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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

묘지 墓誌 mu-chih(중)

죽은 사람의 본관과 관위(官位), 행적 등을 돌이나 전(塼)에 새겨 무덤 앞에 묻은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 흔히 ‘광지(壙誌)’라고도 한다. 묘 앞에 세우는 묘비와는 구별된다. 《서경잡기》에 ‘전한前漢의 두자춘杜子春이 임종때 글을 지어 돌에 새기고, 무덤 앞에 파묻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전한때부터 시작된 듯하다. 후한後漢 원평 원년(106)의 〈가무중의 처 마강(價武仲妻馬姜)묘지〉, 서진의 〈유도(劉韜) 묘지〉 등이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묘지의 시초인지는 확실치 않다. 위진(魏晋)시대에는 금비령(禁碑令)에 의해 묘비 대신 성행하였고,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이르러 묘지명의 체제가 정비되었다.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묘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는 공주 무녕왕릉武寧王陵의 것인데, 523년에 죽은 무녕왕의 능에서 나온 이 묘지는 지신(地神)으로부터 묘터를 산다는 토지 매매 계약서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묘지가 많이 나타나는 시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인데, 묘지의 내용이 피장자의 가계나 신분 등 개인신상에 대한 것을 알려주어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무갈 회화

무갈 회화 Mughal painting(영)

인도 무갈 제국 시대(1526~1857)에 발달한 무갈 양식의 독특한 채색 세밀화(細密畵)로 아크바르대제Akbar(재위 1556~1605)가 궁중에 화원(畵院)을 두고 화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성립되었다. 아크바르의 아버지인 후마윤Humāyūn이 망명지였던 페르시아에서 돌아올 때 두 명의 페르시아인 화가들을 함께 데려왔다. 이들을 중심으로 아크바르는 인도와 페르시아의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무갈 양식을 창안했다. 인도의 이전 회화들은 비사실적이고 종교적이었으나 무갈 회화는 사실적이고 세속적, 현실적인 주제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투시화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바사완Basawan, 미스킨Miskin, 만수르Mansur, 마노하르Manohar, 아불 하산Abu’l Hasan 등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크바르 시대의 작품 중 아크바르의 일대기를 그린 〈아크바르 나마Akbar Nama〉(1585~1590)는 높은 지평선과 원근감, 얼굴에 미묘한 음영을 넣는 무갈 회화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15세기말부터 인도로 들어 온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무갈 회화는 르네상스 시대 유럽 회화의 영향도 받게 되었는데, 1595년 미스킨이 그린 〈부정한 아내〉가 그 좋은 예이다. 자항기르Jahāngīr 시대(1605~1627)에는 식물이나 새를 매우 정밀하게 그린 세밀화*도 등장했으나 이 시대의 특징적인 장르*는 황제의 초상화*이다. 측면광으로 표현된 황제의 머리 부분에 후광*을 그려 황제를 신격화하였다. 이러한 회화 경향은 다음의 샤 자한Shāh Jahān 시대(1627~1658)에도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무갈 제국이 쇠락하면서부터 많은 황실 화가들은 라자스탄*이나 파하리* 지방의 소국으로 옮겨가서 작업을 계속하였다.

무관심성

무관심성 無關心性
isinterestedness(영) Interesselosigkeit(독)

미학*상의 용어. 무관심적(無關心的)이라는 용어는 ‘자기의 이익 추구가 어떤 일의 동기가 되지 않은’이라는 뜻으로,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윤리학적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뜻이 미*에 관한 논의 속에 도입되면서 당시에 대두되었던 ‘상상력*’ ‘천재’ ‘취미*’ 등의 개념과 함께 근대 미학의 성립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술 감상에 있어 어떠한 지적, 도덕적 전제 조건도 필요치 않다는 무관심성의 이론은 칸트Immanuel Kant,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를 통해 발전하면서 미학이 철학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고 아울러 예술의 자율성이 확립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상상력의 즐거움’에 해당되는 것이 전통적인 미뿐만 아니라 숭고*, 우미* 등 여러 가지인 것으로 판명되어 미적 범주*의 확대를 가져왔듯이 무관심성의 이론은 미 이론의 주관화를 초래하였다. 즉 미에 관한 객관적인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주관적인 태도에 따라 미가 파악될 수 있다는 주장은 18세기의 취미철학(趣味哲學)이나 19세기의 미적 태도론(美的態度論)을 포함하는 모든 미학 이론의 전제가 되었으며 현대 미학에서도 심리학적 측면에서 그것이 허구(虛構)라는 주장이 있으나 여전히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무근수

무근수 無根樹

미법산수*에서의 수목법(樹木法). 보통 수목은 작은 관목 이외엔 줄기를 윤곽선으로 나타내고, 뿌리는 대지나 암석에 단단히 내려진 형태로 그려지게 마련이지만, 미법산수에서는 뿌리부분을 안개로 가리면서 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목계牧谿(무 시)의 작품으로 전하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같은 작품에서 그 기법을 볼 수 있다. 무근수란 말은 본래 미우인米友仁(미 이어우르언)의 그림 속 나무에 대해서 친구들이 비웃는 말로 썼던 것인데, 공현龔賢(꽁 시앤)의 《화결畵訣》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같은 책은 세 그루의 나무를 붙여 그릴 때에는 한 그루만 뿌리를 보이게 하며, 다른 두 그루는 무근(無根)으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늬

무늬 pattern(영)

공예품이나 또는 건축물의 표면에 장식 기타의 목적으로 만드는 형상(形象)으로 ‘문양(文樣)’이라고도 한다. 생리심리학적으로 인간은 본래 공백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사람의 눈은 항상 무언가 의지할 곳을 찾고 그것을 발견함으로써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떤 것의 표면에 시각적으로 이끌리는 것이 있을 경우, 사람은 그 대상의 관조(觀照)를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이 무늬는 그것이 새겨진 대상이나 형태 자체를 강조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무늬에는 재료 자체에 주어진 경우와 인공적으로 가공된 무늬가 있다. 작위적인 무늬에는 점과 선으로 구성된 기하학 무늬와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추상적 무늬, 동물이나 식물 등 자연계의 구체적인 대상을 주제로 삼은 구상 무늬가 있다. 특히 추상 무늬의 경우에는 주술적 혹은 신앙적 내용을 담고 그 신비한 힘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려는 것이 많은데, 고대 중국 등 동양에 이런 종류의 추상 무늬가 자주 발견된다. 그리고 무늬의 형식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모티브*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형식, 회화처럼 사생풍으로 그린 자유로운 형식, 기독교의 십자가나 태극 문양 같은 상징 형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렇듯 무늬는 동서양과 시대를 초월하여 건축, 회화, 조각 뿐만 아니라 공예, 직물, 의상 등 실용적인 차원에까지 다방면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무대미술

무대미술 舞臺美術 stage art(영)

연극, 오페라, 무용 등의 상연예술에 있어서 회화적, 조소적인 수단에 의해 시각적 효과를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미술. 보통 무대장치 특히 배경화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가면(마스크), 메이크업, 의상, 조명, 회전무대나 무대 밑에서 밀어올리는 무대장치 등의 무대기구, 또한 더 나아가 극장건축까지도 포함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시학》은 비극적인 구성요소의 하나에 외관(오프시스)을 들면서, 소포클레스Sophokles가 무대에 ‘배경화(scenography)’를 갖추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외관은 이와같이 예부터 무대예술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독자적인 표현영역을 담당해왔다. 더구나 르네상스 시기에 원근법*이 고안되자 이것을 응용하여 배경 안에 깊숙한 공간의 일루전*이 만들어져 무대장치의 의의가 새로이 인식되었다. 17세기의 오페라에서 스펙터클한 효과가 특히 중시된 데서, 무대미술가가 전문직으로 확립되고 동시에 그 내부에서 장치, 소도구, 의상 등 구실의 세분화가 일어났다. 19세기 후반에 사실주의*가 대두하자 현실의 사실(私室)을 단면(斷面)한 것 같은 상자형 장치(box set)가 나타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의 악극을 위한 추상적, 입체적 무대를 만든 아피아Adolphe Appia 등이 무대미술의 새 영역을 개척했다. 한편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나 달리Salvador Dali(1904~1989) 등의 화가가 무대미술을 담당한 사례도 많다.

무드

무드 mood(영)

→ 기분

무로마치시대 미술

무로마치시대 미술 室町時代美術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병란(兵亂)부터 아시카가바쿠후足利幕府의 멸망에 이르는 2세기 반 정도의 기간에 성행한 미술. 이 시대의 미술을 특징짓는 것은, 전대에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문화(禪宗文化)가 무로마치바쿠후의 비호 아래 소위 ‘오산문화五山文化’로서 선림(禪林)과 무가(武家)에 보급되고 정착되어 미술의 성격을 결정지은 것이다.
건축:선사(禪寺)의 승방(僧房) 건축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신덴즈쿠리(寢殿式)에서 마루 선반, 서원을 겸한 쇼인즈쿠리(書院式) 건축방향으로 이행하였다. 정원은 무소 고쿠시夢窓國師(1275~1351)가 사이호오지西芳寺 등에서 몇 개 안되는 수석으로 자연감을 나타낸 뛰어난 작품을 보여주었다.
조각:많은 양이 제작되었지만, 사실적으로 표현된 선종사원의 친조(頂相;고승의 초상) 이외에는 좋은 작품이 없다. 그리고 노가쿠(能樂)의 유행과 더불어 노멘(能面)의 분야에 우수한 예가 전한다.
회화:수묵화*를 주체로 하는 송원화(宋元畵) 양식이 주류가 되어, 초기의 모쿠안 레아안默庵靈淵, 가오可翁, 중기의 조세츠女拙, 덴쇼 슈분天章周文 등 많은 수묵화가들을 배출했다. 특히 세슈토요雪舟等楊(1420~1506)는 수묵화를 회화로서의 본격적인 골격을 형성했다는 점이 평가된다. 한편 중앙화단에서는 가노 모토노부狩野元信(1476~1559)가 선종의 속박을 떠난 일본화와 중국화의 통합으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내 다음 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에마키*(繪卷)는 〈복부초지福富草紙〉 등과 같은 옛날 이야기식의 화첩계(畵帖系) 작품 중에서 생동감 있는 표현을 볼 수 있다. 또한 무로마치 말기에는 〈낙중낙외도洛中洛外圖〉 등 풍속묘사에 새로운 움직임도 보여 다음 대의 풍속화*의 발달을 예고하고 있다.
공예:칠공(漆工)의 분야에서는 송宋, 원元의 회화나 공예품의 영향이 의장에 나타났다. 금공(金工)에는 다도(茶道)의 발달에 따라 차솥이 발달했다. 염직에서는 명의 염직기술의 도입에 따라 화려한 노가쿠(能樂) 복장의 의장이 만들어지는 등 차츰 선종의 속박에서 벗어나 밝은 현세적 감각이 표현되어 다음의 모모야마미술*(桃山美術)에 이어졌다.

무문토기문화 미술

무문토기문화 미술 無文土器文化美術

→ 한국 청동기시대 미술

무브망 드 라르 사크레

무브망 드 라르 사크레 Le Mouvement de L’art Sacré(프)

드니Maurice Denis(1870~1943)에 의해 1920년경에 시작된 새로운 기독교 미술 운동. 나비파*의 장식기법을 쓰고 또한 프레스코*에 의해 종교적 제재를 취급하는 일종의 종교미술이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셰레Jules Chéret, 고디사르Emile Gaudissard 등이 있다. 건축에 있어서는 성요한협회, 라쉬르의 활동이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의 서구 각국에 천주교의 융성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지금은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