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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례노동

월례노동 月例勞動
Labours of the Months(영)

인간이 한 해 동안 전념해야 할 일들을 그린 그림 또는 조각*의 통칭. 1년을 12개월로 나누어 각 달마다 그에 어울리는 노동과 풍경을 연속적으로 재현한다. 일반적으로 그 달에 해당하는 별자리인 12궁의 기호(Zodiac)가 함께 표시된다. 주로 중세 고딕 성당의 정문 주위에 조각되며,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발견된다. 또한 기도서*(Book of Hours)에 실린 달력이나 도판 필사본*에도 삽화형태로 삽입된다. 이같은 월례노동의 12달 장면 그림을 ‘사계노동(四季勞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월주요

월주요 越州窯 yue-zhou-yao(중)

절강성浙江省의 상우上虞, 여요余姚, 영파寧波 등지에 있는 도요지(陶窯址). 그 지역이 옛 월주越州에 속하므로 월주요라 부른다. 동한대(東漢代)부터 남송대(南宋代)까지 청자* 제작지로 유명하다. 초기의 월주요에서 생산된 원시청자를 소위 ‘고월자(古越磁)’라 하는데, 회유도(灰釉陶)에서 발전된 것이다. 이는 장석(長石)과 같은 규산 물질을 재에 첨가하여 만들어낸 고화도 유약을 바른 것으로, 유약에 포함된 적은 양의 철분으로 인하여 청록색의 색조가 생긴다. 유약이 두껍고 매끈하게 용해되어 회유도에서 자기의 단계로 다가서는 과정의 것으로서, 주로 당대(唐代) 이전까지 월주요의 덕청德淸과 구엄九嚴의 가마군에서 제작된 청자*를 일컫는다.
중당(中唐)기부터 북송대까지 가장 번성했는데, 이 때 도자기의 유색이 맑고 영롱해서 ‘유빙(類冰)’ ‘유옥(類玉)’이라 불렀다. 또한 치밀한 태토와 유약 밑에 선조된 아름답고 섬세한 음양각의 장식, 그리고 참신한 기형으로 당시 극찬을 받았다. 월주요의 도자기는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까지 일찍부터 수출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위구르 미술

위구르 미술 Uigur Art(영)

위구르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으로 돌궐突厥과 함께 몽골을 그 근거지로 삼았다. 8세기 중반 돌궐을 멸망시키고 건국하여, 안록산安祿山의 난(755~757)때 당唐을 지원하여 이를 평정했던 일로 당에 대해서는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840년경 내란 등으로 일시 붕괴되었지만 일부는 천산天山 방면으로 옮겨가서 그 후 고창高昌을 빼앗아 왕국을 건설하고 정착생활에 들어갔는데 곧 서방으로 그 세력을 떨쳐서 마침내 서역전체를 수중에 넣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원래 고유의 문화를 갖고 있지 못했고 동서문화와 접촉하면서도 그것을 수용하지 못했는데, 서역에 정주하게 되자 고창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게 되었다.
위구르는 예부터 마니교도였지만 불교,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拜火敎)도 신봉하였고,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경전들도 일부 발견된 바 있다. 고창의 마니교 사원 자리에서는 마니상과 신도들을 그린 벽화*, 그리고 삽화가 들어있는 마니교 경전* 등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마니교도들이 특유의 흰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베제클릭 석굴은 위구르인이 세운 불교사찰로서는 최대의 것으로, 당회화의 표현에 경직된 선을 써서 독특하게 양식화시킨 점이 눈에 띈다.
위구르 문자로 된 봉헌문(奉獻文)이 있는 제9호 굴사(窟寺)의 〈서원도誓願圖〉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 벽화에 그려진 공양인상*(供養人像)이나 고창 옛 절터에서 출토된 번회(幡繪)의 공양인상 등은 위구르인의 복장을 잘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회화양식으로서는 당나라의 지방화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위진•남북조시대 미술

위진•남북조시대 미술 魏晉•南北朝時代美術

대략 3~6세기의 중국 미술. 220년 후한後漢이 멸망하자 황하黃河 중류 지역에서 조조의 위魏(220~265)와 양자강 하류 지역에서 손권의 오吳(222~280), 사천 지방에서 유비의 촉한蜀漢(221~263)등 3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265년에 찬탈하여 즉위하였던 위는 중국을 재통일하여 진(西晉, 221~263)이라 개칭하였다. 바로 이 시기를 위진(魏晋)시기라 한다. 반세기 이후 흉노가 낙양洛陽을 점령한 뒤 2만여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황제를 포로로 삼은 뒤 다시 장안長安으로 가서 약탈을 하자 진은 강남으로 후퇴하여 남경南京에 도읍하였다. 그 이후는 동진(東晉, 317~502)이라고 하며 이 뒤를 이은 유송劉宋(420~479), 남제南齊(479~502), 양梁(502~557), 진陳(557~589)의 한민족 왕조를 남조(南朝)라고 한다.
한편 화북에서는 4세기를 통해 이민족인 흉노匈奴, 강羌, 선비鮮卑 등의 소국이 흥망을 거듭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거쳐, 선비족의 탁발拓跋이 세운 북위北魏(386~535)가 화북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북위는 현재의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효문제가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시도하여 5세기 말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들 화북의 이민족 왕조인 북조와 화남의 한인 왕조를 일괄하여 남북조시대라고 일컫는다.
또한 위진과 남조를 합쳐서 육조(六朝)시대라고도 한다. 위진시대에는 유학(儒學)이 쇠퇴하고 대신 노장 사상에 기본을 둔 은일적(隱逸的)인 사조가 만연하고 도교가 신봉되었다. 그리고 새로 수용된 외래 종교인 불교가 한편에서 신앙되고 있었으며, 귀족층 사이에는 시서화를 만들고 감상하는 예술적인 풍조가 싹텄다. 북조에서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신앙하여 국가 차원의 사탑이나 석굴이 축조되었다. 또한 서방으로 통하는 돈황* 등의 요충지에서는 서역풍과 중국풍이 혼합된 불교미술*이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건축:위의 조조가 세운 현재의 하북성 임장현의 업鄴은 동서 7리, 남북 5리의 도성이 건축되었다, 업은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에서 북조에 이르기까지 지리적 요충지로 쟁탈의 중심지가 되었고 도시계획은 후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조의 수도 건강健康(현 南京)은 옛 낙양성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궁성은 현양궁顯陽宮이다. 중앙에는 왕이 정사(政事)를 보는 정전(正殿)이 있고, 정전의 양측면에는 왕이 연회를 베푸는 용도 등으로 사용한 동서이당(東西二堂)이 있다.
조각:오호십육국시대 부터는 일찌감치 불교를 적극 수용하여 많은 불교 사찰이 건립되고 불상*도 활발히 조성되었다. 이때의 명문*이 있는 중요한 상인 후조後趙 건무 4년(338) 명의 〈금동불좌상〉(미국 샌프란시스코 드영미술관 소장)은 간다라*풍이 중국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위 시대에는 군주와 부처의 일치를 설파했던 국가 불교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는데, 화평(和平, 460~466) 초부터 수도 평성 부근에 운강석굴*이 개착되었다.
이 석굴에서 담요曇曜에 의해 조영된 제16동에서 제20동에 이르는 서방 5굴에는 수십미터의 거대한 불상이 힘이 가득한 체구와 살찌고 풍만한 얼굴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5세기말 제5, 6동 등의 불상은 양감을 잃고 평면적으로 섬세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효문제의 한화정책에 따라 이루어진 태화 18년(494)의 낙양천도 이후 개착된 용문석굴*은 운강과 비교하면 불감*의 깊이가 얕고 불상의 조형은 벽면의 공간을 거의 차지하고 있다. 불상들은 정면관을 중시하여 보다 단정하며, 마른 몸,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예리한 편이다. 용문석굴과 40km 떨어진 곳에 공현석굴*이 있다. 다섯개의 대형굴과 두 구의 마주보는 마애대상(磨崖大像)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현석굴의 상들은 다른 북위 조각에서 볼 수 없는 우아하고 활달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영희 3년(534) 북위는 서위와 동위로 나뉘어지고 각기 장안과 업에 도읍하였다. 하남河南의 이동(以東) 양식은 동위로 이어지며 천평(534~537) 양식을 형성한다. 이 시기의 상들은 머리가 약간 작고 부분적으로 환조미를 보이고 광배*가 화려하고 정교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한편 서위대에는 동위대에 비해 현존 유품이 적은데, 서안 초당사草堂寺 등 서위시기의 상들은 옷주름을 다루는 방법이 부드럽고 중후한 모습이다.
회화:동진의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6~407)는 연면한 가는 필선들로 그림을 그렸는데, 원소근대(遠小近大), 원담근농(遠淡近濃)에 따른 시각현상에 주목하였다. 장승요張僧繇(장 성야오)는 색채의 바림으로 입체감을 표현한 요철법*(凹凸法)으로 도석인물화*를 그렸다. 화론으로는 고개지의 《논화論畵》, 종병宗炳(쫑 빙)의 《화산수서畵山水序》, 왕미王微(우앙 웨이)의 《서화敍畵》, 사혁謝赫(시에 허)의 《고화품록古畵品錄》, 요최姚最(야오 츠웨이)의 《속화품續畵品》 등이 있다.
서예:위진시대는 진秦, 한漢의 전서*, 예서*에서 서사체*의 행서*, 초서*로 바뀌어졌으며 해서*가 성립되었다. 남조의 귀족들 사이에서는 행초체가 세련되어 동지의 왕희지王羲之(우앙 후에이즈)와 왕헌지王獻之(우앙 시앤즈)의 필체가 뛰어났다. 초기 해서의 전형은 북량北凉의 지세제일(持世第一)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여초呂超의 묘지*(墓誌)는 해서체가 세련되어 가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공예:화북에서는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공예의 영향이 보이며, 4세기의 요녕성遼寧省 북표현北漂縣의 선비묘鮮卑墓에는 유리그릇과 누금세공*의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계통의 것들은 한반도의 삼국시대 고분과 일본의 고분들에서도 출토되어 흥미롭다. 산서성 대동大同 남쪽의 북위 유적터에는 포도 당초문*이나 서양풍의 인물이 부조되어 있는 금은제 그릇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서방영향은 남조에서도 파악되고 있다. 도자기에서 먼저 용*(俑)을 보면, 한대(漢代)의 명기류(名器類) 등은 쇠퇴하였지만 인물용(人物俑)중에는 고개지의 인물처럼 우아한 자태의 작품이 발굴되고 있으며 마용(馬俑) 역시 우아하고 풍부한 장식을 보이고 있다. 육조시대의 요지는 북중국에서는 아직 발견된 바가 없으나 양자강 하류 지방에서는 다수 발견되고 있다. 강남의 도요지에서 만들어진 청자* 계통의 도자기가 3~4세기로 편년(編年)되는 남경南京의 고분에서 발굴된 바 있으며, 항주杭州 부근의 덕청요에서는 짙은 색의 흑유를 바른 도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위치

위치 位置

동양 회화의 용어. 이른바 ‘위치를 조절한다(經營位置)’는 것은 그림의 구도를 잡을 때 적합하게 배치하고, 교묘한 구상을 독자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청대(淸代)의 왕욱王昱(우앙 위)은 《동장론화東莊論畵》에서, 위치를 정한다는 것은 “음양, 향배(向背), 종횡(縱橫), 기복(起伏), 개합(開合), 쇄결(鎖結), 회포(回抱), 구탁(句托), 과접(過接), 영대(映帶)가 모름지기 변화막측하면서도 펼쳐지고 말리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위태천

위태천 韋駄天 Kārttikeya(범)

인도 서사시의 시기(기원전 600~서기 200년)에 성립한 천신(天神)으로, 가네샤*와 함께 시바*(혹은 아그니)의 아들이라고 한다. 2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이후 지위가 올라, 신군(神軍)을 지휘하여 마군(魔軍)을 퇴치하는 군신(軍神)으로 제석의 지위를 능가하게 되었다. 북인도에서 스칸다Skanda, 쿠마라Kumara라고 부르며, 남인도에서는 서브라마야Subramaya라고도 불린다. 한역하면 ‘塞建陀’ 혹은 ‘違陀’이며, ‘위태천(韋駄天)’ ‘위장군(韋將軍)’ ‘위태보살(韋駄菩薩)’이라고 부르며, 조선시대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인도의 힌두신화에서 육면십이비(六面十二臂)로 표현되고 창이나 그 밖의 무기를 쥐고 공작새를 타고 다닌다.
《도선율사감통록道宣律師感通錄》에서 위태천은 남방증장천왕의 8장군 중의 한 명이자 32장군의 우두머리이며,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 출가인을 보호하고 불법을 보호하는 임무를 띠었다. 또한 여래입멸 후에 첩질귀가 돌연히 여래의 어금니를 훔쳐 달아나자 위태천이 되찾아오는데, 이후 탑의 도굴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남송대(南宋代) 이후 사경을 수호하는 천신으로 나오고, 원, 명대(元明代)에는 천왕전에 반드시 모셔진다. 형상은 새깃털장식이 있는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있으며, 합장한 팔 위에 보봉(寶奉)이나 칼 혹은 금강저*를 가로질러 놓는 모습으로 중국에 들어와서 한화(漢化)된 형상이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의 목판화*인 1286년 〈소자본묘법연화경小字本妙法蓮花經〉등에서 사경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으로 등장하며, 조선시대 신중탱화에서 무장상들을 이끄는 대장격으로 나타난다.

유 卣

→ ‘이기’ 참조

유겐트슈틸

유겐트슈틸 Jugendstil(독)

‘청춘 양식’이라는 뜻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에서의 아르 누보* 운동 양식과 경향을 가리키는 명칭. 이 명칭은 1896년부터 뮌헨에서 발행되고 있던 미술 잡지 《유겐트Jugend》에서 유래한 것으로, 3~4년 후 그래픽 디자인으로부터 양식 전체의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종래 공예의 모방적 경향에 대한 반동이라 할 수 있다. 유겐트슈틸은 식물적 요소-꽃, 잎 등을 주로 하여 곡선의 리드미컬한 패턴과 변화에 의해 추상화, 양식화되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의 아르 누보에 비하여 중후한 양식이 되었지만, 이 같은 평면성에 대한 신감각과 디자인*의 의지는 현대 미술 탄생의 한 원천이 되었다.
그 선구자는 벨기에의 건축가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900년 바이마르 공예학교장이 됨)로, 그의 폴크 방크 박물관(1902) 설계가 독일의 공예계와 건축계에 준 자극은 컸다. 그 밖에 리에메르 슈미트, 베렌스Peter Behrens(1868~1940), 베른하르트 판코크Bernhard Pankok, 브루노 파울Bruno Paul, 오토 에크만Otto Eckmann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유기적 건축

유기적 건축 有機的建築
Organic Architecture(영)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의 건축개념으로서, 자연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특성이 건물의 개별적인 요구에 따라서 자연과 흡사하게 성장하는 것과 같은 건축 형식을 일컫는다. 이 개념은 자연 형태의 모방과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 않다. 라이트의 건축철학의 진수는 “건축 문제의 내면적 형상은 항상 그 자체 속에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그가 말한 바와 같이 건축문제에 심오한 통찰력을 갖게 하는 인식인데, 이 말은 건축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유도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라이트가 새로 만든 개념인 ‘유기적 건축’은 “모든 선입견과 적절함과 부적절함 및 단지 외관만을 위한 법칙과는 구별되는 각 개인을 위한 각 개인의 건축”을 말하며, 이와 같은 건축적인 전제에서 라이트는 1909년 이전에 주택들을 설계하였고 그것은 이와 유사한 방향을 추구하였던 유럽 건축가들의 표본이 되었다.

유기주의

유기주의 有機主義
organisme(프)

건축이나 조각*, 회화*, 디자인* 등에서 기능적 혹은 기하학적 경향에 대해 유기적 생명감을 중시하는 경향을 뜻한다. ‘유기적’이라는 비유적 표현은 이미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가 페루치Baldassare Peruzzi(1481~1536)의 <빌라 파르네시아>를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탄생된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평가했듯이 르네상스*시대에 유행했다. 근대에 와서는 미국의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가 유기적 건축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말하는 유기적 건축은 국제건축 양식이나 기능주의 건축에 비해 자연, 생물, 인간에게 보다 밀접하게 조화, 융합된 성격과 형태를 갖춘 건축이라는 의미이다. 산업주의, 혹은 경제주의 또는 기계론적인 근대주의에 바탕한 기술 편중의 건축 양식에 대해서, 보다 풍부한 예술성, 사상성, 자연 재료의 사용, 환경과의 조화를 건축의 기본으로 간주한다.
CIAM(근대건축국제회의)*을 중심으로 한 분석적인 기능주의의 교리에 심하게 대립한 1930년대의 라이트 등은 《유기적인 건축을 지향하여》를 저술해 이것을 지지하고,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대주의 건축의 대립 개념으로서 자주 쓰인다. 20세기 비평 용어로서 ‘유기적’이란 명백하게 정의된 의미는 아니지만, 예술 작품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생생하고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진 조화로운 전체임을 주장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