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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

비엔날레 biennale(이)

이탈리아어로 ‘2년마다’라는 뜻으로 미술 분야에서 2년마다 열리는 전시 행사를 일컫는다. 세계 각지에서 여러 종류의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역사가 길며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것은 베니스 비엔날레이다. 1895년에 창설된 베니스 비엔날레는 2년마다 6월에서 9월까지 여름 동안 27개국의 독립 전시관과 가설 전시관을 설치하여 세계 각국의 최신 미술 경향을 소개하는 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5년 제45회 전시부터 독립된 국가관을 개관하여 참가하고 있다.
그 밖에도 휘트니 비엔날레(미국), 상파울루 비엔날레(브라질), 리옹 비엔날레(프랑스), 이스탄불 비엔날레(터키), 하바나 비엔날레(쿠바), 요하네스버그 비엔날레(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1995년에 처음 열린 광주 비엔날레가 개최되고 있다. 이같은 국제 비엔날레 행사들은 실험성과 지역성, 젊은 미술가를 육성하려는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최근에는 상업성과 국가 경제와 문화 이미지의 측면에서 접근하려는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비잔틴 미술

비잔틴 미술 Byzantine Art(영)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330년부터 시작되어 터키의 오토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1453년까지 동방 기독교 사회에서 전개된 미술. 비잔틴은 콘스탄티노플의 옛이름 ‘비잔티온Byzantion’에서 나온 말로서 16세기 역사가들은 동로마 제국의 문화나 미술을 가리키는데 사용하였다. 비잔틴 미술은 고대 로마 미술* 및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에 고대 아시아, 더 나아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이 가미된 것이다.
비잔틴 제국은 장장 11세기 동안 존속하면서 처음에는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7세기 이후 점차 영토를 잃어갔다. 그러나 비잔틴 미술은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그 예술적 전통이 지속되었으며 러시아 등 슬라브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비잔틴 미술은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절(527~565)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던 때에 절정에 달하였는데 로마 제국을 재건하여 비잔틴의 영광과 위대성을 찬미하는데 역점이 주어졌다.
두번째 황금기는 마케도니아의 여러 황제들이 통치하던 시기(867~1057)였다.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고 불렸던 당시에는 이슬람 예술의 소재가 풍미하였으며 고대의 유물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수용되었다. 11세기 중엽부터 서유럽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갔고 비잔틴에 대한 유럽 측의 공격도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미술은 쇠퇴하기는 커녕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으며, 바로 이 세번째 전성기가 비잔틴 르네상스 시기이다. 이 무렵 비잔틴의 국력은 최악에 달하였지만 예술은 오히려 베네치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러시아에까지 확산되었다.
비잔틴 미술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강한 종교적 색채이다. 공예와 모자이크*화, 세속적인 그림 등 비종교적인 미술도 있었지만, 이는 기독교 미술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성경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과 자유보다는 정통 교리와 교회의 강령에 충실하였다는 점에서 비잔틴 미술은 신학적이었다.
즉 비잔틴 미술은 신학자들의 사상과 종교회의의 결정 사항들을 신자들에게 미술의 언어로써 가르치고 유포하기 위한 사명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비잔틴 미술은 익명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자연히 미술가의 역할은 사제의 그것과 유사하게 되었으며 교훈보다는 예배적인 기능이 더 강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비잔틴의 신학적인 미술은 본질적으로 중세 서양의 교훈적인 미술과는 차이가 있다.
비잔틴 미술 중 건축의 유적은 콘스탄티노플에만 남아 있으며 고대의 시공법을 채용한 절충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교회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4~6세기에는 거대한 바실리카*가 그리스와 로마 지역권에서 제작되었다. 6세기 이후 비잔틴 건축은 벽돌과 둥근 천장, 돔*을 사용하였으며 천장은 궁륭* 양식이 선호되었다. 성당 건축은 종교의식을 위한 기능적인 요소와 신의 집이라는 강한 상징성을 동시에 보유하였다. 바실리카식 구조에서 애프스*의 반원개(半圓蓋)와 집중식 구조에서의 원개는 신의 좌(座)로서 성스러운 천계를 상징한다. 콘스탄티노플에 소재한 소피아 성당은 당시 비잔틴 제국의 기술과 재력을 총결집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한편 건축을 장식하기 위하여 주두*나 원주*, 코니스* 등에는 평면적인 부조*가 조각되었다. 그러나 인물상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으며, 성수(聖樹), 사자, 기하학 무늬 등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문양 뿐이었다. 이에 비해 색채에 의한 벽면 장식은 성상(聖像)이 주를 이루며 예수나 성모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구도가 성당의 사방 벽면과 천장을 가득 채웠다. 소재로는 색유리를 사용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모자이크는 대형 기념물에 자주 사용되었고 프레스코화는 비잔틴 말기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비잔틴 미술에서 화려한 색채는 현세를 초월하는 비물질적인 영적 세계를 가시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비잔틴 미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성상(聖像)의 표현이 예배 대상으로 될 수 있느냐의 여부와 관련된 우상파괴 논쟁이었다. 성상을 부정하는 움직임은 특히 8~9세기 성상파괴주의* 시대에 절정에 달하였고 숱한 기념물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성상을 긍정할 때조차도 삼차원의 실제성 부여가 완강히 거부되었기 때문에 비잔틴 미술은 환조적인 성상 대신에 이콘의 발달을 보았던 것이다.
비잔틴의 도상은 고대 알렉산더 시대의 미술에서 차용하여 거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가하였다. 신자들을 교육하고 경전에 대한 시각적인 해설을 위해 신약과 구약의 내용을 묘사한 일련의 사본 삽화들이 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될 즈음 비잔틴 제국은 퇴조하고 있었지만 비잔틴 미술은 오히려 서유럽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도상과 더불어 그 양식도 자유분방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차차 변해 갔다.
한편 비잔틴의 공예는 제국의 궁정과 귀족들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하였다. 특히 상아로 제작된 인물상이 성당 장식품으로 유명했고, 금은 보석의 세공품과 칠보 제품도 애호되었다. 이외에도 모직물, 동방풍의 주단, 수예품은 비잔틴의 특산물로 손꼽혔다. 비잔틴 미술은 서구의 기독교 미술의 형성, 특히 건축과 도상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칸으로부터 슬라브 지역으로 퍼져나가 세르비아, 러시아 등지의 기독교 미술을 개화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비재현적

비재현적 非再現的
non-representational(영)

→ ‘추상미술’ 참조

비전

비전 vision(영)

예술의 창작 및 향수(享受)에 있어서 마음에 나타나는 환상적인 현상. 예술 특유의 창조적 상상에 의해서 고도의 직관성(直觀性)과 생동성(生動性)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현대 미학에서 크로체Benedetto Croce(1866~1952)는 본래의 예술 활동을 미적 비전으로 인정하고, 이를 외면화(外面化)하는 일이라든가 기교(技巧)의 의의를 경시하였다.
또한 단순하게 시각상의 환각(幻覺)이나 환영(幻影)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때에는 주관적인 시각이면서도 실물과 같은 실재감을 가지고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미적 비전은 고도의 직관성을 갖춘 환상적 형태로서 신비주의나 종교 등과 관련이 깊지만, 예술 체험에서도 중요한 개념이다.

비조시대 미술

비조시대 미술 飛鳥時代美術

→ 아스카시대 미술

비천

비천 飛天

천상에 사는 천인, 천녀 혹은 천(天). 천은 복수의 의미가 있으며, 보통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초인간적인 힘이 있고 자유롭게 날 수 있다. 보통 부처가 설법하거나 보살이 머무는 곳에서 허공을 날면서 꽃을 뿌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공양한다.
인도 미술*의 초기엔 남녀 한쌍이 날면서 산화공양(散華供養)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인도신화에서 이들 신은 하급의 신으로, 특히 여성신 즉 천녀는 아프사라사타(또는 데바타)라고 불렸다. 서양의 천사와는 달리 날개 없이 나는 모습이 인도 비천의 특색이다. 그 후 불교 미술*이나 힌두교 미술*에서도 비상하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신선같이 자유롭게 비상하는 모습으로, 천의(天衣)를 길게 펄럭이면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백제 무녕왕릉의 왕비두침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로 불상*의 광배*나 대좌*, 범종*. 사리구*와 같은 금속공예품 등에 장식문양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대표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상원사上院寺 동종〉(725)과 〈성덕대왕 신종〉의 비천상이 유명하다.

비판적 사실주의

비판적 사실주의 批判的寫實主義
Critical Realism(영)

자연주의*와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구별하여 고르키Maxim Gorky가 만들어낸 용어. 일반적으로 객관적 현실을 중시하고 그것을 충실히 묘사하려는 문학 경향을 말한다. 특히 비판적 사실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의 해악들을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문학 작품들에 대해 러시아 문학 비평가들이 수십년간 사용해 온 용어이다.
사실주의*가 구체적 현실성과 역사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면, 비판적 사실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 이면에 팽배해 있는 시민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대두하였다. 한편 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실주의의 비판적 태도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졸라Emile Zola(1840~1902)류의 자연주의와는 구별되며, 그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구분된다.
헝가리의 루카치Gyorg Lukács같은 마르크스주의 비평가는 비판적 사실주의를 러시아 혁명 이전의 상황에 적합한 양식으로 규정하였다. 혁명 이후에는 사회적 사실주의가 비판적 사실주의를 대신하였다.
시각 미술에 있어서 비판적 사실주의는 페트릭Wolfgang Petrick, 조르게Peter Sorge 등 일군의 독일 예술가에 의해 채택된 용어였다. 이들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소재를 택해 포토몽타주*를 만들어 현대 문화를 공격했다. 비판적 사실주의의 사상적 토대는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다양하고 자유로운 발전을 지향하는 휴머니즘과 민중 연대성이다. 따라서 인간성이 말살되는 비인간적인 현상들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고발, 비판하였다.
비판적 사실주의는 봉건적, 자본주의적 사회체계의 구조적 측면에 대한 생생하고 비판적인 묘사를 중시하기 때문에 추한 것과 비속한 것이 아름다움과 숭고함보다 강하게 표출된다. 또한 그로테스크*한 풍자와 아이러니 등을 미적 비판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비하라

비하라 vihāra(범)

불교 사원(가람*)에서 승려들이 수행하거나 생활하는 구역을 말하며 정사*(精舍)라고도 한다. 인도에서 나타난 불교의 석굴사원은 대개 스투파*를 안치한 차이티야*와 승려들이 머무는 비하라로 구성되어 있다.
초기 불교 시대의 출가한 수행자들은 명상에 알맞은 장소인 숲에서 생활했으나 우기(雨期) 동안에는 비를 피해 머무를 곳이 필요했다. 우안거(雨安居)가 시행되면서 점차 승려들은 일정한 장소에 정착했으며 따라서 많은 승려들을 수용하는 비하라가 나타났다.
기원전 1세기 초에 조영된 인도의 바자Bhājā석굴은 가장 오래된 비하라 석굴 중 하나이다. 보다 정교한 형식의 비하라 석굴은 가운데에 커다란 홀이 있고 문이 있는 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에 승려 개개인의 방들이 뚫려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하라 석굴은 불교도 뿐만 아니라 자이나교*에서도 사용했다.

비학

비학 碑學

비각(碑刻)의 원류, 시대, 양식, 탁본(拓本)의 진위와 글월내용 등을 연구하는 학문. 비각을 숭상하는 서파(書派)로 첩학*(帖學)의 상대적인 개념. 청대(淸代) 완원玩元(완 위앤)이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을 제기한 이래 포세신包世臣(빠오 스츠언), 강유위康有爲(캉 여우웨이)가 북비(北碑)를 제창하면서 그 유파가 형성되었다.

비헤이비어 아트

비헤이비어 아트 Behaviour Art(영)

→ 행동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