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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니슴

자포니슴 Japonisme(프)

자포니슴이란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예술 전반에서 일본의 영향이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말은 예술의 형식, 내용, 양식, 기법 등 거의 모든 국면과 관련되며, 그 범위도 회화, 조각, 공예로부터 건축, 사진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하다. 그만큼 일본 취미는 19세기 중반 이후 전 유럽을 통해 확산된 현상이었으며, 그 유행의 배경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미학적 측면으로, 당시 유럽의 전위 예술이 일본의 예술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풍토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영향의 정도나 성과는 영향을 미치는 쪽의 힘 뿐만 아니라 받는 쪽의 필요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물론 19세기 이전의 서구에도 일본의 미술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는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서양미술사의 맥락에서 그 영향 관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때는 그때까지 여전히 원근법과 명암에 의한 현실 재현의 미학에 부동의 권위를 지녀 왔던 서구의 미학이 큰 변화를 맞이하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두번째는 일본에서는 예술이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회 문화적 특성이 지적된다. 예술 작품이 곧 하나의 독립된 소우주를 의미했던 서구적 사고와는 달리, 일본의 전통적 예술관에서 보면 일상용품이 끊임없이 예술품이 되고자 했으며, 또한 예술 작품 역시 본래의 예술적 특성을 간직한 채 생활 속에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 즉 실용과 미, 나아가서는 생활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예술의 통합 개념이 일본의 미술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세련된 모습으로 실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서구 미술 중에서도 특히 19세기말의 다양한 예술 및 건축적 혁신 운동이 예술이 지닌 직인(職人)적 측면을 새롭게 평가하는 움직임 아래 이상으로 삼았던 개념이기도 하다.
특히 주느비에브 라캉브르Geneviéve Lacambre는 프랑스에 있어서의 일본 미술의 수용 양상을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누어 분석했다. ①절충주의적 요소들 속에 일본의 모티브*를 도입하는 단계로, 이는 다양한 나라와 시대의 장식적 모티브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받아들여 단순히 덧붙이는 것을 말한다. ②일본이 지닌 이국적 또는 자연주의적인 것의 선택적 모방. 특히 초기 일본 취미의 단계에서 볼 수 있는 자연주의적 모티브의 동화. ③일본의 세련된 기법의 모방. ④일본 미술의 원리와 방법의 분석 및 응용 등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발견, 채용, 동화, 창조하는 전형적인 이문화(異文化) 수용의 순서를 그대로 보여 주며, 그 시기라든가 정도, 방식에서 차이는 있지만 프랑스 이외의 다른 서구 국가들에 대체로 적용시킬 수 있다. 여기서 앞의 두 단계가 반드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피상적인 취미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뒤의 두 단계는 완벽한 소화에 근거한 본질적인 영향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자화상

자화상 自畵像 self-portrait(영)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해서 그린 초상화. 자화상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protrahere’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 말은 원래 끄집어내다, 발견하다, 밝히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뜻의 ‘portray’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라는 의미의 self와 portray가 합하여 이루어진 자화상은 간단하게 ‘자기를 끄집어내다, 밝히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화상들은 두가지 목적에 사용되었다. 즉, 화가들이 스스로 가장 돈이 안드는 모델이 되는 것과, 또 나아가서는 자신을 불멸화하는 이상적인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자화상에서 공통분모처럼 발견되는 욕구는 자신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다. 화가는 자신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내면의 절대적인 욕구에 의해 자화상을 그리게 되며 때때로 이러한 자아 탐구는 자학에 가까우리만큼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하는 자기 성찰과 신적인 영역으로까지 자신을 우상화하는 자기 도취의 양극을 오르내리곤 한다.
고대와 중세에는 극히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화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자화상이 나타난 것은 15세기, 즉 예술가의 사회적인 지위가 향상되고, 일반적으로 인물의 묘사가 사실적으로 다루어지면서부터이다. 처음에는 주로 종교화나 스토리화 등의 넓의 화면의 한 구석에 작가가 자신의 모습을 그렸었다.
피디아스Phidias, 얀 반 아이크Jan van Eyck(1390~1441), 마사치오Masaccio(1401~1428) 등이 대표적이다. 이 경우 자화상은 서명의 역할을 했다. 이러한 종류의 자화상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도 존재했으며, 르네상스*까지는 흔한 일이었다. 또다른 형태의 그림 서명은 화가 자신이 그림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며, 파리스Matthew Paris, 기베르티Lorenzo Ghiberti(c.1378~1455) 등이 그 예이다.
자화상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는 뒤러Albrecht Dürer(1471~1528)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대상으로 얼굴 표정을 연구하고 미와 조화의 법칙에 대한 시범을 보였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자화상은 회화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1669)는 초상화에 심리적, 예술적 차원을 부여한 화가로서 그가 남긴 약 60개의 초상화와 20여개의 판화는 객관적으로 기록한 감동적인 자기의 삶의 기록이다.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a Y Velasquez(1599~1660) 같은 화가는 과시를 위해 자화상을 그렸으며, 낭만주의 시대 이후의 화가들은 자신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별난 차림의 자화상을 그리곤 했다. 20세기에 와서는 이런 식의 고백은 양상을 달리 하여, 야수주의의 한 화가는 자신을 아프리카 추장으로 나타내어 자기에게 영감을 준 원시 예술을 그렸고,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발가벗겨 자화상 속에 정신분석가의 진찰실 소품들을 그려 놓았다.

작 爵

→ ‘이기’ 참조

잔 醆

→ ‘이기’ 참조

잔산잉수

잔산잉수 殘山剩水

중국 남송南宋 화원(畵院)에서 활약하던 마원馬遠(마 위엔), 하규夏珪(시안 꾸에이) 등이 즐겨 사용한 산수화* 구도법. 북송北宋 패망 후 남송으로 이어지면서 새로 정착하게 된 강남지방의 한정된 자연 경관을 대상으로 했던 마하파*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패잔망국(敗殘亡國)의 산수’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었다.
대상을 파악하는 방법이 소규모적이고 산이나 수목 등 개개의 경물(景物)이 광활하게 전개되지 않으며, 화면의 좌 우 아랫구석으로 몰리게 그림을 그리는 구도를 보여준다. 중앙 윗부분에 상당한 여백이 있어 여백부분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크며, 대각선 구도를 주로 사용하여 시각적 여운을 느낄 수 있다. 이같은 형식은 마하파 산수화의 특색이고 그림 중 인물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잔상

잔상 殘像 afterimage(영)

주시하고 있던 물체가 없어진 뒤 한참 동안 그 모양이 눈에 느껴지는 상태. 양성 잔상과 음성 잔상이 있다. 양성 잔상이란 자극광(刺戟光)과 같은 감각이 남는 것으로서, 비교적 강한 자극을 단시간 받았을 때 생긴다. 이에 반해 자극을 받은 빛과는 명암이 반대가 되어 그 보색이 나타나는 것을 음성 잔상이라고 하며, 보통 정도의 강도를 장시간 응시했을 때 생긴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의 영상은 양성 잔상을 이용한 것이고, 음성 잔상은 각기 다른 색을 나란히 놓았을 때 그 각각의 색은 그것이 단독으로 있을 때보다 빛깔이 옆에 있는 색의 보색에 접근해 있는 듯이 보이는 현상이다. 이러한 음성 잔상을 색상의 대비라고도 하는데, 배색 효과를 살리는 데 매우 중요하다.

잡상

잡상 雜像

기와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장식된 토우(土偶). 10신상이 있는데 ①삼장법사 현장을 가리키는 대당사부 ②손오공을 의미하는 손행자 ③저팔계 ④사오정을 의미하는 사화상 ⑤마화상 ⑥삼살보살 ⑦이구룡 ⑧천산갑 ⑨이귀박 ⑩나토두이다.

잡체서

잡체서 雜體書

서체*의 명칭. 고대로부터 행해진 의장 문자(意匠文字). 예를 들면 조충서鳥蟲書(鳥書), 유전(繆篆, 篆書) 같은 글씨가 육조(六朝) 시대에 이르면 더욱 발달하여, 병풍에 채색 또는 묵*으로 쓴 것들이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유송劉宋(後宋), 남제南濟, 양梁 시대에는 여러 가지 의장 문자가 나타나서, 많을 경우에는 100~1,200체에 이르게 된다. 이 가운데 글씨는 보통 전서*와 예서*를 포함하여 잡체서라고 했다. 예를 들면 유송의 왕음王書(우앙 인)이 쓴 《문자지文字志》에 고문전(古文篆), 대전*(大篆), 상형전(象形篆) 이하 36종의 서체가 있고, 양나라 소자량蕭子良(샤오 쯔리앙)의 《전예문체篆隸文體》에 용서(龍書), 고문전(古文篆), 구서(龜書), 운서(雲書) 이하 43종의 서체가 있다. 또한 양나라 유원위庾元威(위 위앤웨이)의 《논서론서論書論書》에 십첩병풍백체(十牒屛風百體)를 채색, 묵서(墨書)로 나누어 쓴 것도 있다.

잡화

잡화 雜畵

동양화에서 회화*를 분류한 13과(科) 외의 회화류. 남송南宋의 등춘鄧椿(덩 추운)의 《화계》 권7에 ‘소경잡화(小景雜畵)’라는 말이 최초로 보인다. 말 그대로 인물화*, 화조화*, 산수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잡다한 그림을 가리킨다.

장 章

→ 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