타난다.
후자는 심리학적인 논리를 원용함으로써 그 분석이 시도된다. 미적 인상을 주는 자극 대상의 특성이나 미적 향수의 문제, 상징이나 양식의 문제 또는 예술가의 내면적인 동기, 개성, 작품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나 감상자의 심리학적 문제 등 여러 방면을 다룬다.
예술심리학이 과학으로서의 특징을 나타낸 것은 ‘아래로부터의 미학’을 주장한 페히너G.T. Fechner의 《실험미학》(1871)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당시 겨우 분트W. Wundt를 중심으로 해서 심리학에 전용된 생리학적 실험방법은, 정신의 단순한 말초적 사상(事象)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복잡한 고등 정신의 생산물인 예술의 탐구방법으로서는 충분한 성과를 올릴 수가 없었다. 분트 자신도 그로세E. Grosse와 함께 민족심리학의 일부로서 예술에 관한 많은 기술을 남긴데 불과하다. 그러나 분트의 제자들에 의해 고등정신의 실험적 연구가 추진되자 19세기 초에 예술심리학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여전히 직관적, 기술적 경향으로 흘러 체계의 객관화, 정밀화의 과도한 요청과 내성주의(內省主義)의 극단적인 배격은 체계적 진보를 정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심리학적 방법의 진보와 개개의 실험적 데이터의 축적은 게슈탈트(Gestalt)학설이나 행동주의에 관한 학설의 성숙과 때를 같이 하여 예술심리학의 새로운 체계가 나타나게 되었다.
예술심리학은 일반적으로 환경에 대한 생활체의 작용(창작)과 생활체에 미치는 환경의 작용(감상)의 두 방면에서 고찰되며, 미술, 음악, 문예, 종합예술 등의 여러 분야에 적용된다. 시각예술이 양적으로는 중심이 되어 있으나, 음악심리학은 음향심리학의 실험적 진보에 의해 독립체계를 갖기 시작하였다. 문예심리학은 정신분석학파에 힘입은 바 크며, 종합예술분야들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연구가 시작되고 있는 정도이다.

예술의욕

예술의욕 藝術意慾
Kunstwollen(독)

독일의 저명한 미술사학자 리글Alois Riegl(1858~1905)에 의해 예술학*, 미술사*에 도입된 개념으로, 예술가 혹은 각 시대, 사회, 민족은 어떠한 특정한 예술적인 문제에 대해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와 충동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인식에서 생겨난 용어. 리글은 그의 저서 《후기 로마의 미술 공예》(1901)에서 종래 고전 고대의 타락에 일조를 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고대 말기의 로마예술을 고정된 고대와는 다른 이념, 다른 가치 기준에 근거를 둔 예술 형성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여 로마만이 아니고 모든 양식이 각각 고유한 예술의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 미술사의 시대 구분에 큰 변화를 주었다. 리글의 학문은 보링거Wilhelm Worringer를 비롯한 비엔나 학파의 기초 이념이 되었으며, 영국의 흄Thomas E. Hulme, 리드Herbert Read 등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예술의욕이라는 개념은 매우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예술지상주의

예술지상주의 藝術至上主義
l’art pour l’art(프)

‘예술을 위한 예술’. 19세기 낭만주의*의 중심 명제의 하나. 예술*은 사회성, 윤리성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그 자신 때문에 존재한다는 사상. 흔히 ‘인생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과 대비적으로 쓰인다. 즉 미*(美)를 예술 창조 및 향수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여 예술이 다른 어떤 문화 영역에도 종속되거나 관여하는 것을 부정하는 사고 방식을 말한다.
이 용어는 쿠쟁Cousin이 잡지 《Revue des Deux Monde》에 기고한 글 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 의도는 진(眞)과 선(善)의 가치에 대항하는 미적 가치의 주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상업주의와 민주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당시의 프티 부르주아 사회의 취미와 윤리에 대하여, 또 거기에서 근원하는 일체의 삶을 위한 예술에 대하여, 예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울려진 구호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적 형성 속에 윤리적 의미를 찾으려는 일종의 미적 엄격주의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또 탐미적 퇴폐주의로 변이된 반속(反俗)주의로서의 예술지상주의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반속성(反俗性)을 매개로 하여 귀족주의와 이국정서가 따르게 된다.
미술 분야에 있어서 19세기 초의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대혁명을 주도한 디드로Denis Diderot(1713~1784) 등과 같이 예술의 사회적 임무를 요청하는 태도가 일반적이었으나, 1820년대 낭만파의 대두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러한 이념이 예술의 근대화의 한 계기로서 주창되었다. 예술지상주의는 예술의 자율적인 가치를 인식하고 미적 형식의 독자성을 발견한 적극적 의의는 있지만, 한편으로 예술이 현실의 문제와 유리되어 고답적이 되거나 유희적, 퇴폐적이 되는 폐해를 동시에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부심하는 미술의 경향이나 미술가의 제작 태도 등을 이 말을 써서 비판적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예술철학

예술철학 藝術哲學
philosophy of art(영)

예술의 본질 또는 현상에 대해서 그 원리를 고찰하는 철학의 한 부문. 일반적으로는 미학*, 예술학*과 같은 뜻. 좁은 의미로는 19세기 후반 미* 자체만을 고찰 대상으로 하는 전통 미학에 대해, 그것이 취급하지 않는 예술 분야의 존재를 인정하고 예술 사항 일반을 심리주의적 가치론에 의해 철학적으로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소아르M. Dessoir나 우티츠E. Utitz의 입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연에 대치된 인공적인 작품은 모두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엇이 예술이냐는 정의하기 어렵다. 따라서 예술 철학의 엄밀한 정의를 내리는 것도 또한 어려운 문제이다. 이는 개개의 작품을 음미하는 예술 비평과는 다르다.

예술학

예술학 藝術學
Kunstwissenschaft(독)

넓은 의미로는 ‘예술에 관한 학문’을 가리키지만, 좁은 의미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독일에서 미학*과 대립 내지 병립적으로 제창된 학문을 말한다. 예술학에서는 미의 개념을 가장 좁은 뜻으로 한정하여 미학이란 미의 형이상학적 또는 심리학적인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데소아르M. Dessoir와 우티츠E. Utitz 등이 그 주창자이다. 데소아르는 예술만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 즉 예술학을 미학에서 처음으로 독립시켜 거기에 일반 예술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미학과 병립시켰다. 그는 1906년에 《미학과 일반 예술학》을 저술하여 일반 예술학의 본질과 과제를 명확히 했으며 동시에 기관지 《미학과 일반 예술학 잡지》(1906~1943)를 간행했다. 랑게Julius Henrik Lange는 자연미와 예술미의 혼동으로부터 미와 선, 미와 진의 혼동이 생긴다며 예술을 분리하여 예술의 미만을 취급하는 예술학을 수립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일반 예술학을 논리적으로 깊이 있게 발전시킨 것은 우티츠이다. 그는 《일반 예술학의 기초》에서 예술의 본질 연구를 주제로 하여 일반 예술학을 체계화했다.
미학이 주로 미의 일반 법칙을 철학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라면, 예술학은 예술의 기원, 목적, 성립 조건, 기능, 발전 법칙, 창작, 감상의 법칙 등을 취급한다. 현대에는 일반 예술학의 입장은 후퇴했으나, 각개 예술을 실증적, 역사적, 또는 실험적으로 연구하는 소위 예술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예술 철학도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한편, 미학은 고래로 미의 형이상학적인 분석이며 그 중심을 이루어 온 것이 자연미 혹은 고전미였고, 근대의 미학에서 여러 가지 예술이 차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미학의 방법의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 때문에 곧 미학과 별개의 예술학 개념이 요구되어야 할 것인지의 문제에는 회의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오너먼트

오너먼트 ornament(영)

→ 장식

오달리스크

오달리스크 odalisque(프)

‘방’을 의미하는 터키어의 ‘오다’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는 터키 황제 술탄의 옆방에서 봉사하는 여자, 즉 할렘의 여자를 의미한다. 19세기 초 오리엔탈리즘의 주요 테마의 하나로 서양 회화에 등장했고 근대 나체화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이미 카를로 반 로 등의 엑조티슴적인 회화에 사르타나(술탄의 소실)나 오달리스크가 그려졌으나, 이를 불후의 테마로 만든 작가는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이다. 그는 1814년과 1819년에 살롱에 출품한 <그랑 오달리스크>(루브르 미술관)를 비롯하여 여러 점의 오달리스크를 제작했다. 또한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1841~1919),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등이 동일한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오대 미술

오대 미술 五代美術

오대(五代, 907~960)는 당唐의 멸망으로부터 송宋 건국까지 10세기 전반 약 반세기의 시기. 오대라는 명칭은 중국의 북동쪽에 도읍을 두었던 다섯 개의 왕실인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의 5왕조를 말한다.
건축: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건물은 많다. 하북성河北省 정정현正定縣 현성 안의 현문묘縣文廟 대성전大成殿이나 개원사開元寺, 산서성山西省 평수현의 천태암, 예성현 북쪽의 오룡왕묘五龍王廟, 감숙성甘肅省 돈황의 막고굴 제196굴 앞면에 첨가된 랑(廊) 등은 당대(唐代) 말기나 오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오대의 건축이라고 확실하게 여겨지는 것은 화북 이북의 북방형 계통의 〈대운사大雲寺 대불전大佛殿〉(후진 천복 5년, 940), 〈진국사鎭國寺 대전大殿〉(후한 천회 7년, 964년)과 같은 건축으로 당의 양식에 가까우나 다소 차이가 있다. 양자강 유역의 남방형으로 묘실 안의 작은 모형 정도가 있다. 전탑은 팔각 다층탑이 일반적이고, 소주蘇州 호구虎丘의 운암사雲巖寺(오월 현덕 6년, 959),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의 중흥사中興寺 등이 있다. 석탑으로는 남경南京 섭산攝山의 〈서하사棲霞寺 팔각오첨 사리탑八角五檐舍利塔〉이라 부르는 다각 다층탑도 주목된다. 철탑으로는 사각칠층인 광주廣州의 광효사光孝寺의 동서 두 탑이 있다.
조각:일반적으로 화북은 꽤 오랫동안 당의 전통양식을 따랐음에 비해 강남은 송 양식의 기반을 형성했다. 항주杭州에 도읍을 정한 오월吳越은 서호西湖 부근에 영은사靈隱寺의 석탑, 비래봉毘萊峰, 연하동煙霞洞, 석옥동石玉洞 등의 석굴을 남겼다. 남당의 서하사 사리탑* 기단의 석가팔상도釋迦八相圖 부조*는 그 대표작이다. 사천성四川省 서북부 마애불감의 광원철불애, 파중 마애석굴, 통강 천불암 등에 오대에서 송대 초기의 조상이 많고, 도암부의 대족보정마애에도 오대의 조상이 보인다. 그 밖의 목조의 보살상, 철불도 많다.
회화:인물화*를 보면, 양자강에서 활동하던 관휴貫休(쿠완시어우, ?~912)는 과장된 선으로 선(禪)의 경지에 이른 스님들을 주로 그렸다. 그의 그림은 원칙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일품(逸品)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경南京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화풍이 싹트고 있었는데, 당의 황혼기 예술로 평가되고 있는 주문구周文矩(자오 윈지)의 인물화가 대표적이다.
이공린李公麟(리꽁린, 1040~1106)은 백묘화*법(白描畵法)으로 말이나 도석인물화에 능하였는데 그의 필선은 인물화가들의 모델이 되어 후대 명대(明代)에 까지 지속되었다. 산수화가로는 형호荊浩(싱 하오), 이성李成(리 츠엉), 관동寬董(꾸 완통), 범관范寬(환 쿠완) 등이 있는데, 이들이 활동하였던 10세기는 중국의 고전적 산수화*가 절정에 달했다고 할 수 있는 시기였으며, 광대한 산수화 예술의 이상을 수립하였다. 또한 이들의 산수화는 감상자로 하여금 산수화에 들어가 있듯이 압도적으로 사실감을 주어야 한다는 북송北宋 산수화 이념으로 연결되었다.
10세기 초반에는 남경에서 동원董源(똥 위엔), 거연巨然(쥐 르안)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산수화는 윤곽선이 둥글고 필법이 유연하고 자유스럽다. 이들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중국 산수화에 처음으로 순수한 서정시의 요소가 나타난 점이다. 화조화*에서는 오대, 북송 초기에 촉蜀의 황전黃筌(후앙 취앤), 남당南唐에 서희徐熙(쉬 시)가 유명하였다. 섬세하고 선명한 색깔로 여러 번 덧칠을 해서 그리는 혁신적 방법을 창안하였던 황전의 그림은 다분히 장식적이어서 궁정 화가들간에 유행하게 되었다. 반면 서희는 꽃이나 잎을 수묵담채(水墨淡彩)와 선염법(線染法)을 써서 매끄럽게 그렸는데, 필묵을 자유롭게 이용한 측면에서 문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오르가니슴

오르가니슴 Organisme(프)

→ 유기주의

오르피슴

오르피슴 Orphisme(프)

오르픽 큐비즘(orphic cubism)이라고도 한다. 들로네Robert Delaunay(1885~1941), 쿠프카František Kupka(1871~1957)등을 중심으로 하는, 색채성이 풍부한 입체주의*의 한 분야에 붙여진 명칭. 오르페우스에서 연유한 명칭으로, 시인이자 비평가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8)가 1910~1914년경의 들로네 작품에 나타난 큐비즘(입체주의)의 새로운 전개를 보고 명명한 것이다.
입체주의 초기의 엄격한 구성을 이어받으면서도 미래파의 다이내미즘을 포괄하여 원색을 시적, 음악적으로 구사하는 화풍을 지녔다. 본래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나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를 중심으로 하는 정통 입체주의는 대상의 분석과 화면의 재구성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색채보다 오히려 형태의 조합에 의한 구성*을 중시했지만, 이에 대하여 들로네나 쿠프카는 인상주의*의 보색*이론을 발전시켜 스펙트럼*의 모든 색채를 화면에 끌어들여, 음악적인 리듬에 바탕을 둔 다채로운 화면 구성을 추구하였다.
입체주의의 열성적인 옹호자였던 아폴리네르는 1912년, 베를린의 시트룸 화랑에서 열린 들로네의 개인전에 초대되어 강연을 했는데, 여기서 그는 오르피슴을 시적 음악적 원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 규정하고, 고대 그리스의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빌려 오르피슴이라는 명칭을 제안하였다.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색채 표현은 구성주의*, 신조형주의와 함께 훗날 추상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르피슴에 해당되는 작가는 뒤샹 형제와 들로네, 라 프레네이Roger de la Fresnaye, 쿠프카 등이 있고, 레제Fernand Léger(1881~1955), 샤갈Marc Chagall(1887~1985), 메칭거Jean Metzinger(1883~1956), 피카비아Francis Picabia 등도 한때 이러한 경향을 보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