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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정자각 丁字閣

제의식이 이루어지는 건물로 우리나라에서는 왕릉건축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것이며 중국의 묘사(廟寺)건축과 일본의 신사*(神社)와 유사하다. 원류는 중국의 묘사건축에서 찾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서는 신사건축물 유형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자각의 건축적 원형은 조선왕조의 본관인 전주 〈조경묘肇慶墓〉와 영흥본궁永興本宮의 〈정전正殿〉과 〈이안당移安堂〉 등에서 찾아볼 수 있고, 전주 〈경기전慶基殿〉과 개풍군 〈목청전穆淸殿〉을 조형(祖型, archetype)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전각들은 진영(眞影)을 모시고 간단한 제례를 올리는 불교식 진전(眞殿)의 성격을 띤 정자각의 조형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왕릉능제에 제각(祭閣)의 기능을 부여받아 봉분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때에는 불교식 진전 폐지 논의와 더불어 주자가례에 입각한 국왕가묘(國王家廟)로 전환되었다.

정착액

정착액 定着液 fixative(영)

서양화에서 분필이나 목탄*, 콘테*, 연필 등으로 그린 그림이 지워지거나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회화의 표면에 뿌리는 조합제(調合劑)의 일종. 송진이나 셸락(shellac) 같은 투명한 합성수지를 알코올에 용해시킨 액체 형태를 띠고 있다. 정착액은 파스텔화에 필수적이지만 색소의 입자를 더욱 투명하게 만들어서 그림의 명도를 오히려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치 미술

정치 미술 政治美術
political art(영)

정치 상황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난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미술을 총칭한다. 사회 전반의 모순과 불합리를 고발하고 폭로하며, 사회경제적, 정치적 구조와 직접적으로 대립하거나 충돌하는 등 격렬한 어법을 구사한다.
20세기의 정치미술 중에서 획기적인 것으로는 1920년경 구(舊)소련의 아방가르드* 미술, 1930년대의 멕시코 벽화주의* 운동과 미국의 WPA 프로젝트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미술의 대중화를 지지하거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좌익의 견해를 반영하였다. 우익의 시각은 나치와 파시스트 정권 하의 미술과 건축에서 표현되었는데, 아리안 족의 젊은이들이 그린 회화는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의 야심을 선전하였다.
한편 1920년대 독일 표현주의*와 다다*는 플래카드를 효과적인 선동 양식으로 사용하였고,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은 이것을 언어보다 강력한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베를린 다다는 콜라주*나 인쇄술, 포토몽타주* 등을 정치 비판의 주된 표현수단으로 삼았으며, 독일의 유명한 정치 미술가인 슈텍Klaus Staeck은 플래카드나 포스터*, 피켓 등을 사용하여 정치 현실에 대한 선동적인 비판을 가했다. 또한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이나 독재에 항거하는 투쟁, 사회주의 사회를 형성하는데 미술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정치미술이 활성화되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정치미술이라는 용어는 명백히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현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작품을 의미한다. 정치미술을 제작하는 작가로는 바라닉Rudolf Baranik, 골럽Leon Golub(1922~ ),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로슬러Martha Rosler, 페미니스트 아트 워커스Feminist Art Workers, 게릴라 걸스Guerilla Girls 등이 포함된다. 한편 1970년대 초에는 하케Hans Haacke(1936~ ), 버긴Victor Burgin, 코주스Joseph Kosuth(1945~ ), 미술과 언어*(Art & Langauge) 그룹의 회원들처럼 개념미술*적인 태도를 취했던 작가들도 정치참여적인 활동으로 전향하였다.

정크 아트

정크 아트 Junk Art(영)

일상 생활에서 생긴 폐품이나 잡동사니를 소재로 제작하는 미술. 입체주의* 작가인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와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의 파피에 콜레*,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콜라주*, 슈비터즈Kurt Schwitters(1887~1948)의 메르츠* 등 선구적 원천이 있지만, 본격적인 정크 아트의 출발점이 된 것은 라우센버그 Robert Rauschenberg(1925~ )의 컴바인 페인팅*이다. 이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서는 특히 기계의 부품 등 현대 문명이 토해 낸 산업 폐기물이나 공업 제품의 잔해를 소재로 사용하는 작가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동시에 등장했다.
정크 아트 작가로는 부서진 자동차 부품을 이용했던 챔벌레인John Chamberlain(1927~ ), 쓰레기 금속이나 나무, 타이어 등으로 거대한 건축물을 만든 수베로Mark di Suvero, 파괴된 가옥의 목재와 가구로 거대한 부조* 작품을 제작한 네벨슨Louis Nevelson(1899~1988), 압축시킨 자동차를 쌓아올린 세자르César Baldaccini(1921 ~), 아르망Arman(1928~), 파올로치Eduardo Paolozzi(1924~ ), 팅겔리Jean Tinguely(1925~1991), 스탄키에비치Richard Stankiewicz 등이 있다. 또한 캐프로Allan Kaprow(1927~ )의 작품과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까지 환경과 해프닝*에 있어서는 쓰레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의 일환으로 도시의 파괴되고 버려진 소비재들을 앗상블라주* 형태로 작품에 차용*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노골적으로 재도입하였다. 1950년대에 나타난 이러한 경향을 가리켜 알로웨이Lawrence Alloway(1926~1990)는 예술이 도시 생활의 소비 물자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특히 버려진 소비 물자를 오브제*로 구체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며 정크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정크 아트라는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 전부터 이미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은 산업 폐기물을 대규모로 방출하기 시작했다. 산업 쓰레기장과 자동차 폐기장은 미술가들에게 좋은 재료의 공급처가 되었다. 미술가들은 이러한 산업 폐기물을 용접하거나 혹은 발견된 오브제*로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대리석을 조각하거나 청동을 주조한 것보다는 용접된 철제와 강철이 기계시대에 보다 걸맞은 조각의 재료라는 사고가 함축되어 있다. 몇몇 작가들은 발견된 그대로의 오브제*를 제시하였지만 일부 작가들은 이를 변형시켜 추상적이고 서정적인 조각을 창조하였다.

정통 사진

정통 사진 正統寫眞
straight photography(영)

연출이나 필름의 수정, 인화과정에서의 회화적인 특수표현 등의 작위를 가하지 않고, 카메라 촬영기법과 인화과정 등 사진의 본질적인 메커니즘에만 의지하는 사진의 본래적인 표현을 강조한 사진적 경향을 일컫는 말.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적 가치를 가진 순수예술이 되도록 이끌었다. 정통 사진에서는 고무인화, 글리세린 처리, 음화와 양화 위에 그리거나 긁어 지우는 방법 등의 기교적인 암실기법은 철저하게 배격된다. 이 용어는 1904년 평론가 사다키치 하트맨이 《카메라 워크Camera Work》에 기고한 사진전시회평에서 사진작가들에게 “정통적 방식으로 작업을 하라”고 충고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흑백사진이 컬러사진보다 사실적이므로 선호되었고, 정통 사진의 모더니즘의 전통은 20세기 전반기 동안 기록사진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근대 사진가인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1864~1946)는 정통 사진을 회화, 조각과 동열에 놓고 옹호함으로써 사진이 다른 예술분야와 보조를 같이 하는 하나의 순수예술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통 사진은 1909년부터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되어 왔으나, 거래시장은 전통적인 형식의 회화와 조각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드문 현상이 나타난 1970년대에서야 형성되었다.

제단

제단 祭壇 altar(영)

신이나 신격화된 존재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단(壇). 의식(儀式)을 행할 때 공물(供物)을 바치기 위해 다른 곳과 구별하여 신성화한 장소나 혹은 그 구조물을 말한다. 고대에는 흙을 돋우어 만들거나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형태의 제단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도 방형(方形)의 벽돌이나 마석(磨石)을 사용한 것이 있다. 페르가몬의 제단이나 아라파키스의 제단처럼 웅장한 크기의 제단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제단은 신전 안에 두지 않고 신전의 앞이나 옆에 두었다. 한편 기독교에서의 제단은 교회의 중심부에 설치되어 신자들이 집중할 수 있게 한 탁자처럼 생긴 단을 가리킨다. 이것은 엄격히 예배 의식의 기능만을 하는 신성한 탁자로 간주되며 성경과 성찬용품만을 그 위에 놓을 수 있다.

제단화

제단화 祭壇畵 altarpiece(영)

기독교 교회 건축물의 제단* 위나 뒤에 설치하는 그림이나 조각* 또는 장식 가리개. ‘제단 뒤 선반(retable)’ ‘제단 뒤 장식 병풍(reredos)’이라고도 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교회에서 제단은 신성한 장소로 간주되었으므로 일체의 장식이 금지되었다. 제단에 성인들의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은 10세기경 이후에야 가능했으며, 제단 뒤에 설치된 장식 칸막이가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던 시기는 14~15세기에 들어서였다. 특히 반종교개혁 시기에 들어서 제단 뒤의 칸막이는 제단의 필수적인 중요한 요소가 되었으며, 이후 12세기경부터 교회의 수호성인, 사도*들, 교회박사들, 성경 속의 여러 사건들을 그린 목재 칸막이를 설치하는 것이 점차 일반화되었다.
제단 가리개는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으로 병용하는 경우도 있다. 조각만으로 장식하는 것은 제단 조각(리아도스)이라고 한다. 중앙 패널* 양측에 날개 패널을 나란히 놓고 문처럼 열고 닫는다. 제단화는 일반적으로 세폭 제단화*(triptych)의 형태가 많지만, 그 외에도 날개가 많은 다폭 제단화(polyptych)나 휴대 가능한 소형의 두폭 제단화*(diptych)도 있다. 주로 삼면 이상의 제단화는 성서의 주제 가운데에서도 근원적인 주요 주제를 중심으로 한 대작이 많다.
제단화의 장식적인 모티브*는 국가와 지역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탈리아에서는 성직가들의 생애나 성격의 장면들을 묘사한 제단화가 주를 이루었으며, 화판 가장자리를 금도금으로 장식하고 칸막이의 수를 늘려 복잡한 주제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틀 장식은 줄어들고 그림도 단일화되었으며 제단화는 건축의 일부로 장식되었다.
14세기 알프스 북부에서는 ‘날개 달린 제단(winged altar)’이라는 독특한 양식의 제단 장식이 발달하였다. 이것은 중심 화판의 양옆에 그림을 그린 두 장의 화판을 붙여 접고 펼 수 있게 한 것으로, 과거에 성물함을 넣어두던 제단 뒤 선반에서 기원한 것이다. 서로 관련된 별개의 세장면을 보여주는 세폭이 한 벌로 된 이 제단 뒤 칸막이 양식은 17세기까지 주류를 이루었다. 스페인의 교회에서도 방대한 이야기와 여러 일화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된 거대한 칸막이를 선호했으며 그 가장자리는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종교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석재 제단을 선호했다.
14세기 영국에서는 제단 뒤 벽 전체를 예수와 성인들의 상을 세운 벽감*으로 장식한 독특한 양식의 제단화가 발달했다. 15세기에는 제단 장식이 더 많아져 15세기말에는 거의 모든 제단 뒤에 장식 선반이 설치되었다. 종교개혁*으로 16세기 영국과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그림으로 제단 뒤를 장식하는 일이 사라진 반면 반종교개혁 교회에서는 제단 뒤에 교회의 수호 성인을 그린 그림을 붙여놓을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런 과정에서 제단과 그 뒤의 칸막이는 실내장식*의 일부가 되었다. 종교적 외경심과 호화로움을 직접 느끼게 하기 위해 화려하게 장식한 바로크 시대의 제단은 17~18세기 가톨릭 제단의 모범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제단 뒤 칸막이 디자인은 전통적인 형태를 고수하고 있을 뿐 새로운 점은 거의 없다. 한편 현대 교회는 구조가 단순해서 전통적인 장식 형태와는 어울리지 않고 제단 장식에도 부적합하다.

제로 그룹

제로 그룹 Gruppe Zero(독)

마크Heinz Mack, 피네Otto Piene가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조직한 예술가 그룹으로 후에 우에커Günter Uecker가 합류하였다. 앵포르멜* 및 감정의 주관성, 사실주의*의 모든 형식을 거부하였으며, 제로 그룹이라는 명칭도 ‘영점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폰타나Lucio Fontana(1899~1968)의 공간주의*나 만조니Piero Manzoni(1933~1963)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재료를 탐구하였고, 특히 빛과 광선의 사용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네온사인의 빛을 사용하는 등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의 시위적 전시에 공감하였다. 오토 피네는 거대한 풍선에 착색 가스를 가득 채우고 조명을 비추어 <빛의 발레>를 연출하기도 했다. 과학기술을 사용한 환경 미술*의 차원으로 나아간 제로 그룹은 원래 미술가와 과학자의 교류 증진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래서 활동의 폭이 넓었다. 이외에도 시간과 운동성, 움직임과 관련된 기하학적 추상*을 발전시켰고, 특히 자연적 소재의 역동성과 일련의 리듬 이용에 주목하였다.
제로 그룹은 자신들의 사상과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정기간행물인 《제로》를 발간했고, 유럽의 여러 새로운 경향의 그룹들과 공동으로 단체 작업을 벌였으며 뉴욕과 필라델피아 등 미국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다. 1958년과 1961년에 재조직되었던 이 그룹은 하노버에서의 전시를 마지막으로 1966년 해체되었다. 제로 그룹은 창설된 이래 뒤셀도르프의 아방가르드*로서 오랫동안 미술계의 관심의 대상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한편 그룹이 공식적으로 해체된 이후에도 마크는 1970년대에 사하라 사막에서 금속 조각에 의한 모래와 바람, 빛으로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피네는 기구를 이용한 에어 아트*와 공기, 불, 빛, 소리 등의 원소를 사용한 환경 미술 및 관객과 청중이 참가하는 퍼포먼스* 등을 지속적으로 실험하고 있다.

제발

제발 題跋

서적이나 비첩(碑帖), 서화 등에 쓰이는 제사(題辭)와 발문(跋文). 서화권(書畵卷)이나 첩책(帖冊)에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기록을 적은 것이다. 본래는 앞에 쓰이는 것을 제(題) 또는 제사라고 하고 뒤에 쓰는 것을 발(跋) 또는 발문이라고 하지만 흔히 제발이라 통칭되는 경우가 많다. 당 오대(唐五代)에 소수의 예가 있지만 당시에는 정착되지 못했던 듯 하다. 송대(宋代)에 이르면 감상법의 발달에 따라서 제발을 적는 일이 많아지며, 그것이 정돈된 저술로서 전해졌다.
구양수歐陽修(어우 이앙서우)의 《집고록발미集古錄跋尾》, 소식蘇軾(쑤 스, 1036~1101)의 《동파제발東坡題跋》, 황정견黃庭堅(후앙 띵지엔, 1045~1105)의 《산곡제발山谷題跋》 등이 바로 그것이다. 즉 송대에 이르러 그림의 화면 위에 시(詩)와 글씨를 적어 넣음으로써 회화와 문학, 서예가 하나로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훌륭한 제발은 그림의 미적 가치나 내용을 보충하며, 화가의 사상이나 감정 및 예술관을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회화작품의 내재미를 높이는 것이다.

제방서

제방서 題榜書

→ 방서