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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이슬람 미술

인도-이슬람 미술 Indo-Islamic Art(영)

8세기 말 아랍 계통의 이슬람교도들이 처음으로 인도의 신드 지방에 진출한 이후, 10세기 말부터 이슬람교도들의 인도 진출과 침입이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북인도 지역에 침입하여 인도의 종교 건축물과 신상*들을 파괴했다. 12세기 말 델리Delhi에 터키계 이슬람교도들의 술탄 왕조가 성립되어 인도에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건축물들이 등장한다. 델리의 쿠트브Qutb 부근에는 1200년경 세운 모스크mosque(이슬람교의 사원) 유지가 남아 있다. 힌두 사원*을 파괴한 후 그 석재를 이용하여 지었으므로 건물 기둥은 힌두 사원의 것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은 모스크 이외에도 궁성, 분묘 등 많은 건물을 세웠다. 이 건물들은 돔*과 뾰족 아치*, 미나렛*을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하며 표면은 식물문과 기하학적인 의장들로 장식하였다.
16세기 초 무갈 제국의 등장으로 이슬람교도의 인도 지배는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델리의 〈후마윤Humayun 무덤〉(1561~1570), 궁성인 〈아그라 포트Agra Fort〉(15세기 후반)와 알현전인 〈디완-이 카스Diwan-i Khas〉(1645년경), 아그라의 〈타지 마할Taj Mahal〉(1632~1638), 델리에 있는 사원인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1656년경) 등을 들 수 있다. 인도-이슬람 시대의 회화는 아크바르대제Akbar(재위 1556~1605)가 궁중에 화원을 두어 화가들을 적극 후원함으로써 무갈 회화*라는 양식*으로 활성화되었다.

→ ‘무갈 회화’ 참조

인도네시아 미술

인도네시아 미술 Indonesian Art(영)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 가운데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섬은 자바, 수마트라*, 발리섬이다. 이 지역은 동남아시아* 중에서도 비교적 일찍부터 인도 문화가 파급되었던 곳이다. 수마트라의 동쪽 해안 지역에서는 7세기 후반경 슈리비자야Śrivijaya 왕국이 출현했으나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자바에서는 이미 5세기 초에 힌두교 왕국이 번성했으며 동부 자바, 보루네오, 셀레베스의 해변에서는 남인도 내지 스리랑카*의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제 불상*이 발견되어 인도네시아에 인도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중요한 건축물과 조각*은 대부분 자바섬에 집중되어 있다.
중부 자바는 샤일렌드라Shailendra왕조(778~864)가 통치했는데, 대승 불교와 금강계 밀교를 믿었으므로 그와 관련된 미술이 발달하였다. 찬디 칼라산Candi Kalasan이나 찬디 멘두트Candi Mendut라고 하는 불교 사당 건축이 만들어졌고 유명한 보로부두르* 사원도 샤일렌드라 왕조 시대에 조영되었다. 또한 힌두교의 시바*, 비슈누*, 브라흐마*를 모신 찬디 라라 종그랑Candi Lara Jonggrang이라는 힌두교 사원*도 건축되었다.
중부 자바에서는 샤일렌드라 왕조 시대인 8~9세기에 인도-자바 미술의 황금기를 맞이한다. 불교와 힌두교를 혼합시킨 신앙에 기초한 중부 자바의 조형 활동은 10세기 이후 동부 자바로 계승된다. 13세기 이후에는 싱가사리*Singhasari 왕조(1222~1292)와 마자파히트 왕조가 동부 자바를 통치했는데 조형 활동도 활발했다. 그러나 15세기경 서인도에서 침입한 이슬람교도에 의해 자바 미술은 소멸된다. 그렇지만 발리섬에는 동부 자바에서 전해진 인도계 종교와 민속적으로 변모한 자바 미술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공예품으로는 자바나 수마트라의 크리스라는 검(劍), 자바 사라사sarasa라고 불리는 바틱batik(문양염文樣染) 등이 유명하다.

인도차이나 미술

인도차이나 미술 Indochinese art(영)

→‘동남아시아 미술’ 참조

인동문

인동문 忍冬文

→ 팔메트

인드라

인드라 Indra(범)

→ 제석천

인디펜던트 그룹

인디펜던트 그룹 Independent Group(영)

영국의 전위적인 미술 단체. 1952~1955년 테크놀로지, 커뮤니케이션, 대중 문화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런던의 아이시에이*의 멤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그룹이었고, 아이시에이의 부설단체로 출발했다. 따라서 이 그룹의 본래의 목적은 대중을 위해 아이시에이가 주최하는, 강연회의 주제와 연사를 결정하는 데 있었다. 단체전을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이 그룹은 비평가 알로웨이Laurens Alloway(1926~1990)가 이론가로서 활약했고, 존 맥헤일John McHale, 에두아르도 파올로치Eduardo Paolozzi(1924~ ), 프랭스 코델Frank Cordell, 앨리슨 스미슨Alison Smithson, 피터 스미슨Peter Smithson,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1922~ ) 등이 그 주요 멤버였다.
인디펜던트 그룹은 현대 도시 사회의 대중매체인 영화, 광고, 공상과학소설, 팝 음악 등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미국에서 일어난 상업주의는 영국 미술가들에게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는데, 특히 상품의 포장 디자인, 인간과 상표에 대한 새로운 규범 등이다. 이들의 아이디어는 결국 영국의 팝 아트*의 발단이 되었는데, 브리티시 팝(British pop)이란 말도 알로웨이가 명명했다. 영국 팝아트가 탄생하게 된 대중문화에 대한 논쟁(1954~1955)은 1954년 미국 여행에서 대중 잡지를 수집해온 존 멕헤일과 알로웨이에게서 이루어졌다. 이 단체는 <인생과 미술의 평행선Parallel of Life and Art>(1953), 그리고 <이것이 내일이다 This is Tomorrow>(1956)라는 전시회에 참가했다.

인면탑

인면탑 人面塔

캄보디아*의 앙코르* 시대 유적 중에서 프라사트*(탑당)의 사면(四面)에 커다랗게 사람 얼굴을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자야바르만Jayavarman 7세(재위 1181~1220)에 의해 세워진 불교 사원 〈바욘Bayon〉 이외에 〈타 프롬Ta Prohm〉 〈프레이 칸〉 〈반테아이 크데이Banteay Kdei〉 〈타 솜〉 등의 사원과 〈앙코르 톰〉의 성문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시대 건축의 한 특징인 것으로 추정된다. 50여 개에 이르는 이 얼굴은 불교의 로케쉬바라*(관음보살)를 나타낸다고 알려져 있다.

인물십팔묘

인물십팔묘 人物十八描

중국 인물화* 기법 용어. 역대 인물 화법을 18종의 옷 묘법(描法)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명대(明代) 왕가옥汪砢玉(우왕 로위)의 《산호망珊瑚網》, 추덕중鄒德中(처우 떠쭝)의 《회사지몽繪事指蒙》, 주이정周履靖(저우 리징)의 《이문암독夷門庵牘》 등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십팔묘는 중국 인물화 선묘예술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고고유사묘(高古遊絲描)*;부드럽고도 가는 첨필(尖筆)로서 누에가 실을 토하는듯 하다. 고개지顧愷之(꾸 카이즈, 346~407)에서 볼 수 있고 육조(六朝)시대의 인물화*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②금현묘*(琴弦描);가야금을 그치지 않고 타내려가는 듯 부드럽게 필선이 이어진다. 고고유사묘와 같은 유형이나 보다 거칠고 굳건하다. ③철선묘*(鐵線描);석면이나 철선에 비유될 정도로 강하다. 당대(唐代)의 화가 주방周昉(저우 황)의 철선묘가 유명하다. ④행운유수묘*(行雲流水描);고요한 계곡의 흐름과 같으며 구름이 가는 듯 온화하다. ⑤마황묘*(螞蝗描);난초잎이 자연스럽게 꺾여진 듯하다 하여 난엽묘(蘭葉描)라고도 한다. 정봉(正鋒)의 첨필로서 모가 나도록 구사된다.
⑥정두서미묘*(釘頭鼠尾描);뒤로 갈수록 가는 세필을 구사하여 정봉(正鋒)이 쥐의 꼬리와 같이 된다. ⑦혼묘*(混描);옷의 주름에 있어서 농담묵(濃淡墨)의 필묘가 혼합된다. ⑧궐두묘*(橛頭描);‘궐두정묘(橛頭釘描)’라고도 한다. 선묘가 가느다란 나무말뚝과 같으며, 질박하고 간솔하다. ⑨조의묘*(曺衣描);북제北齊시대의 조중달曺仲達(차오 쭝따)의 인물화에 나오는 꽉 끼고 좁은 의습선과 같다. 붓을 이용해 곡선으로 이루어진 옷주름을 표현한다. ⑩절로묘*(折盧描);첨필과 대필(大筆)로 가늘고 긴 선을 이룬다. 선이 길고 가늘어 마치 갈대를 꺾는 듯한 느낌이다. 남송南宋의 양해梁楷(량 카이)가 자주 사용하였다. ⑪감람묘*(橄欖描);용필의 처음과 끝이 가늘고 중간은 거칠어 그 형세가 마치 감람(올리브 나무)과 같다. ⑫조핵묘*(棗核描);첨필로서 장봉(藏鋒)을 이루며 필두(筆頭)가 마치 대추씨와 같다. ⑬유엽묘*(柳葉描);버들잎이 바람을 맞는 것 같다. 가늘고 부드러운 의습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⑭죽엽묘*(竹葉描);용필이 마치 대나무잎과 같다. 거칠고 딱딱한 의습을 표현한다. ⑮전필수문묘*(戰筆水紋描);정봉과 장봉으로서 그 빠르기가 파도가 밀려오는 듯 하다. 오대(五代)의 주문구周文矩(저우 윈지)가 많이 사용하였다. ⑯감필묘*(減筆描);절제되고 간략한 선묘로서 선화(禪畵)에서 많이 사용된다. ⑰시필묘*(柴筆描);마른 울타리 또는 땔나무와 같다. 날카로운 필세를 보이기도 하고 대감필(大減筆)을 보이기도 한다. ⑱구인묘*(蚯蚓描);마치 지렁이가 기어다닌 흔적처럼 곡선을 나타내며 용묵이 수윤하고 장봉을 이룬다.

인물화

인물화 人物畵 figure-painting(영)

사람을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의 총칭. 동서를 막론하고 회화사의 발전과 전개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가장 오랜 옛날부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인정되어 온 제재이다. 본래는 특정 개인을 개체적 특징에 의해 작성하는 초상화*, 또는 그와 같은 개인의 모임을 그린 집단 초상화를 말한다. 전신상뿐만 아니라 상반신이나 두부를 그린 것, 군중을 그린 것도 포함된다.
물론 사람을 주제로 하는 것이 반드시 사람만을 그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신인동형(神人同形)의 신화 등에서 주제를 택한 신화에 관한 그림이나 의인법을 쓴 우의화 등도 인물화와의 구별이 어렵다. 역사적 사건을 그림 역사화*, 나체를 그린 누드화, 일상 생활을 그린 풍속화* 등도 광의의 해석으로는 인물화에 포함된다. 이들은 내용, 제재에 따라 초상화, 신화화, 종교화*, 역사화, 풍속화, 나체화*, 전쟁화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풍경화*, 풍속화 등이 독립된 회화 장르*로 발전되기 이전, 동양에서 송대(宋代)의 산수화*가 발전하기 이전에 약간의 예외가 있더라도 회화는 곧 인물화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주제였다.

인보

인보 印譜 yin-pú(중)

옛 인장*, 또는 전각가(篆刻家)가 새긴 인장을 모아서 계보에 맞게 책으로 만든 것. 당唐의 장언원張彦遠(즈앙 이앤위앤, 815~875경)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의 한 부분인 〈서고금공사인기敍古今公私印記〉가 당대(唐代)의 감장인(鑑藏印)을 모아 수록하고 있어, 인보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보라는 형식이 성립된 것은 북송北宋의 휘종徽宗이 옛 도장을 수집해서 편집해 놓은 《선화인보宣和印譜》가 처음이지만, 현재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남송南宋 왕기王夔(우앙 치어우)의 《소당집고록嘯堂集古錄》에도 한漢, 위魏, 진秦 때의 공사인(公私印) 37개를 싣고 있어, 불완전하나마 인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후지王厚之(우앙 허우즈)의 《복재인보復齋印譜》는 현재 《한진인장도보漢晋印章圖譜》로서 전해지고 있다. 이 밖에 양극일楊克一(양 커이)의 《도서보圖書譜(集古印格)》, 안숙하顔叔夏(이앤 쑤시아)의 《고인보古印譜》, 강기姜夔(지앙 쿠에이)의 《집고인보集古印譜》 등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 또한 현재는 전하여지지 않는다. 원대(元代)에는 조맹부趙孟頫(자오 멍후, 1254~1322)의 《인사印史》가 있어 한, 위의 인장 340개를 모각하였다. 또 양준楊遵(양 쭌)의 《집고인보》, 오맹사吳孟思(우 멍쓰)의 《오씨인보吳氏印譜》 등도 있었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명대(明代)에 고종덕顧從德(꾸 충더)이 왕상王常(우앙 츠앙)과 함께 이제까지의 고인보를 모두 모아 새롭게 《집고인보》를 편집하여 만력 3년(萬曆, 1575)에 이를 간행한 이래로, 고동인보(古銅印譜)가 잇달아 저술되고, 전각도 부흥하여 그 각인(刻印)의 인보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청대(淸代)에는 인장에 대한 학문이 성행하여, 새로 출토된 옛 동인장도 첨가하고 방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우수한 인보가 나타났다. 동시에 명대에 시작된 문인의 전각이 청 건륭 연간(乾隆, 1736~1795)에는 더욱 유행하고, 이와 함께 각인의 인보도 많이 만들어져, 청 말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명, 청의 인보는 인전(印箋)에 검인한 것을 모은 서책으로, 감상가의 서문을 붙여 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