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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브

네이브 nave(영)

→ 신랑

노르만 양식

노르만 양식 Norman Style(영)

노르만은 원래 ‘북방인’이라는 뜻. 8세기말부터 스칸디나비아 방면에서 해상으로 남하한 바이킹에 서구 사람들이 붙인 이름. 노르만 양식이라는 용어는 미술사상 다음 세경우에 사용된다. ①노르만인이 911년 서북 프랑스에 정착한 이후(노르망디 공국), 11세기 이후에 전개된 로마네스크 미술*의 한 양식. 주미에주의 노틀담 성당을 전형으로 하는 건축에 그 특색이 있고, 특히 계상랑(階上廊)과 높은 창을 갖는 삼층 구조, 목조 천장을 받치는 격벽(隔璧)과 아치* 등이 주목된다. ②노르망디 공의 잉글랜드 정복(1066)과 함께 노르만 양식이 브리튼 섬으로 건너가서 발전한 양식으로 앵글로 노르만 양식이라고도 한다. 그 전형의 하나인 다람 대성당은 주미에주의 흐름을 계승하며 일찍이(1104년 이전) 교차 늑재 궁륭*을 실현했다. ③일부 노르만 인이 더욱 남하하여 지중해의 시칠리아 섬에 정착하고 11세기 이후 시칠리아 왕 로게리우스 2세 시대에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최전성기에 이른 미술 양식으로, 비잔틴과 이슬람 미술의 접촉으로 이룬 건축 장식 양식에 특색이 있고, 몬레아레 대성당이 대표적이다.

노홍초당도

노홍초당도 盧鴻草堂圖

고사(高士) 산수화*의 한 화제(畵題). 노홍盧鴻(루 홍)은 당唐나라 때에 숭산嵩山에 은거했던 고사이다. 이름을 ‘홍일鴻一’이라고도 한다. 개원 연간(713~141)에 여러 번 황제에게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숭산에 영극寧極이라는 초당을 지어 은일했다. 그는 박학하고 서화에 능하였다고 한다. 그림은 산수와 수석(樹石)에 뛰어났는데, 평원(平遠)의 아취가 있고 청아한 기운이 있다 하여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와 비견되었다. 숭산의 초당은 관영(官營)으로 5백명의 학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초당의 모습을 스스로 그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림은 <초당십지도草堂十志圖>라 하여 작은 초가집에 개울을 그리고 한두 사람의 인물이나 자연의 정경을 그리는 것으로 구성된다. 초당, 도경대(倒景台), 월관(樾館), 침연정(枕煙庭), 운금종(雲錦淙), 사선등(斯仙磴), 척번기(滌煩磯), 멱취정(冪翠庭), 동원실(洞元室), 금벽담(金碧潭) 등 10경으로 되어 있다. 모사본이 대북臺北 고궁박물원과 오사카大阪 시립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녹각법

녹각법 鹿角法

나무를 그리는 방법 가운데 하나. 사슴뿔 같은 가지를 가진 낙엽 광엽수를 그리는 방법이다. 가을 숲을 나타내는 데 적합하며, 주로 농묵을 써서 그린다. 봄 경치에는 옅은 녹색의 작은 점을 찍어서 나타내고, 늦가을의 숲은 붉은 색의 작은 점을 찍어서 붉은 잎사귀를 나타낸다.

논커미션드 포스터

논커미션드 포스터 non-commissioned poster(영)

주문에 따르지 않고 그리는 형식의 포스터*. 프랑스의 사비냑Raymond Savignac이 제2차세계대전 직후의 1950년에 파리에서 이러한 명칭의 전시회를 연 다음부터 유행하게 되었다. 사비냑은 이런 식으로 포스터를 제작함으로써 작가가 포스터 디자인에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농민회화

농민회화 農民繪畵
peasant painting(영)

1966년 중국의 문화혁명 이후 농민들이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 중국의 사회적, 기술적 진보를 묘사하고, 농사일, 건설 작업, 정치, 집회, 마을 재건 및 일상사를 묘사한 작품들이 많다. 훈련받지 못한 농민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기술적으로 비교적 숙달되어 있고, 양식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즉 밝고 평면적이며 상징적인 색채들, 정확한 윤곽선으로 그려진 힘있는 드로잉, 전면의 균일한 장식적 효과, 중심이 없는 구성 등이 그 특징이다.
농민 회화는 서구의 만화책 방식의 예술과 전통적인 중국화를 잘 혼합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고 있다. 농민회화의 사실주의는 현실을 순수하게 외연적으로 언급하기 위해 수사학과 함축성을 없애버리는 사실주의*의 서구적 변형이 아니라, 수사학적 태도를 받아들이고 리얼리티로서 사회적 관련성을 내포하고 있는 사실주의이다. 즉 색채는 사회적, 상징적, 장식적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나, 결코 색채만을 위해 분리되지는 않으며 항상 이념적인 목적에 종속된다.

누각산수

누각산수 樓閣山水

동양화에서 산수와 높은 누각, 정자 등을 조합하여 구성하는 산수화. 그 제작은 북송北宋 무렵부터 활발해진다. 곽희郭熙(구어 시)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따르면, 산수에 누각이 있는 것은 그 곳이 명승지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누금세공

누금세공 鏤金細工 filigree(영)

얇은 금판 위에 작은 금 알갱이를 붙이면서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 이집트의 12왕조때 출현해서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등지에서 발달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대(漢代)에 성행하였다. 한반도에 전래된 누금세공법은 평양 석암리石巖里에서 출토된 〈대금구帶金具〉가 북방계 양식이고, 신라의 유물에서도 서역적이고 북방적인 요소가 보여 중앙아시아를 통한 북방 유목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금 알갱이를 만드는 방법은 얇은 금판을 잘라 가열하여 둥근 입자를 만들거나, 잘라낸 금판을 탄분 사이에 층을 이루며 끼워서 가열하기도 하며, 금사(金絲)를 ‘입불대’로 가열하여 잘라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금을 녹여서 작은 구멍이 있는 체 같은 것에 부으면서 찬물에 내려 식혀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만든 금 알갱이는 대개 용융온도가 낮은 금속가루나 붕사, 혹은 염화동을 사용하여 금판에 붙인다. 한반도의 누금세공법중 최고(最古)의 것은 평양의 석암리 9호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금제금구이고 특히 신라에서 크게 성행하였는데 귀고리, 팔찌 등의 장식에 많이 사용되었다.

누동화파

누동화파 婁東畵派

중국화 유파의 하나로 ‘태창파太倉派’라고도 불린다. 이 파의 대표자인 청대(淸代)의 산수화가 왕원기王原祁(우앙 위앤치, 1642~1715)는 조부 왕시민王時敏(우앙 스민, 1592~1680)의 가법(家法)을 계승하고 황공망黃公望(후앙 꽁왕, 1269~1454)의 기법을 모방하여 성조 강희 연간(聖祖 康熙, 1661~1722)에 명성이 높아져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 사촌 동생 왕욱王昱(우앙 위)과 조카 왕소王愫(우앙 쑤), 그리고 제자인 황정黃鼎(후앙 띵), 왕경명王敬銘(우앙 칭밍), 금영희金永熙(진 융시), 이위헌李爲憲(리 웨이시앤), 조배원曹培源(차오 페이위앤), 화곤華鯤(화 꾼), 온의溫儀(원 이), 당대唐岱(탕 따이) 등이 누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후로 증손자 왕신王宸(우앙 츠언), 사촌조카 왕삼석王三錫(우앙 싼스), 그리고 성대사盛大士(츠엉 따스), 황균黃均(후앙 쥔), 왕학호王學浩(우앙 쉬에하오) 등이 있다. 이 화파의 숭고보수(崇古保守) 화풍은 우산화파*와 영향을 주고 받았으며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누보 레알리슴

누보 레알리슴 Nouveau Réalisme(프)

1960년대 초에 당시 유럽과 미국의 지배적인 조류였던 추상표현주의*, 서정 추상*, 타시슴* 등 일련의 앵포르멜 미술*에 대응해서 일어난 운동. 누보 레알리슴은 공업제품의 단편이나 일상적인 오브제*를 거의 그대로 전시함으로써 ‘현실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새롭고 적극적인 방법을 추구했던 미술이다. ‘기계화되고 공업화되면 광고로 넘치는 우리들 현대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차용’하여 제시하는 것은 누보 레알리슴의 가장 중요한 원리이자 방법이다.
누보 레알리슴의 중심 인물은 비평가 레스타니Pierre Restany로서 그는 1960년 4월 밀라노 아폴리네르 화랑에서 제1차 선언을 발표하고 <현실의 새로운 조망적 접근>이라는 기치로 전시를 개최했다. 정식으로 ‘누보 레알리스트’로서 그룹이 결성된 것은 같은 해 11월 클랭Yves Klein(1928~1962)의 방에서였으며, 이어 그해 말에 파리에서 열린 제2회 전위미술제에서 작품 전시, 1961년 5월 파리 J화랑에서 제2회 전시 <다다보다 40도 위>를 개최하고 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그 주장을 보다 명확히 했다.
이 전시회에서 아르망Arman(1928~ )은 그림물감의 튜브나 진공관과 같은 대량생산의 공업제품을 집적(集積)한 작품을 출품하여 ‘현실의 직접적 제시’라는 방법을 구체화 시켰다. 스포에리Daniel Spoerri(1930~ )는 <타블로 피에지(함정의 회화)>라는 작품을 내놓았는데, 이는 음식물이 남아 있는 식기류를 쟁반 위에 그대로 고착시켜 음식을 먹고 난 그 시각과 상태를 현상 자체로 제시한 것이었다. 팅겔리Jean Tinguelly(1925~1991)는 폐물들을 이용한 작품을 하였고 세자르César(1921~ )는 자동차를 입방체로 압축시킨 조각을 보여줌으로써 소재의 특이성과 기교를 아주 내버린다는 점에서 누보 레알리슴의 미학을 잘 드러내었다. 빌르글레Jacques de la Villeglé(1926~ )와 앵스Raymond Hains는 벽에서 떼어내거나 찢어진 포스터 및 광고로 작업했다.
누보 레알리슴 운동의 최초 그룹 참가자는 레스타니, 아르망, 뒤프렌느François Dufrêne, 앵스, 클랭Yves Klein(1928~1962), 레이스Martial Raysse, 스포에리, 팅겔리, 빌르글레 등 10명이었으나 곧 세자르, 생팔Niki de Saint Phalle(1930~ ), 크리스토Christo Javacheff(1935~ )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세 개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이념적인 통일성을 보이긴 하였으나, 구체적인 개개 작품간의 공통적 특성은 명확하지 않다.
1960년의 선언에서는 ‘실재를 자각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 방식’ 만을 요구하였으며, 각 작가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다양하게 작업했다. 이들의 결속은 현대적 자연을 제시하려는 필요에 의한 전략적인 것이었으므로 조직력은 강하지 않아서, 의견의 대립으로 곧 클랭, 앵스, 레이스 등이 그룹의 해산을 선언했고 1962년 클랭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동요되다가 1963년에 운동으로서의 누보 레알리슴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