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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티미슴

앵티미슴 Intimisme(프)

‘친애하는, 친밀한’ 이라는 뜻의 형용사인 ‘앵팀므(intime)’에서 파생된 말. 일상적이고 신변의 정경과 가정 및 가족의 모습 등을 소재로 하여 가정적인 친밀함과 소박한 생활 감정을 표현하고, 그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화면에 담는 일종의 경향이다. 뷔야르Edouard Vuillard(1868~1940)와 보나르Pierre Bonnard가 대표적인 화가이며, 따라서 나비파*의 한 특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앵포르멜 미술

앵포르멜 미술 Art Informel(프)

‘앵포르멜’은 원래 부정형 또는 비정형의 뜻. 앵포르멜 미술은 제2차세계대전 후에 정형화되고 아카데미즘*화한 추상 특히 기하학적 추상*에 대해 반발하여 일어난 것으로서, 미리 계획된 구성을 거부하고 자발적이며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말한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상응하는 동시대 유럽 미술을 지칭하면서 시작된 말이고 서정추상*이나 타시슴*과도 거의 혼용되고 있으나, 사실상 유사한 성격의 미술들을 전부 포괄하여 일명 뜨거운 추상 또는 부정형의 추상 전체를 양식적으로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파리의 드루엥 화랑에서 열린 세 전시회를 통해 포트리에Jean Fautrier(1898~1964), 볼스Wols(1913~1951),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는 앵포르멜 미술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1945년에 발표된 포트리에의 <인질Otages>전, 1946년 뒤뷔페의 <오트 파트Haute Pâtes>전, 1947년 볼스의 두번째 개인전이 그것이다. 이들은 가혹한 전쟁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체험을 기반으로 억압된 인간의 극한적인 정신을 다루었다. 이들은 구상과 추상을 불문하고 기존의 회화 개념 및 소재의 틀을 깨고 삶의 실존적인 모습을 표출하고자 했으나 소수의 문학가 및 화가에게 인정받았을 뿐이었다.
앵포르멜의 이념이 구체화된 것은 비평가 타피에Michel Tapié에 의해서였다. 그는 1951년 니나 도세Nina Dausset 갤러리에서 <대립된 격정Véhémences confrontées>을 시작으로 앵포르멜 추상 운동을 본격화했다. 여기에는 프랑스의 마티유Georges Mathieu와 브리앙Camille Bryen, 독일의 볼스와 아르퉁Hans Hartung, 캐나다의 리오펠Jean-Paul Riopelle, 미국의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과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 등이 참가했다.
앵포르멜이란 명칭은 이듬해 6월 스튜디오 파케티Faccheti에서 열린 <앵포르멜이 의미하는 것Significant de l’informel>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전시회의 제목은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의 개념에서 따온 것으로 타피에는 ‘의미하는 것’과 ‘의미하지 않는 것’을 같은 위치에 놓고 비정형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아르 오트르Un Art Autre》(1952)라는 소책자에서 본래 앵포르멜의 근원적인 생명의 징후는 구상*, 비구상*을 부정하고 ‘생생한’ 포름*에 정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입체주의*와 기하학적 추상은 붕괴된 고전주의*의 ‘마지막 절규’에 지나지 않고, 초현실주의*도 낭만주의*의 문학적 변용으로 보아 역시 부정한다고 밝히면서, 가치 전도를 위해 반휴머니즘의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니체와 다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산으로 규정한 뒤, 이러한 일체의 미학적 권위의 파괴 위에 위상기하학, 집합론, 양자역학, 비교적(秘敎的) 기독교, 노장사상(老莊思想) 등을 끌어들여 앵포르멜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타피에는 앵포르멜 미술이 표현의 제스처*보다는 마티에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나 본래 유파나 이즘을 목표로 하지 않았던 만큼 작가들의 양식은 다양했으며, 미쇼Henri Michaux(1899~1984), 프란시스Sam Francis(1903~1970), 술라주Pierre Soulages(1919~ ), 토비Mark Tobey(1890~1976), 폰타나Lucio Fontana(1899~1968), 로스코Mark Rothko(1923~1994), 부리Pol Bury(1922~ ), 보르뒤아스Paul-Éile Borduas(1905~1960), 알레친스키Pierre Alechinsky, 타피에스Antoni Tàpies(1923~ ) 등 다채로운 구성원들을 끌어들여 전후 아방가르드* 미술 가운데 대표적인 미술사조를 완성하였다.

야마토에

야마토에 倭繪大和繪(일)

9세기 후반 헤이안(平安)시대 초기에 발생하여 12세기에서 13세기 초에 유행한 대표적 순수 일본 회화양식의 하나. 당시 중국의 그림을 지칭하는 카라에*(唐繪)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일본의 고유한 전통 양식이란 뜻에서 ‘야마토에(倭繪)’라고도 쓴다. 처음에는 헤이안 시대의 궁정과 주택의 담벽, 병풍 등에 그려진 장식적 벽화*만을 의미했으나 후에 의미가 넓어지고 잘못 전달되어 강렬한 색채의 장식적이고 세속적인 헤이안 시대 후기* 양식의 회화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장벽화*(障壁畵)로는 뵤도인平等院 호오도鳳凰堂 북문의 〈춘경산수도春景山水圖〉가, 일종의 삽화인 에마키*(繪卷)로는 《겐지모노가타리에마키源氏物語繪卷》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구도가 유연하고 색채가 강렬하고 장식적이어서 귀족적이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15세기 이후 도사파*土佐派의 화풍 속에서 반복되며 린파*琳派의 대작들과 우키요에*(浮世繪)로 계승, 발전하면서 현재까지 일본화의 중요한 성격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야만타카

야만타카 Yamāntaka(범)

인도의 베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야마를 정복한 밀교의 분노존상(忿怒尊像). 라마교에서는 검은 색 또는 붉은 색으로 커다란 칼과 해골을 들고 있다. 같은 유형으로는 야마리, 바주라바이라바 등이 있다. 야마리는 얼굴 하나에 어깨가 둘이고, 해골과 긴 막대기를 쥐고 있으며, 오른발에 시체를 밟고 있고, 그 아래에 소가 있는데, 압윰*형태를 취한 것이 많다. 바주라바이라바는 아홉 얼굴에 34개의 어깨, 6개의 다리에 얼굴은 암소이다. 검은 색의 나신 형상이며, 오른쪽 발 아래에 동물, 새, 힌두교의 신 등을 밟고, 손에는 큰 북, 해골, 큰 칼, 긴 막대 등을 쥐고 있다.

야수주의

야수주의 野獸主義
Fauvisme(프)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회화 운동으로, 이론적인 운동이라기보다는 색채를 강렬하게 추구한 화가들의 자연발생적인 그룹으로서 서로 다른 경향의 미술가들의 일시적인 결합이었다.
여기에 동참했던 미술가들은 대체로 모로Gustave Moreau(1826~1898)의 문하생들이었던 마르케Albert Marquet, 망갱Henri Charles Manguin,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카무엥Charles Camoin, 퓌이Jean Puy, 샤투파* 출신의 작가들인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k(1876~1958)와 드랭André Derain(1880~1954) 그리고 르 아브르Le Havre 출신의 프리츠Emile Otton Friez,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 뒤피Raoul Dufy의 세 부류로 구분되며 네덜란드의 반 동겐Kees van Dongen도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와 고갱Paul Gauguin(1904~1948), 세잔느Paul Cézanne(1839~1906)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야수주의’라는 명칭은 1905년 <가을 살롱전Salon d’Automne>에 출품된 마르케의 15세기 풍 청동조각에 대해 비평가 복셀Louis Vauxcelles이 “야수의 우리 속에 갇힌 도나텔로Donatello(1382~1466) 같다”라고 말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전시는 야수주의 동인들이 그들의 ‘다이나마이트 탄약통’을 폭발시킨 것으로서 색채만의 효과로 이루어진 공간 구성, 두드러짐도 명암도 없는 평평한 색조, 어둡고 두터운 윤곽선에 의한 형태의 단순화, 색채가 한정하는 대상이 불분명할 정도로 빨강과 녹색의 지배적인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색채에 대한 이들의 정열은 자연적 재현으로부터 색채를 독립시킨 것이었다. 이 운동은 1905년 가을 살롱전과 이듬해 앙데팡당전*에서 정점에 이르게 된다. 야수주의는 동인들에게 있어 서로 다른 양식의 발전 과정에서 거쳐갔던 일시적 단계였으며 1908년경부터 작가 자신들의 독자적인 방향으로 분산되면서 저절로 소멸되었다.

야슈티

야슈티 yasti(범)

불교 스투파*의 돔* 중심부에 박히는 기둥이며 동아시아에서는 찰주(刹柱)라고 한다.

→ ‘스투파’ 참조

야요이시대 미술

야요이시대 미술 彌生時代美術

→ 일본선사시대 미술

야차상

야차상 夜叉像

불교조각의 하나. 야차는 약샤*의 음역으로 ‘약차(藥叉)’ 또는 ‘열차(閱叉)’라고도 쓰며, 의역은 ‘첩질귀(捷疾鬼)’이다. 인도 신화 가운데 반신(半神)이라 할 수 있는 작은 신령. 힘세고 포악하며 날기도 한다. 불교 제재(題材) 가운데는 북왕천왕(北方天王) 비사문(毗沙門)의 친속이라고도 하고, 불교를 지키는 신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지괴(地怪)’ ‘지신(地神)’이라고 속칭하기도 하는데, 석굴 조각 가운데서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나타난다. 용문석굴* 봉선사奉先寺 대상감大像龕의 북쪽 벽면의 천왕(天王)의 발 아래에 있는 야차는 성난 눈을 부릅뜨고, 입술은 굳게 다물었으며, 괴상하게 생겼다. 대상감 남쪽 벽면의 천왕의 발 아래에 있는 야차는 벌거벗은 몸에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왔고, 힘껏 발버둥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두 야차와 천왕, 역사(力士)의 조각 수법은 모두 당대(唐代) 사실적인 불교 조각의 전형적인 것이다.

약사여래

약사여래 藥師如來
Bhaisaijyaguru-vaidūrya(범)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없애며 현세의 복락을 이루게 하는 부처. ‘약사유리광여래藥師琉璃光如來’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한다. 약사여래는 과거에 약왕(藥王)이었으며, 동방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에 살면서 중생의 고통을 소멸시키겠다는 12대원을 발하여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의왕(醫王)으로서 숭앙받았다.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에 따르면, 약사불이 머무는 동방 정유리세계는 아미타정토와 같고, 약사의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있고 12신장(十二神將)을 권속으로 거느린다고 하였다. 또한 손에는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나 원래는 보주(寶珠)를 쥐고 있었다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당唐나라 때부터 약사경변상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약사의 도상은 8세기경에 정형화되었다.
한국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가 《약사경藥師經》을 읽어 왕의 병을 고쳤고, 경덕왕대에는 경주 분황사에 거대한 약사불을 안치하였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라 7세기 중엽부터 약사불이 널리 숭앙되기 시작하여 8세기 중엽에는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한 약사도량(藥師道場)이 자주 열리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경주 백율사栢栗寺 금동약사불입상〉과 〈굴불사지掘佛寺址 동면 약사불좌상〉 등이 있다. 또한 약사여래도로서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보살로 한 <약사삼존도藥師三尊圖>, 12신장을 권속으로 거느린 <약사신중도藥師神衆圖>, 동방 정유리세계를 그린 <약사정토변상도藥師淨土變相圖> 등이 있다.

약샤

약샤 yaksa(범)

→ ‘야차상’ ‘약시’ ‘쿠베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