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1 2 7

두르가

두르가 Durgā(범)

‘접근하기 어려운 자’라는 뜻을 가진 힌두교 여신을 말한다. 두르가를 모시는 개별적인 사원이 건립될 정도로 높이 숭배되고 있다. 두르가 여신의 특징은 시바*신의 배우자로서의 어머니라는 측면과 전사로서의 영웅적인 측면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악마(아수라*)인 마히샤Mahisa를 물리친 이야기가 유명하며 이 때의 두르가는 마히샤수라마르디라고 불린다. 굽타 시대인 401년에 조성된 우다야기리Udayagiri 석굴의 제6굴에는 마히샤수라마르디의 이야기가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두타초

두타초 頭陀草

조선후기 문인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문집. 전체 18책으로 1,650여편의 시(詩)와 서(書) 등이 실려 있다. 이 중 중국 회화나 고려, 조선시대 회화에 대한 안목있는 비평이 많아 주목된다. 소개되어 있는 중국 화가는 당대(唐代)의 왕유王維(우앙 웨이, 699~759), 송대(宋代)의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 조백구趙伯駒(자오 뿌어쥐), 유송년劉松年(리우 쏭니앤), 원대(元代)의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 전선錢選(치앤 쉬엔, 1235~1301년 이후), 명대(明代)의 심주沈周(선 저우, 1427~1509), 동기창董其昌(똥 치츠앙, 1555~1636), 청대(淸代)의 맹영광孟永光(멍 융구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고려나 조선시대 화가에 대한 언급은 공민왕恭愍王, 이징李澄(1581~1645), 이덕익李德益, 윤두서尹斗緖, 정선鄭敾(1676~1759) 등이 있는데, 화가와 그림에 대한 간략한 평가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화론서와 서화를 두루 섭렵했던 이하곤은 학식이 높은 선비화가들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고 사의*(寫意)를 중시하였던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중시하는 것과 더불어 그리는 대상을 닮게 그리는 형사(形似)도 중요시하는 독특한 회화관을 전개하여 당시로서는 진취적인 회화관을 제기하였다. 이는 당대(當代)의 화가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이나 말그림, 노승도(老僧圖) 등에 대해 사실성이 높은 훌륭한 그림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아울러 정선의 진경산수*(眞景山水) 그림이 중국식의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시의(詩意)로서 그려진 개성있는 그림이라는 품평을 함으로써 선구적 비평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회화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대상’이라는 성리학적인 회화관에서 한걸음 나아가 회화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두폭 제단화

두폭 제단화 diptych(영)

나무나 상아로 만들어진 패널* 두 개가 마치 책과 같은 형태로 접히도록 고안된 패널화 한 쌍. 이러한 형태의 패널화는 로마 시대의 필기용 서판(書板)에서 유래되었는데, 그것은 움푹 들어간 서판의 밀랍 표면을 보호하기 위해 닫혀질 수 있게 만들어졌다. 상아로 된 두폭 제단화는 4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로마 집정관이 공직취임을 비롯한 중요한 시기에 황제와 원로원을 알현할 때 썼다. 이러한 집정관용 두폭화의 내부 표면에는 집정관의 이미지와 그를 축하하는 장면들이 새겨졌다. 6세기에 집정관직이 폐지되면서 집정관용 두폭화는 사라졌다.
이후 두폭화 형식은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주로 목재로 패널을 만들게 되었으며, 내부에는 이미지를 그려넣어 개인의 신앙심을 표현하기 위한 이동용 제단화로 사용하였다. 이 때 패널의 한 쪽에는 예수나 성모자의 이미지 또는 문중(門中) 성인의 이미지를 그렸으며 다른 한 쪽에는 신앙심에 젖어있는 제단화 주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바깥쪽 표면은 종종 개인적인 상징이나 문장(紋章)으로 장식되었다.

→ ‘제단화’ 참조.

드라이 포인트

드라이 포인트 dry point(영)

동판화* 기법의 하나. 닦아낸 동판 위에 매우 예리한 기구, 일반적으로 다이아몬드 포인트나 루비 포인트로 그림을 직접 새기는 판화방법. 그 선은 조각칼로 파낸 선이나 부식액을 쓰는 에칭*의 선과는 다르다. 즉 이 경우는 판화가 침의 첨단(尖端)에 의해 파뒤집혀져서 오목선의 양쪽 혹은 한 쪽에 깔쭉함, 즉 버(burr)가 생기는데, 이것이 드라이 포인트의 특색이다. 이 버는 깎아내는 기구로 떼어낼 수 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특수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 그대로 두는 경우도 있다. 드라이 포인트는 선으로 된 단순한 디자인에서부터 매우 발전된 색조 구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또한 그것은 자체가 단독적으로 쓰이기 보다는 에칭과 같은 다른 과정들과 결합되어 이용되어 왔는데, 빠르고 직접적으로 제작할 수 있으므로 악센트를 주거나 마무리를 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다.

드리핑

드리핑 dripping(영)

붓이나 주걱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칠하거나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물감을 캔버스 위에 흘리거나 붓든지 또는 튀겨서 제작하는 회화기법. 미국의 액션 페인팅* 작가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이 20세기 초에 에른스트Max Ernst(1891~1976) 등이 사용했던 것을 보다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전통적 매체인 포름*보다는 그린다고 하는 행위의 에너지에서 제작의 의미를 추구하기 위해 드리핑 기법을 사용했다. 즉 안료를 직접 캔버스에다 흘림으로써 얻어지는 우연적인 표현 효과를 획득하였다. 따라서 이 기법은 오토마티슴*과 흡사한 점이 많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형식적 요소의 개발이라는 점과 잠재 의식을 탐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간 다르다.

드바라바티 미술

드바라바티 미술 Dvāravatī Art(영)

타이 중부 메남강 하류 지역에 있었던 드바라바티 왕조의 미술을 말한다. 몬Mon족이 세운 것으로 보이는 이 왕조는 6세기부터 알려졌으나 역사는 분명하지 않다. 유물은 나콘 파톰, 폰 듀크, 우통, 코라트 등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11세기 초엽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에 병합되어 멸망했다. 11세기 이후의 앙코르* 시대 불상* 조각에 영향을 미쳤다. 현존하는 드바라바티의 미술은 불상 조각이 대부분이며 인도 굽타 시대*, 특히 사르나트* 지역의 영향이 강하다. 그러나 후기 드바라바티상에서는 평면적인 얼굴, 활모양의 둥근 눈썹, 튀어나온 눈, 두터운 입술 등 몬족의 얼굴을 그대로 옮긴 듯한 토착적인 조형이 나타난다. 그 밖에 많은 석조 법륜(法輪, 불타의 설법을 상징), 환조로 된 사슴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드바라바티 미술의 특색 중 하나이다. 인도의 팔라* 양식으로 불상을 그린 테라코타* 봉헌판(奉獻板)은 대체로 소승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건축물은 거의 기초만 남아 있으나 란푼에 있는 와트 구쿠트의 5층탑에는 많은 불감*(佛龕)이 조영되어 있다.

드비제니 운동

드비제니 운동 Dvijenie(러)

1962년 모스크바에서 설립된 미술가 그룹. 원래는 ‘운동(movement)’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이 그룹의 이론적 근거는 구축주의*와 절대주의*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그룹의 회원들에 의해 창조된 순수한 기하학적 구성은 그 대부분이 일차원적 스크린과 움직이는 옵 아트*의 효과를 특징으로 하는 것으로 축의 균형 원리에 근거를 둔 것이다. 1963년 드비제니의 미술가들은 삼차원적인 움직이는 대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그것은 빛의 투사, 전자음악, 무언극, 발레, 낭송 등의 프로그램을 갖춘 움직이는 표현에 의해 보강되었다. 누스베르크Lev Nusberg가 이 그룹의 이론적인 지도자이며, 그의 궁극적 목표는 관람자를 행동적 참여자로서 예술 창조과정에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키브르 극장>은 이러한 실험적 시도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디 악치온

디 악치온 Die Aktion(독)

1910년에 창간된 《폭풍Der Sturm》과 경쟁하여 1911년 펨페르트Franz Pfemfert에 의하여 베를린Berlin에서 발간된 자유 정치와 문학을 위한 주간지. 공공연하게 좌익임을 드러내는 이 잡지는 빠른 속도로 가장 참여적인 전위 작가들의 토론의 광장이 되었다. 평화주의적이고 반군국주의적인 이 잡지는 1914년 8월 15일 검열을 당하는 사건을 맞게 된다.
표현주의* 시와 적극적 행동주의 문학의 보급 기관이었던 이 잡지는 정기적으로 파이닝거Lyonel Feininger(1871~1956), 마르크Franz Marc(1880~1916), 마이드너Luwig Meidner(1884~1966), 펠릭스뮐러Conrad Felixmüller,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1884~1976) 등에게 도움을 청하여 유지되었다. 이 잡지는 1918년 11월 혁명 당시 그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고, 1920년 이후 반주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 독단적 태도에 빠지게 되면서, 1932년 출판을 중단하게 되었다.

디 에이트

디 에이트 The Eight(영)

20세기 초반 뉴욕에서 활약한 8인의 화가 그룹. 멤버는 헨리Robert Henri(1865~1929), 럭스George Luks(1867~1933), 로슨Ernest Lawson(1873~1939), 글래큰스William James Glackens(1870~1938), 쉰Everett Shinn(1876~1953), 프렌더가스트Maurice Prendergast(1859~1924), 데이비스Arthur Bowen Davies(1862~1928) 등이다. 1807년 럭스, 글래큰스, 쉰이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Design> 연례전에서 출품을 거절당하자 그들에 동조하여 아카데미즘*에 반항한 화가들이 다음 해 맥베스 화랑에서 그룹전을 개최한 데서 유래한다.
그들은 도시의 정경을 때로는 오염된 부분까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 때문에 ‘애시 캔 스쿨*’ 혹은 ‘뉴욕 리얼리스트’라고 불렸다. 애시 캔 스쿨이라는 단어는 바Alfred H. Barr(1902~1981)와 캐힐Holger Cahill이 공저한 《현대미국미술Art in America in Modern Times》(1934)에서 사용되었다. 디 에이트의 중심 인물인 헨리 및 럭스, 글래큰스, 쉰은 사실주의적, 프렌더가스트와 로슨은 인상주의*적, 데이비스는 상징주의*적이었다. 따라서 작풍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 ‘애시캔 스쿨’ 참조

디비조니슴

디비조니슴 divisionnisme(프)

→ 분할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