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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층 주식

중층 주식 重層柱式
colossal order(영)

하나의 원주*, 대주* 또는 편개주가 건물의 2층 또는 그 이상의 층에까지 걸쳐 있는 주식*. 건물의 기념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지각적 추상

지각적 추상 知覺的抽象 perceptual abstraction(영)

→ 옵 아트

지구라트

지구라트 ziggurat(아카드)

산꼭대기나 고지(高地)를 뜻하는 아시리아어 지쿠라투(ziqquratu)에서 유래. 지구라트는 다른 말로 성탑(聖塔), 단탑(段塔)이라고도 한다. 고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서 진흙 벽돌로 세운 피라미드형 탑으로 신전의 기부(基部)를 이룬다. 하늘에 있는 신들과 지상의 인간들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초기부터 지표보다 높게 설치하였으며 후대에 올수록 차차 높아지게 되었다. 정상부는 ‘하얀 집’이라 하여 신상을 모셔 놓은 성소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고대에서 이와 필적할 규모의 건축물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밖에 없는데, 피라미드가 직선상의 통로를 갖는데 비해 지구라트는 지그재그의 곡절 통로를 가지고 있다. 수메르 시대 초기에 처음 신전의 기단(基壇)에서 발달하였는데 계단식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지구라트를 휘돌면서 점점 올라가는 형식도 있다. 이렇게 오르게 되면 길이 그대로 눈에 드러난다. 원래는 각 도시에 있었으나 거의가 무너져 버려 원형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우르의 지구라트인데, 저변(底邊)이 62.5×43m이다. 특히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은 바빌론의 지구라트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나

지나 Jina(범)

‘승리자, 승리의’라는 뜻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말한다. 자이나교*에서는 시조인 마하비라Mahāvīra나 24명의 티르탕카라tīrthankara를 가리킨다. 자이나교의 상(像)은 결가부좌한 자세와 팔과 다리를 똑바로 편 직립 자세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불상*과 비슷한 자세이지만 머리를 깎고 옷을 입지 않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표현되므로 불상과 구별할 수 있다.
또한 각 티르탕카라는 특정한 지물*을 갖고 있어 개별 상들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그 중 제작된 예가 많은 상으로는 리샤바나타(황소), 네미나타(소라), 파르슈바나타(뱀), 마하비라(사자)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5명의 지나가 있으며 이들은 각각 5개의 방위를 의미하는 부처라고 해석된다. 즉 동쪽은 아촉불Aksobhya, 남쪽은 보생불Ratnasambhava, 서쪽은 아미타불*Amitābha, 북쪽은 불공성취불Amoghasiddhi, 중앙은 비로자나불*Vairocana이 그것이다.

지두화

지두화 指頭畵

붓 대신 손끝 혹은 손톱에 먹물을 묻혀 그리는 그림. ‘지화(指畵)’ 또는 ‘지묵(指墨)’이라고도 한다. 당唐나라(618~906) 때의 장조張操(즈앙 차오)가 시작하였다고 하나, 근세의 지두화는 청나라 고기패高其佩(까오 치페이, 1672~1734)가 양식화시킨 것이다. 고기패의 종손인 고병高秉(까오 삥)이 《지두화설指頭畵說》을 썼는데, 지두화 제작의 여러 면을 알려주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화가 최북崔北의 산수화*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와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도석화*에서 지두화 기법을 볼 수 있다.

지묵

지묵 指墨

→ 지두화

지물

지물 持物

부처나 보살, 천왕 등이 들고 있는 물건. 지물을 가지고 맺는 인상(印相), 즉 ‘계인(契印)’이라고도 한다. 그들의 권능이나 자비, 스스로의 깨달음(自內證)과 다짐(本誓),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람(本願)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지물에 따라 불상의 명칭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여래 가운데 약사불*은 약합(藥盒)을 들고 있으며, 관음보살*은 중생의 고통이나 목마름을 달래는 정병이나 연꽃, 지장보살*은 지옥문을 여는 석장과 어둠을 밝히는 명주를 들고 있다. 천부에서 범천*은 불자(拂子), 제석천*은 금강저*(金剛杵), 다문천은 보탑(寶塔)을 들고 있다. 이 밖에도 법구, 악기, 무기, 경책, 경권 등 종류가 다양하다.

지방주의

지방주의 地方主義
Regionalism(영)

①건축사에서 그로피우스Walter Grophius(1883~1969)에 의해 주도된 국제주의가 획일적, 추상적 스타일을 지향하자 그 반동으로 일어난 각 국가, 민족의 전통, 자연 조건 등을 중요시하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이러한 운동은 특히 1930년대에 고조되었는데, 그로피우스를 추방한 나치 독일의 향토적 감정의 강조, 구성주의*에서 돌아선 구소련의 민족적 전통의 존중,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에 대항하여 생긴 남미(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르과이)의 전통적 공법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났다. 스스로의 전통을 착실히 굳힌 후에 새로운 가능성, 합리성을 목표로 한 건축 사상이지만, 근대 건축의 본래적인 기능적, 합리적 측면을 잃은 경우도 있다.
②미술사에서의 지방주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제2차세계대전 이전에 나타났고, 다른 하나는 그 이후에 등장한 것이다. 전자의 지방주의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활동했던 벤튼Thomas Hart Benton(1889~1974), 커리John Steuart Curry(1897~1946), 그랜트 우드Grant Wood(1892~1941) 등을 중심으로 한 중서부 여러 주(州)의 그룹을 가리킨다. 그들은 유럽의 추상예술을 퇴폐예술이라고 규정하고 자신의 눈을 미국의 지방적 풍물로 돌렸다.
이 당시의 지방주의 미술가들은 미국적 장면화가(American scene painters)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회화는 단순한 사실(寫實)에만 치중하지 않고 다양한 존재감이나 특이한 정감을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벤튼, 비치필드Charles Beachfield, 호퍼Edward Hopper(1882~1967), 와이어트Andrew Wyeth(1917~ )나 에스티스Richard Estes 등도 지방주의 작가로 취급되고 있다. 지방주의 미술가는 보수파로 간주되지만 이러한 견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으로서, 예를 들면 벤튼과 같은 경우는 미국 중서부의 생활상을 그린 풍자적인 회화에서 명백히 드러난 바와 같이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 의미의 지역주의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뉴욕이 국제적인 미술의 중심지로 성격화된 다음에 나타났다. 뉴욕이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면서 그 외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같은 지역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미술가들은 지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그러나 뉴욕화파*의 양식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미술가는 거주 지역에 상관없이 주류로 분류되었다).
지방주의는 때로는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제2차세계대전 이전의 지방주의 미술가들의 ‘화파’와 달리 후대의 지방주의에서는 철학보다는 지리적인 요소가 작용했다. 뉴욕은 현재까지도 국제적인 미술의 중심지로 남아 있지만 그 주도권은 여러 요인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미술가와 평론가들이 거주하기에는 엄청나게 비싼 뉴욕의 부동산 가격,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는 《뉴 아트 이그재미너The New Art Examiner》 같은 지역미술잡지의 등장, 1980년대에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한 미국미술가들을 많이 배출한 캘리포니아 미술학교 같은 미술학교의 등장 등은 모두 지역 분산화를 촉진시키고 있는 요인들이다.
사실상,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현 시점의 상황으로 미루어보건대, 물리적인 중심지와 주변 지역 같은 개념은 곧 타당성을 잃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붕창

지붕창 dormer window(영)

주로 영국 중세의 주택 건물에서 볼 수 있는 환기(換氣)를 위한 소탑. 지붕 경사면에 돌출한 작은 지붕이 있는 작은 창을 말한다. 석판이나 널빤지로 만들어진다. 통풍이 되도록 여닫을 수 있고 눈과 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측면에 셔터와 같은 격자(格子)가 있다. 영어의 도머(dormer, 프랑스의 고어(古語))창은 통상 침실로 쓰이는 고미다락방의 채광을 위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지오테스키

지오테스키 Giotteschi(이)

지오토파(派)라는 의미. 14세기에 르네상스의 새로운 회화 유파가 생겨날 때까지 이탈리아 각지에서 형성된 지오토Giotto(1266~1337) 양식의 후계자 혹은 그 모방자를 말한다. 유명한 지오테스키는 가디Taddeo Gaddi, 다디Bernardo Daddi등이 있다. 이들은 지오토로부터 정방형의 인물상들과 널찍한 배경 처리법 등을 배웠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와 표정을 연구했다.
지오토의 가장 충실한 후계자로는 특히 마소 디 반코Maso di Banco를 꼽을 수 있다. 가디는 빛과 깊이를 탁월하게 표현하는 지오토의 방법을 더욱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기 위해 세부에 집착하는 것은 지오토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다디는 밝은 색조, 우아한 장식, 그리고 즐거움이 넘치는 듯한 분위기의 연출에 주력했다. 가디의 설화에 대한 선호, 다디의 화려한 장식에의 선호 등은 14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오르카냐Orcagna의 경향 속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오르카냐도 때로는 지오테스키로 분류되지만 그것은 단지 그가 당시에는 이미 관례화되어 있던 지오토적인 인체 유형을 따르고 있다는 의미에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